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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염려하십니까?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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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염려하십니까? (빌 4:4-7)   
  

어린이들이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걱정과 실망과 염려에 휩싸여 있는 우리를 향하여,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실망하고 염려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묻고 있는 어린이들의 노랫말입니다.

1.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이 단순한 질문은 우리의 신앙자세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질문입니다.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짜로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염려라는 단어와는 상관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고발입니다. 
이 질문을 자신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6절에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과 같은 명령입니다. 
즉 성도는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염려할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은 ‘한 가지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 교우들에게 ‘한 가지’라도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염려를 분석한 한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가 100가지를 염려한다면, 그 중에서 40가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태양이 폭발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종류의 염려이지요.
또 그 중에서 30가지는 염려해봤자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을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초음파검사를 통하여 태아의 성별이 ‘여자’라고 확인이 되었는데 ‘딸을 낳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종류의 염려이지요.

또 그 중에서 12가지는 건강에 대한 염려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혹시 나쁜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그 중에서 10가지는 생각을 잘못해서 염려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성격이 내성적인데, 앞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까?’ 
여러분, 성격이 내성적이면 사회생활을 못합니까?

계산해보십시오! 
그러니까 92%, 거의 전부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염려는 근거가 없는, 할 필요가 없는, 막연하고 단순한 걱정일 뿐입니다.
우리말에 ‘근심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거의 습관적으로 염려 불안증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걱정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염려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염려하다’의 영어단어는 ‘worry’인데, 이 단어는 ‘질식시키다’ ‘목 졸라 죽이다’(to strangl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영혼이 점차로 질식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심령이 점차로 질식됩니다.
염려가 심화되면 정신질환의 일종인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일으키게 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육체가 점차로 질식됩니다. 
‘염려는 어떤 암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삶이 점차로 질식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생활의 활력을 잃고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2. 그렇다면 이 무서운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6절 하반절에 보면, “…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 근심, 걱정의 내용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면 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까?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마 6: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주님께서 염려를 달고 사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먹이신다.’라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란, ‘하나님은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새까지도 돌보고 계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강한 부정의문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그렇겠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 당연히 그렇습니다.
새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계시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아무리  카나리아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기 자식보다 그 새를 더 사랑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늦은 밤에 아들이 와서 “새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을 못 자겠다”고 하면 아들을 보고 “그러면 네가 바깥에 나가 자라!”고 버럭 소리 지를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어떤 힘든 상황일지라도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울 때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면 바지를 벗겨서 맷자국이 어떻게 됐는지, 멍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멍이 크게 들었는지 작게 들었는지, 꼭 확인했습니다.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냥 잘 수가 있나요?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때로는 그의 자녀들을 징계할 때도 있지만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은혜가 더 크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를 믿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수준이라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신묘막측합니다. 
욥기 38장에서는 이렇게 반문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4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8절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18절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22절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41절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마치 ‘네가 지혜 있다면 어디 한번 대답해보아라’라고 다그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쇠똥구리는 쇠똥을 공처럼 만들어서 그 속에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애벌레가 생기면 그 애벌레는 축축한 쇠똥을 먹고 자랍니다. 
그런데 쇠똥 공에 구멍이 뚫리면, 애벌레는 본능적으로 분비물을 내서 그 구멍을 막는답니다. 
왜냐하면 구멍이 뚫려 공기가 들어와 속의 쇠똥이 굳어지면 애벌레는 먹을 것이 없어져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또 거미는 거미줄을 친 다음 숲속에 들어가서 숨어버립니다. 
그러면 그물에 먹이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거미는 거미줄과 자기 뒷다리에 실을 연결시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뒷다리가 흔들리면 먹이가 걸린 줄 알고 어슬렁어슬렁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는 때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너무 지체하신다거나 먼 길을 돌게 하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는 상황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누가 눈치라도 챘겠습니까?
노예로 애굽 땅에 팔려온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어 자기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창 45:5) 
바로의 궁전에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난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학교를 통하여 그 민족의 지도자가 될 줄을 누군들 눈치 챘겠습니까?(출 3장) 
아들 못 낳는다고 구박받아 하나님께 신음하듯 기도한 한나의 태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이 태어난 줄 누군들 예측했겠습니까?(삼상 3장)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를 믿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복음성가- 하나님을 너를 만드신 분

3)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왜 이 말씀이 요절이 됩니까? 
그 말씀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을 똑똑하게 알려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에 보면 이 능력 많은 하나님을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한탄합니다. 
롬 1: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섭섭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지 말길 권면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염려는 떠납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 그 뜻을 가로막을 홍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 그 능력의 손길을 붙잡아맬 광야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 그 힘의 물줄기를 틀어막을 바위 덩어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나안 점령전쟁을 치루는 여호수아는 가나안 부족들의 성을 공략한 다음 늘 ‘길갈’에 회군하였습니다.
수10:7절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수10:15절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수10:43절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이미 점령한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점령한 인근의 아이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호수아장군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먼 곳에 있는 길갈로 회군했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유가 있습니다.
길갈에는 요단강에서 채취한 돌 기념비가 있는 곳입니다.
그 내용이 수4:4-7절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하니라.”

요단강물이 범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엄쳐 건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리를 놓아 건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를 타고 건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 물길이 마치 두부모 자르듯이 멈춰 섰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육지를 지나듯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여호수아는 요단강 바닥에서 지파별로 12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기념비가 길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군사들은 길갈의 돌 기념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기억하고 다시금 가슴 가득히 채워지는 그 무엇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군사들을 이끌고 길갈로 회군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회복되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염려는 퇴역한 군인의 가슴에 붙은 훈장처럼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얼굴에 늘 근심이 드리워져 있어요! 
저도 때로는 염려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소리쳐 기도합니다. 
“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의 지혜를 믿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극복할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싸늘해진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다에는 게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다 속에 있는 게나 파도를 타는 게나 살아있는 게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게가 말입니다! 
게에게는 물살을 가를 지느러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게는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자기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절대로 상황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비록 그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본문 빌 4:6절을 다시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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