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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문이 열리게 하자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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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문이 열리게 하자 (마 3:13-17)
 
  
제가 어릴 때에 시골의 외삼촌 집에 가면 대문이 싸리문이었습니다. 싸리문은 싸릿대를 엮어서 만든 문으로 싸릿대 사이로 안과 밖이 훤히 들여다 보였습니다. 싸리문으로 문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경계선일 뿐이었습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이런 대문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각목에 함석을 붙여서 대문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한 재료의 변화지만 대문 안과 밖의 사람 사이에는 가로 막힘이 있었습니다. 

함석 문 다음으로 등장한 문이 철문이었습니다. 쇠로 만든 대문 위에 철근으로 뽀족하고 날카로운 창과 같은 모양을 대문위에 붙여서 밖에 있는 사람이 대문 위를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위협적인 문이었습니다. 문에는 초인종을 달아 놓고 누구인가를 확인한 후에야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요즘은 아파트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예쁩니다만 실상을 보면 더 살벌합니다. 현관에서부터 번호를 모르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또 집 대문에 키가 두 개씩 달려 있고 거기에 번호 키까지 달려 있습니다. 집 안에서 화면으로 상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까지 되어 있어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후에 문을 열어줍니다. 

한자에서 문(門)의 의미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 주는 통로이며 그 통로를 이용해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는 중요한 접촉점입니다. 문이 견고하게 만들어 질수록 사람들도 서로를 향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사람들은 대문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닫아 자신의 영역과 소유를 더 확실하게 확보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문을 견고하게 닫으면 닫을수록 도리어 더 외로워졌고 불행해졌습니다. 문은 상대방을 향해 닫을 때보다 열 때가 더 행복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이 서로를 향해 굳게 닫혀 있으면 거기에는 평안과 행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우리의 마음의 문이 하늘을 향해 즉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우리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이 닫혀 있으면 행복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마음의 문과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은 광야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털로 옷을 만들어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며 깊은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외칠 때 헤롯왕을 비롯해서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며 긴장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에 환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400년이라는 기간의 공백이 있었고, 학자들은 이 기간을 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라는 선지자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를 보내 주겠다는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가 죽은 후에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말씀도 들려주지 않으셨고, 선지자를 보내 주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침묵하시며 선지자를 보내주시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어느 날 광야에서 요한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며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식했습니다. 요한은 ‘천국이 가까워 왔으니 회개하라’ 고 말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의 외침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세리, 군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과 같은 종교지도자들, 수많은 군중들이 요단강으로 나와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세례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낮아짐의 의식이었습니다.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의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사람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라며 ‘네가 도리어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까?’ 하며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라 우리가 그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데 합당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모든 의’라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높아지기 위해 선악과를 따 먹고 멸망의 자리까지 낮아졌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낮아져 섬김의 삶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택하신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낮아짐의 상징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짐을 의미합니다. 다가오는 천국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의 것임을 당신의 세례 받으심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며 자신을 낮추실 때 그 때 나타난 현상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마음을 낮고 겸손하게 자신의 마음 문을 여는 자를 향해 하나님도 하늘 문을 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의 개념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갖고, 더 강해지고, 더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국은 욕심과 정욕을 내려놓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낮아져 섬기는 곳에 진정한 천국이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주 관광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올레길이라는 것은 큰 길과 연결되어 있는 골목길, 작은 길을 말하는 제주도 지방의 방언입니다. 큰 길, 넓은 길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성공의 길입니다. 성공을 위한 도시화의 길이고, 야망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는 성공을 위해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살벌한 세상입니다. 그 큰 길에서 잠시 벗어나 그 동안 다니지 않고 잊었던 골목길, 작은 길을 걸으며 큰 길에서 성공과 야망을 위해 앞만을 보고 뛰던 삶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바쁘게 질주하는 가운데 살펴보지 못했던 주변의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큰 대로에서 경쟁하며 사는 가운데 받은 상처와 아픔이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조그만 올레길을 걸으며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으며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큰 길에서 남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는 힘에서 얻을 수 없었던 평안과 행복을 움켜쥐었던 것을 내려놓는 작은 길을 걸으며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낮고 겸손함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하늘 문도 활짝 열려 천국이 이뤄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주일 아침에 예수님의 낮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들도 품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활짝 여는 가운데 하늘 문이 우리를 향해 열리는 은혜를 경험하는 삶의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위에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은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은 불과 강한 바람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 예수님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비둘기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함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하심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하늘의 문을 여는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받고 일어서는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 되심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낮아지시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여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세례를 받으시는 공생애 시작의 장이 되는 요단강가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최고의 영성가로 인정받고 있는 헨리 나우엔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얼만 전까지만 해도 하버드와 예일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존경을 받는 대학 교수로서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86년에 갑자기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표를 내고 떠납니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정신지체 장애인 몇 사람이 머물고 있는 데이브브레이크 공동체에 가서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1996년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0년간 그곳에서 그들을 돌보며 생활합니다. 그가 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을 보면서 쓴 첫 번째 책이 ‘탕자의 귀향’입니다. 그는 자기가 탕자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카톨릭 예수회의 사제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찾아서,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서, 학문의 성취도를 찾아서 삶을 살았던 탕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정신지체 장애아들을 돌보며 비로소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책의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고 붙였습니다. 

나우웬은 조금 지나서 ‘아담’이라는 또 한권의 책을 썼습니다. 장애인 공동체 안에는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애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담의 발을 씻겨주고 섬기는 가운데 아담이라는 소년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담이라는 장애아를 향해 지체아, 병신이라고 말하지만 나우웬은 그 아이의 순수한 영혼 속에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담이라는 아이는 자신을 정성스럽게 도와주는 헨리 나우웬 신부를 향해 더듬는 말로 ‘나···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우웬은 그 아담이라는 정신지체 장애아의 더듬거리는 말속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직장을 그만 두고 목회의 길,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자리로 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직장과 삶의 자리는 매우 소중한 자리입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터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임을 알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낮아짐의 영성을 본받아 조금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쳐있고 아파하는 이들을 향해 마음 문을 열고 돌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삶의 자리에 비둘기 같은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낮아짐의 영성을 가지고 섬김의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해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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