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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엡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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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엡 1:1-2)


제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사역에 헌신한지 금년으로 4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만일 이 40년의 세월 중 가장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는 서슴없이 그중의 하나가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사역하던 당시 1986년만 해도 소위 미주내 유학생들의 유학생 촌에는 교회들이 별로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가 기도 중에 일년에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영적 축제를 제공하여 그들에게 전도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비전을 제공하여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굉장한 영적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워싱톤 지구촌 교회의 전적인 지원으로 시작한 사역이 바로 KOSTA(Korean Students in America)사역이었습니다. 이 사역이 이제는 전 세계 13개국에서 해마다 1만 명이상의 유학생들과 디아스포라 한인 청년들이 참여하는 사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KOSTA의 의미도 이제는 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이 코스타 25년을 기념하는 “복음/ 조국/ 땅끝”을 주제로 하는 축제(시카고 휘튼대학)에 강사로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25년은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25년 동안에 코스타 시작 초기 모이기만 하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안타깝게 기도하던 조국은 민주화되었고, 참으로 가난에 울어야 했던 조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는 나라가 되었고, 복음을 받기만 하던 피선교국 한국은 전 세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 한국이 되었습니다. 

미주 코스타는 지금은 대학원생 이상으로 모이는 모임과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나누어 모이고 있는데 본래 미주 코스타 초기에는 주로 대학원생과 많은 연구원생(포스닥)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번 강사중 한분이 전 외무장관 윤영관 님이셨는데 그는 제1회 코스타 모임에 참여하여 도전을 받고 기독교인으로 조국을 향한 헌신의 비전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을 통해 민족의 평화 통일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카이스트의 장평훈 교수, 연변 과기대의 정진호 교수, 의 저자로 몽골 국제대학을 섬기는 이용규 교수등 수많은 기독교 지성들이 모두 코스타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울 사도에게 당신의 생애를 통해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두란도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행전 19:8-10을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두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처음 회당에서 3개월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여 모두 약 3년의 사역(제3차 선교 여행 기간, AD 53-57)을 펼쳤던 곳이 바로 에베소라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였고 사역의 결과는 행전19장의 증언처럼 온 아시아에 복음적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에베소 사역이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잠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체포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최종적인 재판을 받기 위해 가아사랴 항구에서 압송되어 배편으로 로마로 오게 됩니다. AD60년대 초기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지만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안위나 편안함이 아닌 에베소 교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가 굳게 서야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의 핵심은 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교회는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어린 교회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에베소서의 서론인 1-2절에서 벌써부터 교회의 본질을 규명하는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1.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두 가지 별명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성도”이며,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인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도와 신실한 자라는 표현은 흔히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특성을 묘사하는 단어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들입니다. 

‘성도’는 본래 영어로는 saints ‘성자’로도 번역되는 단어인데 본래 원어인 희랍어의 뜻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신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구별한 사람들, 영어로 다시 풀어 말하면 ‘set apart’란 의미입니다. 제가 가진 몇 벌의 옷 중에서 오늘 저는 이 입고 있는 옷을 구별하여(선택하여) 오늘 입고 나왔습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 모두는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것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됨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 주신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신실한 자들’이란 단어는 인간 편에서 그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말이나 한문에서 ‘신실’을 말할 때 이 단어의 핵심은 ‘믿을 신(信)’입니다.(신실한 자의 반대는 거꾸로 실신[失信]한 자, 믿음을 상실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본래 희랍어에서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로 표기됩니다. 곧 <-부터, from>이란 의미의 단어와 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성도’와 ‘신실한 자’의 의미를 추가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믿는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더 단순하고 쉽게 말하면 라고 할 것입니다.

2.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사에 사용된 두 개의 단어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가 은혜이고 또 하나가 평강입니다. 본래 은혜(karis)라는 단어는 희랍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이었고 그래서 희랍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반면 평강(shalom)은 히브리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로서 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희랍인들과 히브리인들이 갈망하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사랑이나 호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과 흥정으로 경영되기 때문에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사와 흥정에 밝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쉽게 수용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구약은 수많은 계약을 보여 줍니다. 구약은 계약의 책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계약은 조건적입니다. 아브람과의 계약(창12:3-너를 축복하면 복을 내리고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고)도 그렇고, 시내 산의 계약(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고)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의 은혜는 무조건적입니다. 이것이 엡2:8에서 복음으로 선포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에 조건이 따르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조건 없이 이 사랑을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은혜위에 세워진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런 은혜의 감격을 상실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진정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도 알지 못합니다. 참된 은혜와 평화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흥정해 왔지만 평화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인류 평화를 향한 노력은 박수 받을 만한 것이고 고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위적인 추구로 평화가 이 땅에 장착하리라는 허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왜 인류 평화의 노력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영국 왕실의 주치의였고 우리 시대의 탁월한 강해 설교가인 말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평화를 상실한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성경 외에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애당초 평화를 상실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했고 인간과 인간사이를 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는 순간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그를 두려워 하기 시작해했으며 그의 임재를 피해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하고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엡2:13-14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는지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6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비로소 화해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 중보자 예수를 받아드린 사람들은 이 복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 복음을 외면하고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회 중에는 교인들의 친교를 증진하고 주변 불신 이웃들도 교회에 오게 하고 교회 수입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빙고를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시도가 성공하겠습니까? 될 리가 없지요. 그러나 아직도 순수한 십자가의 원색적인 복음이 선포되고 뜨거운 말씀의 교제가 있는 교회들에는 온갖 사람들이 와서 교회의 영적 사귐 안에서 녹아지고 하나 되는 부흥의 열매가 맺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언론인들 혹은 뜻있는 목회 동역자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의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도대체 건강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참된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참된 평화가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 그런 교회로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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