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숯불 곁에서 (요 18:15-18, 21:9-14)

  • 잡초 잡초
  • 640
  • 0

첨부 1


숯불 곁에서 (요 18:15-18, 21:9-14)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5)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6)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7)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8)
<요한복음 18장 15~18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0)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2)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3)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4)
<요한복음 21장 9~14절>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온도가 높고 습기가 많아 불편한 계절이지만 건강관리 잘하셔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여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조금 전에 기도하면서
“허물과 죄가 많으나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감사함으로 모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허물과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회개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다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무엇을 회개하시겠습니까?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벨라 드 파울로(Bella de Paulo)라는 교수가
77명의 학생과, 70명의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주일 동안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조사 했습니다.
그 결과, 1명의 학생과 6명의 주민, 이렇게 7명만
일주일 동안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나머지 140명이 총 1,534개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140명이 한 거짓말들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악한 거짓말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을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한 긍정적인 거짓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연구소(미국 Josephson 윤리연구소)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2만 명의 청소년 중 92% 학생들이 부모님께 매일 거짓말을 하고
73% 정도는 스스로를 ‘심각한 거짓말쟁이’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90%의 학생이 현재 자신의 도덕성과 품성에 만족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장환,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리라』(서울; 나침반, 2002). p.54 참조.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거짓말이
‘사회적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수단’정도로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정직한 사람은 고지식한 사람이 되어 눈총을 받고,
다른 사람의 기분 맞추려고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격 좋고, 세상 살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주께서 …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 4)
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임을 인정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앞에 당당한 베드로

오늘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만나 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호언장담하며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말한 대로 살지 못하는 약점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본래 ‘시몬’으로 불렸던 베드로는 벳새다 출신으로 (요 1:44)
갈릴리 호수 북쪽 가버나움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던 어부였습니다. (막 1:21,29)
그는 형제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고 (요 1:41~42)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 4:18~20)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묻고 / 베드로가 말하고 /
베드로가 행동한 것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마 14:28~29, 15:15, 막 10:28, 11:21, 14:29~31, 눅 5:8, 8:45, 
요 6:68~69, 18:10, 21:7)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습니다.(마 26:31, 막 14:27)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말했습니다.
- 누가복음에는‘감옥이나 죽을 곳이라도 주와 함께 가겠다’고 … 
- 요한복음에는‘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큰소리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외면한 베드로

그랬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유대 대제사장(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에게 끌려갔을 때(요 18:13~14) …
베드로는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다른 제자 한 명과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겟세마네에서 다른 제자들은 어디론가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동행했던 다른 제자가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들어간 반면에 
16절에 보면 베드로는 “문 밖에 서서”‘멀리서서’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요 18:16)

그런데 베드로를 알아본 문 지키는 여종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죄인으로 끌려 들어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같은 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부인한 베드로는 
18절에 보니까 ‘종’과 ‘아랫사람’들과 섞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요18:18)
(여기에 나오는‘아랫사람’은 
유대인의‘아랫사람’들을 말한다 - 요 18:12)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오는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부활절 때,
즉 3월 말 내지 4월 초에 해당하는 봄철이면)
예루살렘의 밤 기온은 쌀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3~4월 밤에 사람들이 모이면 불을 피운다고 합니다.

석탄(coal)이 그곳에 전해진 19세기 이전까지는
사람들은 주로 화로에 숯을 담아 두고 불을 피웠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과 어울려 쬐고 있던 불도
헬라어 성경에 ‘안트라키아’라고 하는
‘쌓여있는 숯덩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가 아니라 하고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 …
그에게서 더 이상 용맹스럽고 씩씩한 믿음의 사람,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 
칼을 들고 덤비던 용기를(요 18:10)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죽이기 원하는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어
숯불 곁에서 불을 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을 때 예수님의 제자 아니라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베드로를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이 밝혀지면 
손해 볼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예수 믿는다고 말합니까? 
- 예수 믿는 사람임이 드러나면 왠지 불편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밝히십니까?
정말 베드로를 비난할 만큼 살고 계십니까?

<작자를 알 수 없는 글을 소개합니다.>
- 우리는,‘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고 
찬송하는데(364장) 정말 즐거우십니까?
기도는 아주 잠깐 … 겨우 몇 분하면서 … 아니, 그것도 안하면서 찬송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389장)’라고 찬송하면서도 
뽑아서 불러내야만 겨우 하나님 일에 봉사합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23장)’하겠다고 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는 입 가지고도 주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183장)’찬송하지만 비가 오면 교회 안옵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 자리에’(220장) 찬송하지만
아주 사소한 일로 상처 받고 미워하고 
귀한 믿음의 형제와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찬양하면서 믿음을 고백하고 순종을 다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에 …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며
불을 쬐던 초라한 모습과 우리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예수님 제자’아니라고 했던 베드로를 비난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매 순간/어디서든지/어떤 경우에도 …
‘예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까?

용서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베드로는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삶의 목표를 잃고 희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한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수님을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또 따라 다니는 것보다 예전의 살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호수로 다시 갔습니다.
그리고 고기잡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 바로 앞부분에 보면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 21:3)
희망도, 능력도 … 다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날 아침에(아니, 새벽에 - 요21:4)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육지에 올라 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9)
<여기 ‘떡’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떡’이 아닙니다.
그들이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 ‘빵’(bread)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선과 떡을 건네시려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요 21:13)

얼마 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요18:17, 25, 27) …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 숯불 곁에서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숯불 곁에서 예수님 제자가 아니라고 했던 
베드로에게 … 숯불 곁에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 나를 … 사랑하느냐” (요 21:15,16,17)

두 번쯤 물으셨을 때 예수님 잡히시던 밤에 숯불 곁에서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났었는지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멈칫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12:17)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외면했던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마음을 잡고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은 
단 한 가지 “나를 사랑하느냐?”뿐이었습니다.

사실‘사랑’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면 완성이지요.
‘사랑’이면 “허다한 죄를”덮는 것입니다.(벧전 4:8)
베드로를 사랑하여 찾아가신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덮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을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공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에 보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

☞ 화면 보고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죄와 실망, 실패와 두려움에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세 번이나 계속된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 내 양을 먹이라” (요 21:19)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예수님,
절망과 실망에 빠져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예수님은
베드로의 속에 있는 허물과 연약함까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은
- 아침에 일어나 교회에 나올 때까지
불평하며 왔는지 아니면 기쁨으로 왔는지, 감사로 왔는지 다 아십니다.
-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는 마음이 습관인지 아니면 진실한 고백인지,
-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으로 고백하는 입술이 확실한 결단인지 알고 계십니다.

- 말씀 듣고 가정으로 돌아가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얼마나 사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는지,
- 학교에서, 일터에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 맡기고 기뻐하라는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숯불 곁에서 배신한 베드로를
숯불 곁에서 다시 만나주셨고 다시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멀리하고 간 그곳에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찾아주십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감추고 싶은 잘못들이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도 있습니다.
- 회개한다고 했지만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찜찜한 죄가 있습니다.
그럼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찾으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 나를 …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
똑같은 숯불 곁에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냐고 …”
예수님은 우리가 외면한 그 상황을, 그 환경을 다 아시면서도 …
똑같은 상황에서, 환경에서, 숯불 앞에서,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