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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많은 죄, 많은 사랑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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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죄, 많은 사랑 (눅 7:36-50)


1.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遭難者>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놀랜드’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양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는 세계적인 택배 회사 페덱스 직원입니다.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 ‘캘리’와 데이트를 채 끝내지도 못한 채, 급히 회사의 호출을 받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말을 기약하며 헤어지게 됩니다. ‘놀랜드’는 ‘캘리’가 선물로 준 회중시계를 받아들고 페덱스 전용 비행기로 출장을 떠납니다. 그런데 ‘놀랜드는’ 한밤 중 태평양 상공에서 전용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놀랜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표류됩니다. ‘놀랜드’는 살았다는 사실에 감격하지만 이내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살아가야 할 일에 막막해 합니다. 그러나 그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체험을 통해 이전의 모든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과일을 따먹고 바위틈에 은신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버티며 4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제 섬 생활에 길들여져 무척 강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무인도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캘리’가 선물로 준 회중시계에 끼워있는 ‘캘리’의 사진을 날마다 바라보며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내려 온 알루미늄 판자 하나를 이용해 섬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안해내고, 오랜 기간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그는 뗏목을 만들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마침 지나가는 상선에게 뗏목이 발견되어 구출됩니다.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고향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약혼까지 했던 애인은 이미 어느 치과의사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저 사람이 과거 내 애인이었나 할 정도로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라 법에 따라 실종된 자기 자신은 사망처리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애인 ‘캘리’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다른 남자와 정당하게 결혼을 하고 어린 얘들까지 낳았던 것입니다. 

‘놀랜드’는 황당하기도 하고 너무나 난감해 합니다. 이 현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하고 정리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사랑하는 사람, 모처럼 안정을 얻은 그 사람,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 가정을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놀랜드’였지만 그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고, 그가 죽었다 생각해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그녀의 안타까운 선택이었음을 이해한 ‘놀랜드’는 결국 할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를 앞에 놓고 갈 곳을 잃어버리고 해매입니다.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광야를 바라보며 방황하는 그런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납니다.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굶주림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랑의 ‘castaway’, ‘조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누리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사랑’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한 바리새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백성들을 등쳐먹고 사는 죄인으로 취급하고 이러한 세리나 창기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역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예수께서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이를 목격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막2:16-17)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따지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강한 자’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신앙적으로 치유받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받을 필요가 없다며 자칭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반면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 몸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치유받기 위해 자신의 전 인격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죄인들’을 불러 용서하시며 치유하시고자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들 ‘죄인들’을 불러 절망에서 소망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셔서 구원하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죄인’(罪人)을 사랑하시고 ‘의인’(義人)으로 구원하십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죄인’(罪認)을 기쁘게 여기시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의인’(義認)의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한 이유는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한 것은 다만 고소할 거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마을에 사는 죄 많은 한 여자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거기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만 천하가 다 아는 이 타락한 여인의 행위를 용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호기(好機)를 잡았다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아시고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돈놀이하는 어떤 사람에게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500데나리온, 하나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둘 다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돈놀이하는 사람은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이 ‘제 생각에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바리새인 시몬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눅7:44-47)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3. 이 여인은 동네에서 죄인으로 살아왔지만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 그녀의 삶에 숨통을 트이게 한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은 자신을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께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 상류층 여인들이나 사용할 정도로 매우 귀하고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한 순간의 잘못으로 인해 죄인으로 끝나버릴 자신의 삶에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주실 분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용이 들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 향유를 들고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문에 듣던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아니하시고 부드럽게 맞아 주시는 그 자애로우신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용서와 사랑을 느끼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으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기 자신이 이제는 살만한 가치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모든 행동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습니다. 

한 여인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 짙은 어두움이 걷히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기쁨과 거룩한 빛으로 채워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죄악의 더러운 악취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하는 거룩한 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생명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애초부처 시꺼먼 마음이었지만 죄인으로 다가오는 여인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를 보고 더욱 더 어두워졌습니다. 여느 바리새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천박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앞서 이미 ‘빚진 자의 비유’ 말씀을 통해 엄청난 빚을 탕감(蕩減) 받은 자의 기쁨과 사랑을 깨우쳤지만 바리새인 시몬의 마음은 기쁨과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조건 없는 ‘탕감’과 조건 없는 ‘사랑’, 그 중에 ‘많이 탕감 받은 자’의 ‘더 많은 사랑’을 깨우쳤지만, ‘죄 많은 여인’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을 뿐 그 여인의 ‘많은 사랑’은 용납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빚진 자의 비유’에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나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나 모두 ‘갚을 돈이 없는’(nothing to pay), ‘갚을 능력이 없는’(unable to repay) 사람들 입니다. 탕감 받지 못하면 모두 다 노예로 팔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빚 주는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두 사람 모두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모든 빚을 탕감해주신 분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빚진 자들은 인생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빚’은 인간의 ‘죄’를 말하고, ‘탕감’은 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뜻합니다. 

‘탕감’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비유에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죄 많은 여인을,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리새인 시몬을 비유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전혀 빚이 없는 사람들로, 즉 전혀 죄가 없는 사람들로 자처하기 때문에 그 비유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그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냥 ‘네 죄’라고 하셨습니다. 적은 죄이든, 많은 죄이든 죄는 사함받지 아니하면 죄의 삯, 죄 값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그 여인이 사함 받은 죄는 사람들에게 드러난 죄만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 그리고 근원적인 죄까지도 완벽하게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 사함을 받은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무 말 없이 쏟아내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아내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세월을 씻어내는 것이었고, 그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사함받아 새로운 삶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된 기쁨과 감격에 복받치는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모든 행동을 말없이 받아드리시며 그것을 믿음과 사랑으로 여기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비유 중에 ‘빚진 자들’이 탕감 받고, 즉 ‘죄 사함을 받은 자들 중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플레이온 아가페세이, πλε?ον??γαπ?σει) 고 물으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유명한 단어 두 개를 든다면, ‘아가파오’(agapa?, ?γαπ?ω)와 ‘필레오’(phile?, φιλ?ω)입니다. 이 두 말을 우리 말 성경에서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 단어로만은 정확한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흔히 ‘아가파오’(agapa?, ?γαπ?ω)로 표현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필레오’(phile?, φιλ?ω)는 ‘사람의 사랑’, 그 중 ‘친구간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는 사랑의 정도(程度)나 농도(濃度)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종류(種類)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가파오’는 우리가 사랑의 대상(對象)에 대하여 그 진가(眞價)를 강렬히 깨닫는데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시며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의 진면목(眞面目),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시는 데서 나타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조건없이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파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필레오’는 친밀하고 오랫동안 사귀는 결과로 오는 감정적 애착(愛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다 보면 생기는 마음의 감정을 ‘필레오’라고 말합니다. 소위 친구간의 사랑, 우정을 말합니다. 

이 까닭에 성경에서는 ‘필레오’ 사랑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오랫동안 사귀어 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물음에 바리새인 시몬은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시므로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와 죄인됨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만큼 그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궁전 탑 꼭대기에 아름다운 은종 하나를 설치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 때 종을 울림으로써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특별히 그는 자신의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찼을 때 그 종을 치기로 하고, 그것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종을 친다는 규칙을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아름다운 종소리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왕도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하직할 시간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왕을 둘러싸고 있던 신하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왕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백성들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을 치고 행복한 미소를 띤 채 그는 숨을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왕이 진작 백성들의 사랑을 깨달았더라면 시종일관 행복한 삶을 누렸을 것이며, 백성들도 날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은 그의 마음이 어둡고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날 아무리 타락했던 생활을 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 여인’, 향유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그 여인은 밝고 행복한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 가셨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가다 그 집 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몰래 끼어 있었습니다. 

한 여종이 수상한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것 같아 주목하여 보다가 ‘이 사람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예수와 한 도당이지?’ 하고 추궁하자 ‘결코 그렇지 않다.’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불안한 가운데 한 시간쯤 지났는데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갈릴리 예수와 한 패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에 베드로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하느냐?’며 예수 그리스도를 극구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자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눅22:54-62) 

이렇게 자신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반하고 낙향해서 고기잡는 베드로를 찾아가신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 ?γαπ?? με)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필로 세, φιλ? σε)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파스, ?γαπ??) 베드로 역시 동일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필로 세, φιλ? σε)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어를 바꾸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이스, φιλε??)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씩이 사랑을 물으시자 몹시 근심하며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필로, φιλ?)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은 세 번씩이나 자신을 부인했던 것을 집요하게 들추어내고자 하심이 아니라 그로 인해 베드로가 근심했던 것처럼 그의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과 상함을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거를 잊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날 베드로의 상처를 드러내 그 상처를 치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붓고자 한 것입니다. 그 상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의 보혈을 부어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여 새롭게 하고자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사랑’을 물으신 것은 ‘너는 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처음과 두 번째까지는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파스’로 물으셨습니다.(아가파스, ?γαπ??) 다시 말해 이처럼 변함없는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처음부터 끝까지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대답합니다.(필로, φιλ?) 혹자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했던 자신의 사랑에 더 이상 자신감을 가지고 변함없이 앞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세 번째 물으실 때는 ‘아가파오’ 사랑으로 물으시지 않으시고 ‘필레오’ 사랑으로 물으셨다고 해석합니다. 베드로의 무거운 마음을 이해하시고 그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필레오’ 사랑으로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캐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잘, 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항상 깨닫고 새롭게 부여된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으로 복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더욱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많은 죄’가 하나님의 ‘많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은혜가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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