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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어떻게 지키는가? (마 14: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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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어떻게 지키는가? (마 14:23-33)

 
기독교 교계에서 소위 믿음학파의 기여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믿음학파의 원조는 오럴 로버츠 목사 · 케네스 헤이건 목사 · 케네스 코플란드 목사 그리고 국내의 조용기 목사 같은 분입니다. 한 배를 탄 분들입니다. 이들이 번영신학을 가르친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어떻게 생기며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밝혔다는 면에서 기독교 교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주제는 기독교의 역사만큼 긴 것인데 새삼스럽게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을 밝혔다는 말이냐. 

그러나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믿음이 다르다는 점을 규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 중에 믿음의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는 우리를 구원하는 보편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적을 낳는 특별한 믿음, 은사로써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적이 있지요.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일반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일반기독교인들이 이 차이점을 픽업하지 못했느냐. 이십세기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기적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부각되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학파가 비판을 받은 이유는 이와 같은 믿음의 목적을 몇 가지로 국한시켰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건강과 축복, 병 낫는 것과 물질축복 받는 데에 이러한 믿음을 국한시켜서 health & wealth 복음이다 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르친 믿음의 원리는 성경적이고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이와 같은 믿음이 생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는 것이 우리가 늘 교회를 오고 늘 말씀을 듣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데 왜 이런 믿음을 낳는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느냐. 그것은 똑같은 말씀이라도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첫째는 로고스라고 일반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레마라고 특별히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레마입니다. 그럼 레마는 무엇이냐.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 말씀을 들을 때는 로고스로 듣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그 중의 한 구절이 내 마음에 꽂힐 때가 있습니다. 내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마치 그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내게 꽂힐 때 믿음이 발생합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레마와 같은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벤슨 이다호사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젊었을 때 외국선교사님이 성경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벤슨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구요? 선교사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니까 그런 일이 없대요. 그래서 벤슨이 대답하기를 ‘저는 죽은 자를 살려보겠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죽은 자를 찾았어요. 그날 저녁쯤 돼서 정말로 죽은 자를 찾았어요. 어느 집에 어린 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벤슨이 그 집에 들어가서 자기를 소개하고 ‘내가 당신의 딸을 위해서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받고 방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하고 성경을 읽어보니까 예수님이 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있어요. ‘아, 내가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구나!’하고 그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니까 정말로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 벤슨 이다호사가 이후에 부흥사 사역을 하면서도 죽은 자가 일어나는 일이 몇 번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청년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선교사님 자신은 죽은 자를 일으켜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본인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성경말씀을 들은 벤슨에게는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을 보면 생명은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학구적이고 신뢰할만한 신학자에게서도 똑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책은 그냥 책꽂이에 둘 때는 책에 불과하지만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말은 우리가 평범하게 성경을 접해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성경의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레마를 좀 더 자주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느냐. 소극적으로 기다리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가지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때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아구까지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로고스를 가득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평소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해서 그 말씀, 로고스를 우리 마음속에 채워두면 필요할 때 주님이 그것을 성령으로 바꾸신다는 얘기에요. 주님이 그것을 레마로 바꾸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말씀이 다 이해되지 않고 다 재미있게 들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항아리를 로고스의 물로 채워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내게 레마가 되게 하시고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느 교회에 소속된 것이 아니고 또 새벽기도회를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한 시간은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제 기숙사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하루를 시작했는데 저는 소리를 내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라고하면 묵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저는 소리 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를 할 사람인데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기도할 때에도 제 믿음을 입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말하고 신앙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이후에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소리를 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중에 찬송이 떠오르면 그 찬송을 부르고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을 통역했습니다. 

그것이 이후에 저로 하여금 설교하는데 도움이 되고 예언을 하는데 도움이 되고 찬양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기도 인도하는 중에 찬양하는 것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서 찬송가가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우러나오는 찬양, 우러나오는 말씀, 여기에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찬양하는 것이 영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제가 아침마다 소리 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중에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마치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아서 이후에 성령이 그것을 가지고 예언을 하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고 찬양을 인도할 수 있도록 쓰실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이렇게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 말씀하시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갈 수 있는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어떻게 오느냐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믿음을 어떻게 간수하느냐, 그 믿음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후에는 그 믿음을 시험할만한 일이 생기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어떻게 갖느냐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믿음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시험한 것은 그가 믿음을 갖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바람. 오늘 본문 24절에 ‘이미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이전에도 바람은 불고 있었어요. 그러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다음에 이미 있었던 그 바람이 그에게 시험이 된 것입니다. 그가 물 위를 걸으면서 처음 바람이 분 게 아니에요. 그러나 믿음을 가진 다음에 이미 있었던 그 시련이 그에게 시험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지 만일 눈을 돌려서 내 환경의 어려움을 바라보게 되면 나를 물 위를 걷게 했던 믿음을 상실하고 물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지요. 의심은 어디서 오느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심은 지성에서 오는 게 아니고 감각에서 옵니다. 감각.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마음의 느낌, 마음의 두려움, 초조함, 여기에서 의심이 옵니다. 베드로도 ‘바람을 보매 두려워하여 물에 빠지느니라’ 예수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눈을 돌려 자기의 환경을 보았더니 두려움이 생기면서 믿음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마귀는 믿는 사람을 두렵게 해서 그 믿음을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루즈벨트의 말처럼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우리의 두려움뿐이라고 했는데 두려움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축시키고 영혼을 위축시키고 믿음을 위축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뒤로 돌아서게 하고 또 믿음의 위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감각에서 옵니다. 우리의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느끼는 거기에서 두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위를 걷다가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없다면 괜찮을 텐데 이미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있어요. 벌써 몇 번 발을 디뎠어요. 그러다가 빠지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예 믿음이 없었던 사람의 의심보다는 믿어본 적이 있는 사람의 의심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믿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실족하는 것이 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손실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있고 하나님에게 헌신해 본 적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데 도중에 어떤 일로 인하여 믿음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지키고 한결같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경험했다고 더 이상 실족하는 일이 없는 게 아니에요. 내가 능력을 경험했다고 더 이상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다가도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다가도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더 하나님에게 실망이 되고 이웃 사람들에게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우리를 건질 수 있느냐. 그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나를 구하소서’ SOS-Save our souls- 이것은 첫 번째 구원이 아니고 두 번째 구원이에요. 첫 번째 우리가 구원받는 것, 그것도 예수님이 구하시지만 믿음 생활하다가 물에 빠질 때 우리를 구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할렐루야.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드시며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입이 열 개 라고 할 말이 없지요.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왜 의심하느냐. 너는 왜 두려워하느냐. 너는 왜 뒤를 돌아보느냐. 너는 왜 그렇게 하느냐. 주님이 궁금하신 것입니다.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믿을만한 증거를 내가 너에게 주었건만 너는 왜 그것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보고 잘 걷다가 빠지느냐. 왜 믿다가 의심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의 의심도 문제이지만 이미 믿다가 도중에 의심하는 것도 정말로 큰 문제요, 그런 사람도 예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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