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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어머니의 결단 (삼상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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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의 결단 (삼상 1:19-28)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반적 명제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대학교 신경과학과의 그레이그 킨슬리 교수팀이 <엄마가 된다는 것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여성은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두뇌의 힘이 강화된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어미가 되기 전후의 쥐의 뇌를 촬영해 분석했는데, 새끼를 출산한 어미 쥐는 새끼를 낳기 전과 비교할 때 뇌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킨슬리 교수는 <임신기간에는 엄마가 된다는 부담스러움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신력이 약해질 수 있지만, 아기를 출산하고 모유를 먹일 때가 되면 정신적인 힘을 담당하는 뇌 부분이 커지고, 기억력이 좋아지고, 주의가 깊어지며, 민첩하게 행동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약해도 어머니는 강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들의 집념은 대단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할 일을 어머니들은 얼마든지 해냅니다. 여러분, 엄마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 교육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은 강한데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강하다고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대조적인 두 여인을 통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는 단지 자녀 교육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려는 두 여인은 야곱의 아내인 <라헬>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입니다. 두 여인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간절히 자식을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두 여인 모두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 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고, 그 차이점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두 여인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라헬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향하여 살았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지 못할 때, 그녀는 남편 야곱에게 대들었습니다.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뭐라고 했습니까? 야곱은 비록 라헬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막무가내로 대드는 그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 다음을 보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남편에게 떼를 썼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라헬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창세기 30장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생각해 주셨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할 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11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떼를 쓰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1장 19-20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성이었고, 사무엘은 기도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응답 받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둘째로, 두 여인은 아기를 낳은 후에 보인 반응도 달랐습니다. 라헬과 한나 모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였습니다. 라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신지라>고 했고, 한나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자카르>라는 동사로서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두 여인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은 후 <요셉>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요셉이란 뜻은 <더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0장 24절을 보면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녀가 아들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감사하기는커녕 아직 부족함을 느끼면서 더 많은 자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한 쪽에 자식을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손으로 또 한 자녀를 안길 원했습니다. 감사보다는 더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 이게 라헬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후에 베냐민을 낳기는 했으나, 난산하여 아기를 낳자마자 라헬 자신이 죽었습니다. 더 달라고 했으나, 자식으로 인한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아멘. 한나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찬양하는 한나에게는 불만이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셋째로, 이런 두 여인의 마음의 차이는 아이를 키우는 데서도 차이가 났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라헬은 아이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더 달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현재 가진 것을 절대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더 달라는 판에 현재 가진 것을 내놓겠습니까? 라헬에게서 <하나님, 요셉은 내 자식입니다. 절대 내놓지 못합니다. 끝까지 내가 키울 겁니다>란 강한 욕망이 풍깁니다. 라헬은 요셉을 자기 곁에 붙들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인 줄 알기에 마음을 비웠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키운 후 에 엘리 제사장이 있는 실로의 성막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26-28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여러분,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어떤 아들입니까? 옆에 끼고 살아도 아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뚝 떼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쉽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라헬처럼 움켜쥐고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자라게 하였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그렇게 키운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은 이스라엘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3장 끄트머리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구원자요, 영웅이었습니다. 아들을 뚝 떼어 하나님께 맡기는 한나의 결단을 통하여 사무엘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어떻게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한나처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하십시오. 한나가 기도한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이 생각해 주셔서 얻은 자녀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라헬처럼 욕망으로 바라보지 말고,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셋째,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겨 키우십시오. 자식을 내 손에 붙잡고, 내 방식과 내 뜻대로 키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게서 떼어내서 하나님 가까이로 붙여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손을 놓으면 아이가 넘어질 것처럼 불안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놓는 순간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내 자식>이라는 마음을 버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로 성장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때, 우리 자녀들은 잘 자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비록 라헬이 요셉을 내놓지 않고 품에 안고 살았지만, 그래도 요셉도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잘 키운 것 아닙니까?>

그럴듯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라헬이 그를 자기 품에서 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요셉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인물이 된 것은 라헬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키우고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키우시는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라헬이 죽은 후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라헬을 대신해서 요셉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채색옷을 입히고 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아버지 야곱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아예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완전히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후에 그가 입었던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께 보여주면서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고 말했지요. 그 순간부터 야곱은 요셉을 마음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곱, 네 아들 요셉을 포기해라. 죽은 줄로 알고 있어라. 요셉은 네가 채색옷을 입히고 끼고 돈다고 해서 훌륭하게 되는 게 아니다. 요셉은 내가 책임지마. 넌 빠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이 라헬을 대신해서 요셉을 끼고 살면 제대로 교육이 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의 아들 교육은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요셉만 채색옷을 입히고 편애했습니다. 요셉이 형님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다녀도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형제간에 그러면 못쓴다>고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잘못되어도 그대로 방치하는 무책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야곱으로부터 멀리 뚝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돌볼 수 없도록, 아예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훈련시켰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 교육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애굽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사는 동안 낮아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요셉은 고난을 견디는 힘도 얻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슴에는 들판의 맹수처럼 야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만약 아버지 품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그는 애완용 강아지처럼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에 잡혀 먹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요셉은 그 고통을 통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았기에 어려운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후에 흉년을 만나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교육이었습니다. 요셉은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 집에서 호화호식할 때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고귀한 것을 노예의 옷을 입고 고생 중에 배웠습니다. 사무엘이 실로의 성막에서 성장했다면, 요셉은 애굽에서 자랐습니다. 실로의 성막과 애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특별한 교실이었습니다. 사무엘과 요셉 두 사람은 부모와 떨어져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내 곁에 불잡아 두고 내 방식대로 키우고자 하는 마음을 비우고, 뚝 떼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가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키워주셔야 우리 자녀가 잘 되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렇게 할 때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을 바로 세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것뿐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배우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기 출생 후 한 두 달이 되면 아빠와 엄마가 아기를 새가족실로 데리고 옵니다. 제가 안고 아기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 때 참 기분이 좋습니다. 아기를 제게 넘겨주는 부모님은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비록 부족한 제가 아기를 안고 기도하지만. 저는 아기를 하나님의 품에 안겨드리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올 여름에 자녀들을 뚝 떼어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 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 키우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 구체적 표현으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에 자녀를 보내십시오. 뚝 떼어 실로의 성막에 맡기는 한나의 마음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학원과 학교 보충수업을 몇 일 못 가더라도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고하는 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에 가서 참관도 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자녀 교육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 그리고 우리의 전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 이것은 우리 인생의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 풍토를 거부하고, 우리는 뚝 떼어 하나님께 맡기면서 사는 새로운 방법에 도전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살고, 우리 자녀도 잘 키우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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