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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얼마나 사랑하는가? (시 8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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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얼마나 사랑하는가? (시 84:1-12) 


1. 교회는 성도에게 무엇인가?

성도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대한 정의는 정말 다양합니다. 구약시대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막이나 성전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 하시면서 거기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부터는 ‘그 성전에 거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런 장소와 건물로서의 교회 개념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교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행7:38, 스데반). 

신약시대에 와서 교회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정의로 말미암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공동체’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을 기초로 해서 교회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 ‘에클레시아’에서 온 뜻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불러내어,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반쪽짜리일 뿐입니다. 성도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여기서 예배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불러내진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파송되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주께로 이끄는 사명을 받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인 개념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는 늘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여러분,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회 밖에서 교회를 향한 비난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눈에 교회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며, 목회자나 성도들이 도덕적으로 세상법적으로 하자가 많으며, 십일조 등 헌금을 강요하는 듯 하여 그것이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비난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교회가 성경적인 바른 교회론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어느 포털 사이트에 올린 사람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죠.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모여서 그 분을 알아가며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 그치만 교회도 사회성이 짙어요. 세상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그치만 세상과는 또 많이 다르죠. 적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니까요. 목사님들 교인들 행동에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믿음은 있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니까요. 그 사람들 개인의 수준 인 겁니다. 

십일조는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이에요. … 교회에 대한 개념을 구지 넣어드리자면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죠. 그 분을 알아가며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나아가 세상 속에서도 그 분을 알리고 그 분의 사랑을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분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죠.” 이 분의 글에는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답과 그리고 교회의 정의가 다 들어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인 것 같습니까? 우리교회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가 맞습니까? 우리교회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성도들이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주께로 이끄는 사명을 받은 공동체’라고 여겨지십니까? 

이런 교회론적인 질문과 함께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교회란 무엇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교회, □□교회, △△교회라고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상의 교회는 어떤 지역에서 특정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즉 현실적인 교회는 어느 지역에 있는 특정한 성도들이 특정한 모양을 교회 건물에 모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적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이 예배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기뻐해오셨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성도들이 모이는, 어떤 건물을 가진 교회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우리교회는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 그 자체를 너무나 사랑했던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을 살펴보면서, 오늘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교회인 우리교회에 대한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에게 교회는 …

1) 궁궐(1~4)

시편 84편은 자신을 ‘고라 자손의 한 사람’이라고 밝힌 사람이 지은 시입니다. 84편이 기록된 배경은 시편 42, 43편과 같은데요. 이 세 편의 시는 시인이 성전을 떠나 있을 때 성전을 갈망하면서 쓴 것입니다. 그 배경이 된 사건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제사장 족속인 레위의 증손이었던 ‘고라’의 후손인 고라 자손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레위 자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파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윗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직업은 樂士였습니다. 즉 그들은 다윗 시대에 성소에서 음악가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지요. 다윗 당시 세 명의 유명한 지휘자 중에 하나였던 ‘헤만’이 고라 사람이었으며(왕상 5:11), 전체 24개 분야의 성소 음악의 24 명의 지도자 중 고라 자손은 14명이나 되었습니다(대상 25장 참조). 

그들은 유다 왕국 말기인 여호사밧 왕 때까지 음악가로서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대하 20;19).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라 자손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 땅으로 도피했을 때 함께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막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던 그가 다윗과 함께 피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다가 또 적들에게 둘러싸인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지은 오늘 본문은 시편 120편부터 124편에 나오는 <순례의 시>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시인이 예루살렘 성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성막을 그리워하면서 이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떠나 있는 시인은 1, 2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은 ‘간절히 사랑하고 또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것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그는 자신이 성전을 사모함으로 인하여 ‘쇠약해졌다’고 말을 합니다. 이 “쇠약해졌다”는 말은 ‘소진되다, 고갈하다, 탈진하다’는 뜻으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쇠약해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멀리서 주의 장막을 사모하고 갈망하다가 병에 걸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시인의 마음과 그 형편이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도 교회에 대해서 이런 사모함과 그로인한 무기력증에 시달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시인이 성막을 어떻게 여겼는지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성막을 가리켜 “여호와의 궁정”, “주의 집”, “주의 궁정”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여러분, 이때는 아직 성전이 건축되기 전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사모하는 성막은 출애굽기 26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든 … 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굉장히 오래된 천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이 성막을 궁궐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궁궐은 어떠했을까요? 열왕기상 7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궁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다윗의 궁 역시 화려했습니다. 다윗 궁은 백향목으로 지어졌는데, 백향목은 레바논 산간지방에서 나는 나무로, 높이가 30미터이고, 수명이 천 년이나 되었는데, 나무의 질이나 모양도 좋아서, 궁이나 성전 건축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목재로 된 다윗 궁은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텐트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집을 짓되 흙을 주재료로 한 단층집에 방과 부엌과 짐승의 우리가 함께 있는 구조였는데 반해 궁궐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후에 솔로몬이 지은 궁궐은 한층 더 화려했습니다. 솔로몬의 왕궁은 13년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주재료는 레바논 백향목과 돌이었습니다. 기둥과 서까래 모두 레바논 백향목이었고, 거기에는 널따란 현관과 재판정까지 갖추어져 있었으며, 왕비와 후궁들을 위한 별도의 방이나 건물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또 왕국의 어떤 건물들은 아주 귀한 돌들로 만들어졌는데, 기초석에서부터 처마 끝까지, 또 바깥에서부터 큰 뜰까지 모두 이 돌들을 크기에 따라 자르고 다듬어서 만들었습니다. 지금 봐도 대단히 화려할 것인데,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했겠습니까? 

여러분, 시인은 지금 여호와의 장막을 이러한 궁궐로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초라한 장막이 시인에게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그러면서 감히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왕의 궁궐로 여겨진 것이지요. 적어도 시인에게 주님의 집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고 최고의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모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가족들이 함께 예배하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성도에게 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곳, 그리고 가장 사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그렇게 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런 성도에게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에게도 교회가 시인의 고백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이 주어지는 곳(5~8)

두 번째 단락인 5절부터 8절에서 시인은 <성전을 향해 순례하는 자들의 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성전에 갈 수 없게 된 지금, 그는 마음대로 성전을 향해 순례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시인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도 그런 표현이 있지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런데 시인은 성전에서만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5,6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찾아 시온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은 때로 물도 없고, 위험이 계속되는 사막과 같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특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눈물의 골짜기”라고 불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이런 길이 몇 군데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례자들이 이러한 “눈물 골짜기들”을 통행할 때에, 그곳을 샘이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순례자들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이른 비”를 내려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시온을 향해 가는 순례자를 위해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해주시고, 역경을 축복의 장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길을 가면 갈수록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시온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막에 도착하여 예배하면 그 복은 절정에 달했지요!

1979년 중국이 폐쇄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바꾼 다음 교회 예배를 허락했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허가 받은 교회가 상해에 있는 목은당(沐恩堂) 교회입니다. 이렇게 정부의 허가를 받고 문을 여는 교회를 ‘삼자교회’ 혹은 ‘공인교회’라 부르는데 삼십 년 만에 교회의 문이 열리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예배시작 몇 시간 전에 이미 자리가 다 찼고, 뒤에 온 성도들은 교회 계단에 앉거나 뜰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 소리에 천장이 떠나가는 것 같았고,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목이 메어서 설교가 중단되었고, 축도가 끝난 다음에도 성도들은 몇 시간 동안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주님의 전에서 예배하지 않는 것이 가장 불행한 삶이고 박복한 삶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복이 주어지는 곳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교회 오는 그 걸음부터 이미 주님의 복은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좀 더 구체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주어지는 주님의 복은 어떤 것일까요? 시 128편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편 4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영생도 있고, 이 땅에서의 형통도 있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복을 교회를 통하여 주신다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교회를 통하여 받은 복이 얼마나 크고 많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받은 복은 먼저 영적인 복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교회를 통하여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복들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확신과 은사와 능력 등 …. 또한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복은 세상적인 복이고, 인간적인 복이고, 물질의 복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복’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개념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빈손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하나님을 복을 주셔서 엄청난 재산에다가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 연합군을 이길 정도로 막강한 개인 군대를 거느릴 만큼 큰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창14장). 달랑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고 집을 떠났던 야곱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습니까? 다윗은요? 솔로몬은요? 그들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그 뿐 아니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사람의 복도 주십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겠습니까? 주님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고 질질 짜지만, 사실 이 분들 만큼 좋은 사람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죠? 또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가정의 복을 받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은 주님이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가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은혜와 복을 받게 하시고, 수고한 대로 먹게 하여 물질의 복을 주시며,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더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3)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곳(9~12)

세 번째로 오늘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시인은 성막을 향해 시온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성전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러워하는 시인은 9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방패”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위를 주시면서 그것이 대대로 계속 될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지금이야말로 그 약속을 지키실 때라는 것,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약속에 신실하셔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방패”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 붙들고 의지할 자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 붙들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그 약속이야말로 지금 가장 힘든 때를 보내고 있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자, 그들을 지켜줄 가장 안전한 방패였습니다. 

여러분, 시인이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서 빨리 압살롬 반역 사건이 해결되어서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 왕이 복권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시인은 자신이 병에 걸릴 정도로 그리워하는 성전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악인들이란 다윗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다윗이 아닌 압살롬을 지지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 혹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둘러 진치고 감시하고 위협하고 공격하는 형편에서 1000일을 지내는 것보다 주님의 궁전에서 지내는 하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화려한 집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문을 지키며 문지방에 누워 있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악인, 혹은 주님을 모르는 자, 혹은 성전의 가치와 예배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면서 그 복을 누리는 것이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절에 보면,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을 떠나있는 동안 주의 제단에 보금자리를 튼 참새와 제비가 부럽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찮은 미물인 참새와 제비도 주의 장막에 보금자리를 틀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데, 시인은 그 성전에 갈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가슴 아팠던 것이죠. 또한 시인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4). 시인은 다윗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피난을 와서야 전에 성전에 머물면서 주님을 섬기며 찬송하던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먼 곳에서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상사병이 걸릴 만큼 주의 장막을 사모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시인이 시편 84편의 세 번째 단락에서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성전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곳이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머나먼 곳으로 피난을 가서,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성전에서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살아봐야 주의 집에서 하루 혹은 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구나!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대로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교회를, 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께서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 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늘 공간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소년 소녀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 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 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 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과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 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 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고, 죽어 가는 교회는 타내는 자들로 차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 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행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 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 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화석화된다.” 
우리 교회야 말로 그 목사님이 말한 살아있는 교회라고 생각되시죠?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를 오늘 본문을 기록한 시인처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를 왕이 사는 궁궐로 여기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고 권위로 넘치는 곳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를 주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주어지는 통로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곳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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