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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 표적의 의미 (요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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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은 매우 신비로운 책입니다. 읽기에 쉬우면서도 그 내용은 아무리 연구해도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지혜를 내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책을 기록하는 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특히 전반 12장까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일곱 가지 표적(表迹)과 이에 연관된 진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일곱 표적 가운데 세 번째 표적(the Third Sign)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표적(sign)’은 단순히 놀라운 일로서의 사건 자체보다도 표적을 행하는 주체와 그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심층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세 번째 표적은 본래 제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과 지위를 버리시고 각종 질병과 고통이 난무하는 베데스다와 같은 세상 속으로 친히 찾아오신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베데스다와 같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불가피하게 죄와 질병으로 고통에 처한 인류에게 완전한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베데스다 치유사건의 영적 의미를 좀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우굴거리던 병자들, 그곳에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38년이나 누워 있던 절망적인 병자를 단숨에 완쾌시키신 예수님의 모습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예수께서 고통으로 가득찬 베데스다에 오심 (= 성육신의 숭고한 사랑)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뜻밖에 양문(羊門)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다섯 행각 안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병자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혹시 건강을 회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계속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중환자들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하체장애인들, 수족에 힘을 잃어버린 마비환자들이 누워 신음하고 있는 고통의 장소 베데스다에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찬 베데스다에 오신 것은 죄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베데스다 못을 찾아오신 예수님에게서 성육신의 숭고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베트=집, 헤세드=자비)는 ‘자비의 집’을 뜻합니다. 자비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방문하신 그곳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비나 긍휼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양(羊)의 문(門) 곁에 있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자비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2절, 3절에 보면 못 주변에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고, 그 안에 각색 병자들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이 움직일 때 그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에서 낫게 된다는 미신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의 숫자나 머문 기간, 또는 과연 치유를 받을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에 우리 주님께서 숭고한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몹쓸 질병의 짐에 눌린 사람들, 오랜 가난의 짐에 눌린 사람들, 극복하기 어려운 죄의 짐에 눌린 사람들이 모든 도시, 모든 마을에서 예외 없이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이 세계가 처한 현실입니다. 

문명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21세기 문명의 중심부에서 최고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이들이나 모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사람들이 안고 있는 두 가지 공통점은 ‘평안이 없다’는 것과 ‘희망을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먹고 마시고 평안히 쉬는 시간에도 지구촌 여러 곳에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우리 주위의 이같은 위기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성도 여러분! 베데스다 못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 역시 절망에 빠진 이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절감합니다. 그들의 문제가 우리 자신과 개인적으로 직접 상관이 없을지는 몰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에 혹 무관심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내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을 깊이 묵상합시다. 병자들이 우굴거리고 있는 베데스다를 찾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려봅시다. 그리고 오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2. 병자들은 민간 신앙이나마 붙들고자 함 (=길을 모르면 어리석게 행함)

3,4절=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본절에는 많은 병자들이 무엇 때문에 베데스다 못가의 행각에 모여 있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 미신처럼 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과 ‘그 후에 맨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믿음이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민간 신앙이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평소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심한 고통 앞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었는데 이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비록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민간 신앙이나마 붙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길을 모르면 누구라도 이처럼 어리석게 행하는 법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비진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3절에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라고 했는데, 병자들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기다렸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린 ‘물의 움직임’은 무엇이었을까요? 4절에 ‘움직이게 하는데’의 원어는 ‘뒤흔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타랏소)의 미완료 시제입니다. 이는 물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 과거에 계속 있어 왔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일의 주체가 천사인지의 여부보다는 이 전승을 수용한 사람들의 믿음과 절박함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린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그 장관(壯觀)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관광객들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증(重症) 환자들이었으므로 물이 움직인 후에 맨 먼저 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절박한 바램이었습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동사들(내려와, 걸렸든지, 됨이러라)이 모두 미완료형인데, 이는 이 못에 대한 민간 신앙이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고, 병자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길을 모르면 사람들은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당시 사회에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참조할 책이나 자료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없었고,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입니다. 

사람을 절망으로 밀어넣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오히려 사람에게 생동감을 주고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부여합니다. 사람을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문제의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1대 왕이었던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엔돌에 있는 접신녀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삼상 28:5=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삼상 28: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사울왕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하시는 이런 일을 했을까요? 문제의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물었지만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신접한 여인에게로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이와같이 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욕하기 전에 왜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이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 지혜로운 길 안내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낙담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소망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옳은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들에게 길이신 예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철학과 헛된 학문을 따라가는 자들에게 우리는 참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3.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심 (= 예수 복음으로만 살 수 있음을 의미)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제 오늘 말씀의 클라이맥스에 왔습니다. 베데스다 고통의 현장에 오신 예수님은 병자들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한 사람 앞에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38년이나 지속된 병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하기 어려운 중증 환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단번에 고쳐주셨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시시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성도 여러분!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스스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사람의 가족이나 그를 아는 어떤 사람도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당대 최고의 의원들 중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짐을 지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은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 복음으로만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이미 진단하셨습니다. 병이 오랜 줄 아셨고, 절망이 깊은 줄도 보셨습니다. 주님은 질문을 통하여 그에게 소망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이 그 병자에게 원하신 것은 그가 회복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더불어, 무엇보다 예수를 의지하는 강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은혜와 능력에 대한 갈망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우뚝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 명령은 단계적인 세 가지 명령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투병생활을 한 이 사람, 침상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는 이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역사는 많은 경우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이와같은 엄숙한 명령과 이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둘째는 네 자리를 들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네가 지금가지 의지하던 네 침상을 이제는 거두어서 메고 가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 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계속해서 돌아다녀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이 병자의 삶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우리는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명령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38년 동안 불치의 병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사람이 그 지긋지긋한 고통의 짐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 참된 자유를 얻은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예수님을 확실히 믿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워 고통하는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백부장이 그러했고(마 8:2),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오던 여인 또한 그러했습니다(막 5:25-34). 이와같이 예수님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의 모든 짐을 벗겨 주사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 성도가 된 것 역시 우리 인생에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입니다. 그런데 이 행운은 우연히 찾아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립시다. 우리를 불러 교회의 멤버로 세워주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케 하신 주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지금 누리고 있는 참 평안과 참 자유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베데스다의 병자들’에게 소리 높여 증거합시다.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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