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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로 돌아오라 (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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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돌아오라 (렘 4:1-4)


예레미야를 영어로 발음하면 “제레미야(Jeremiah)”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영어 단어가 생겼는데 바로 “jeremiad”입니다. “jeremiad”는‘슬픔’,‘한탄’,‘비탄’이라는 말인데,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 ‘슬픔의 선지자’라고 별명이 지어졌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된 영어 단어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BC 627년에서 587년까지 40년 동안 유대민족의 가장 어두운 역사에서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20세에서 60세까지 활동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울었는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하신 내용과 자기의 소원이 정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애국자입니다. 택한 백성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찬란한 번영과 행복을 소원하는 아주 믿음 좋은 청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라.” 하셨기 때문에 울었던 것입니다. 1장에서 예레미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는데 그 윗면이 북에서 기울어졌나이다.” 무슨 환상인가? 기름이 끓는 가마솥인데 북에서 남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름이 쏟아져 나올 거 아닙니까? 바로 북쪽 바벨로니아가 유대 나라를 침략할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본 것을 나가서 백성들에게 말하라.” 그러니 그것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라고 시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 백성들이 나를 버렸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만든 가증한 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으니 이 백성을 내가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예레미야는 큰일 났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나님이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목사도 성도들 가정에 심방을 가면 언제나 축복을 가지고 갑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축복 권한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 가정에 뭐든지 어려운 부분이 다 회복되고 잘 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그 가정에 가서 망한다고 설교하고 와라.”하신다면 제가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그래서 갈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느냐 하면 “너는 이 백성을 위해서 나한테 기도하지 말라. 나는 안 듣겠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비슷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것을 가리키면서 “이 성전은 46년 동안 건축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너질 것이다.” “아니, 무너지다니요?” “때가 되면 다 무너질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많이 일하신 전도 지역이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제일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랬을 때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망하여야 될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성경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조명하는가가 몇 가지로 나옵니다. 먼저, 예정론 신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아니한 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합니다. 내 친구 목사 하나는 골프를 얼마나 잘 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시간만 있으면 골프를 치러 나갑니다. 그런데 교인들과 사모님은 이것을 조금 싫어합니다. 

사모님은 나만 보면 “우리 남편 목사 골프 치는 것 좀 이 목사님이 덜 하게 주의 좀 주세요.” 그 교회 집사님들도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 오는데 “어휴! 오늘은 이렇게 비가 오니 골프 다 쳤다.” 그랬더니 그 목사는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세요? “이런 날이 골프 치기에 더 좋아!”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선지자 일이 하기 싫습니다. “선지자 일? 제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 사는 거 행복하고 좋게 살아야지. 백성들 앞에 나가서 얻어맞을 일만 말하라고 하니까 나는 안하고 싶다.” 그런데 안하고 싶어 하는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정 신학이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했고 열방에 선지자로 세웠노라. 

네가 선지자 사명을 반드시 해야 되는 이유는 네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내가 정한 일이다. 미리 정해놓았다. 바꿔서 말하면 만약 네가 선지자 역할을 안 할 것 같으면 너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는 하나다. 선지자를 해라. 반드시 그 길을 할 자다.” 숙명적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나는 말도 잘 할 줄 모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시킬 때는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두려워말고 가라.” 그래서 여기 하나님의 예정 신학이 나타난 겁니다. 그 신학에 기초해서 나 자신을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서 오늘 이렇게 주일날 아버지께 예배드리러 교회 나와 있는 이 현실의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바가 지금 나에게 나타난 겁니다. 이러한 믿음이 내 영혼 가운데 확립이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겁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는 일에 기쁨이 충만하여져서 바울과 같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이러한 예정 신학은 바울 신학에서 더 세밀하여 집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복 주시되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 내가 지금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신학의 예정신학은 예레미야보다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세상에 있다는 이 자체가 창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보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러한 우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대해서 뭐라고 정의하느냐?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시냐? 너희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다.” 자기 머리털 몇 개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컴퓨터가 계산하니까 6만개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머리털이 몇 개 될 것까지 계산하시고 세상에 내보내신 하나님의 예정신학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나의 큰 관심 속에 축복받은 너희가 지금은 나를 버렸다. 이 잘못 가고 있는 길을 내가 수정하기 위해서 심판의 막대기를 내가 드는 것이다. 너희 중에 가증한 것을 내어버리라. 그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래 운명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생긴 문화가 점쟁이입니다. “내가 점쳐보니까 당신은 장래가 어떻게 될 거야!” 하면 사람들이 속이 시원한 게 있고 또 희망도 갖고 어떨 때는 좌절하기도 하고 그래서 온 세상 어느 나라나 점을 치는 점쟁이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아! 용한 집이 있다. 그 집에 가자.” 내 앞 날에 대해서 알고 계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이유는 자기들 나름대로 신 개념을 따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기 운명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너무 실망했습니다. 마틴 루터를 탄생시킨 철저한 복음주의 나라, 전 세계 개신교회에 제일 앞장섰고 세계 신앙을 개혁시키고 새로운 구원의 빛을 전하는데 최고 공헌한 나라인 기독교 국가 독일이 월드컵 경기 우승을 문어에게 물어본다고 나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더군다나 그것을 공영방송들이 방송해서 이 문어가 발을 어디로 내미느냐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것도 전 세계가 다운 받아서 이 문어의 꿈틀거림을 보고 앞날을 예측하니, 여러분! 하나님 밖에 모르는 일을 문어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때 ‘아니, 저것을 내가 잡아먹으라고 주었더니 저런 것을 하고 있구나! 문어한테 운명을 걸고 있구나!’ 이래서 지금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겁니다. 사실 이 점치는 문화는 우리 사회에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지금은 조금씩 없어지지만 어렸을 때도 이쪽으로 가야하나, 저쪽으로 가야 하나는 점쳐보면 됩니다. 어떻게 점칩니까? 침을 뱉어서 손바닥으로 탁 칩니다. “어느 쪽으로 튀었어?” 이쪽으로 튀었으면 “아! 이쪽으로 가라는 거야!” 어떤 때는 고무신을 집어던져서 “엎어졌느냐, 젖혀졌느냐?” 그것을 보고 운명을 결정해서 갈 일을 갔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가위바위보’로 무엇을 많이 결정하는 문화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점을 치면서 했잖아요? 가위 바위 보를 하기 전에 손등을 쳐다봅니다. 거기 뭐가 보인단 말입니까? 그것은 또 아마추어들이 하는 점입니다. 진짜 프로들은 이렇게 합니다. 양손바닥을 ‘X’자로 마주 댄 후 한 바퀴 돌려서 그 속을 쳐다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 가증스럽고 웃기지도 않는 그런 일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고 있으니 “너 나가서 빨리 말해라. 네가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버림받으리라.”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신학에서는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또 질문했습니다. “바벨론이나 애굽이나 앗시리아 백성들은 하나님 마음에 드십니까? 우리만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왜 그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십니까?” 거기서 나온 게 토기장이입니다. “내가 그들을 이미 버렸다. 그들은 우상만 섬기는 민족이다.” 바벨론 문화, 앗시리아 문화는 다 바알신입니다. “너희들을 보존하고 싶은데 그 사람들을 들어서 너희들에게 채찍을 때리려는 것은 내가 결정한 내 마음의 방향이다.” 여기 우리교회가 있는 곳은 분당입니다. 

분당의 ‘분’은 동이분(盆)자입니다. 흙 동이를 만들기 좋습니다. 이후락 씨가 자기의 취미 사업인 토기 만드는 장소를 어디로 정할까 헬리콥터를 타고 대한민국을 돌아다니다가 경기도 광주, 여기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흙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이곳 주변이 동이점, 그릇 만드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구경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그릇이 찌그러지고 일그러져서 잘못 나왔습니다. 그러면 토기장이는 화가 납니다. “그 많은 경비를 들여서 이렇게 정성껏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찌그러졌어? 상품의 가치가 하나도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한쪽에 몰아놓고 도끼로 깹니다. 그래서 깨진 항아리 조각이 산더미 같이 쌓입니다. 하나님은 깨뜨려버릴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습니다. “본래 내 모습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깨뜨려버릴 수도 있다.” 그런 겁니다. 또, 작은 그릇도 있습니다. 간장 종지입니다. 장독대 같이 큰 것도 있습니다. 보석을 담아두는 귀한 그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강 같은 그릇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놓아야 너희들 삶에 필요하다. 다 똑같지 않다.” 이것이 토기장이 신학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변경할 수 없는 내용은 여러분의 의사입니까? 남자로 태어나고 싶었어요?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어요? 내가 결정한 일이 없습니다. 얼굴 모양, 목소리, 성격, 인종,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거, 내가 결정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까 이렇습니다. 그런 것을 어떡합니까? 제가 로마에 처음 가보니까 로마의 분수대가 있잖아요? 분수가 터졌는데 로마 남자들이 얼마나 키가 크고 얼굴의 윤곽이 뚜렷한지 그 멋진 남자들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어쩌면 저렇게 잘생긴 남자들이 있었나?’ 정말 황홀했습니다. 그 사람들 쳐다보다 나를 쳐다보니까 아무래도 만들다 만 거 같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불평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이렇게 말해야 하잖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디어는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용주와 목적이 다 따로 있어서 우리 같이 이렇게 한국에서 태어나고 이런 모양으로 살고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다 다르게 주신 은혜이다.”

저의 첫 번 목회지가 시각장애인 교회입니다. 전도사로 처음 갔더니 이 형제들이 저에게 얼마나 고난스럽게 질문을 많이 하는지 “전도사님! 인간이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전도사님이 늘 설교하시는데 우리가 돌릴 영광은 뭡니까?” “왜요?” “아니, 우리는 낳으면서 이렇게 되었단 말입니다. 여기 맹아원에서 안마나 배워서 이 추운 밤거리에서 안마나 받으라고 피리나 불고 다니고 넘어지기나 하고 차에 치여서 죽고 이게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네, 형제에게도 하나님의 큰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밤 이 추운 겨울에 안마를 받으라고 피리를 불고 골목골목을 다니실 때 형제의 피리소리를 듣는 사람은 다 행복하신 줄 아십니까? 우리보다 더 고민이 많고 살기 싫은 사람 천지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그 추운 겨울에 밤 피리를 불고 돌아다니는 그 모습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 생각이 바뀝니다. 저렇게 고난스러운 형제도 이 어두운 밤길에 안마를 받으라고 저렇게 피리를 불고 고난스럽게 살고 있는데 우리같이 멀쩡한 사람이 왜 낙심하고 자살을 생각하며 괴로워할까? 형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그럴 때 형제는 가만히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약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낳으면서부터 그렇게 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성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주어진 것을 좌절하지 말고 주어진 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요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심판하시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심판하신 이유가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가 수고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라.” 하도 안가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바알 종교의 본산지입니다. 요나는 “내가 왜 거기를 갑니까? 나는 그 놈들 다 죽으라고 기도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터키 쪽으로 가라는 것을 스페인 쪽으로 도망을 갔잖아요? 정 반대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끝까지 잡아다가 앗시리아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12만 명을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너희 백성들을 향한 내 뜻이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구원해라. 그래서 너희를 택했다. 그런데 너희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촛대를 옮길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로 옮기셨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 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 역사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 보이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불행이 무엇이었던가? 주변 역사에 나타났던 모든 강대국들에게 유대인이 피해를 입었잖아요? 애굽의 전성시대, 바벨로니아의 전성시대, 페르시아의 전성시대, 로마의 전성시대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왜 예루살렘에 핍박이 그렇게 많았는가? 유대인은 국수주의입니다. 남에게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도 자신들만 가집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어렵게 해서 ‘디아스포라’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세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나그네로 만들어버리셨잖아요? 유대인들은 옛날도 지금도 본국에서 사는 숫자보다 외국에서 사는 숫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420만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입니다. 귀화한 사람 80만을 합쳐야 500만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사는 유대인들은 미국에만 600만이 넘습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본래 내가 이렇게 흩어져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해 주라고 너희를 택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들에게는 흩어진 역사가 그렇게 많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희들이 사는 길이 있다. 내게로 돌아오라. 생각과 철학과 사상, 신학 뭐든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인류의 사는 길이 내게로 오는, 하나님 앞으로 오는 것이다. 나가서 말하라.” “하기 싫습니다.” “너는 이것을 위해 태어났다. 네가 어머니 뱃속에 지어지기 전에 내가 결정한 것이다.” 예정신학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사는 길은 지금도 가증한 것을 다 버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끝없이 가증한 것을 주인으로 삼기를 즐거워해서 이렇게 우주를 정복하는 최첨단 과학시대에도 문어에게 앞날을 맡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가증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신념,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창조하시고 21세기에 우리를 통해서 세계 역사에 구원의 빛이 전하여지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너 가서 그렇게 말하라.” “내가 그렇게 말하다가 온 나라 사람들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어야 할 텐데요?” “그래도 하라.” “죽으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하라. 너는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런 사명감 속에서 나의 존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조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명감에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조명하는 말씀을 저희들이 봤습니다. 나는 왜 이 시대에 이 자리에 있는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임을 깨닫고 이 시대에 주신 아버지의 사명의 촛대를 굳게 잡고 아버지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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