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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의 때인 증거 (딤후 3:1-5,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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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인 증거 (딤후 3:1-5, 4:3-4)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 현상 한 가지가 “이유가 없는 세상!” 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유가 없는 시대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원제: En attendant Godot)』 를 쓴 아일랜드 출신 사무엘 베케트가 어느 날 파리의 길거리에서 낯선 청년의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 갑니다. 입원해 있는 기간 동안 그는 내내 '왜 그 사람이 자기를 찔렀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답니다. 정신병자였을까? 내가 모르는 어떤 원한이 있나? 경찰에 잡힌 그 청년을 만난 사무엘은 “왜 나를 찔렀소?” 하고 묻자 그는 “그냥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를 미치게 한 것은 바로 그 대답이었다’라고 사무엘 베게트는 나중에 술회를 했습니다. 아무리 황당한 것이라도 ‘이유'가 있다면 그래도 받아들였을 텐데 ‘그냥’이라니, 정말 웃기는 변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인간의 한 모습입니다. 

공동묘지에도 이유 없는 무덤이 없고, 처녀가 애기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는데 요즘 세상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이유가 없는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1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하였습니다. 시험 내용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질책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기, 즉 때를 잘 분별해야 지혜로운 삶, 후회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를 잘 분별을 하고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기업하는 분들은 장래에 어떤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 시대가 어떻게 변하며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좋아할 것인가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학에 들어갈 고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앞으로 10년 후의 산업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지 않으면 전공과목을 정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대학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학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음대하면 성악과 기악과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군대에도 부사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사관학과가 있습니다. 외식산업학과, 아동가족학과, 물류시스템공학과, 전자상거래학과, 의료뷰티학과 등등, 듣도 보도 못한 전공과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에 또 다른 시대적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적 변화로 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21세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1세기를 기독교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종말의 시대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말의 시대가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어떤 때를 말합니까? 무슨 때가 찾아온다는 것입니까? 주님의 때,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즉, 인류 종말의 날,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내용은 종말의 때,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나타나는 시대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바로 알아야 우리는 그 시대에 맞는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알아야 거기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대를 잘 분별해야 교회교육을 바르게 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대, 어떤 모습이 나타나느냐에 따라 교육의 내용이 달라지고 교육의 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월은 여름성경학교가 있습니다. 온 교회가 교회학교 교육에 관심을 갖고, 교사들을 격려하며 축복하며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교회학교 교사주일을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시대, 때가 이른다고 하는 그 때는 어떤 때인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왜 종말의 때입니까?

1. 사랑의 대상이 잘못된 시대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면 종말의 때가 오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5: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누가복음6:35절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3장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과 이웃, 심지어는 원수를 맺은 남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때가 오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같은 모습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 뭡니까? 사람입니다. 사람보다 더 무서운 동물 없습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지 모릅니다. 짐승이 먹이를 사냥해서 물어 뜯어먹는 것을 보면 온 몸이 소스라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그런 모습으로 죽이는 일이 많습니다. 얼마나 잔인하지 모릅니다. 

동물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이해라고 할 수 있지만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인간, 그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신앙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보면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우리의 자녀들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종말의 때에 나타나리라고 한 때를 잘 읽어서 거기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종말의 증거로

2. 이기적인 삶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디모데후서3:2절에 보면 ‘자기를 자랑하며 교만하여서 훼방하며, 즉 남을 비방하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부모까지도 거역하는 배은망덕한 패륜아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따라서 사랑도 자기 사랑으로 치닫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교회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생각하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용하면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하지 않습니다. 

차를 파킹하는 것도 보면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편안한대로 해버립니다. 차를 더 파킹할 수 있는데도 더 하지 못하고 중간에 가로 막아버립니다. 다닐 수 있는 통로로 보이는 곳에는 최후에 안내를 받아 해야 하고 예배 후에는 제일 먼저 차를 치워드려야 합니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이기주의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삶을 향하여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도대체 무슨 내용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야 합니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타자중심의 삶을 사는 자로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8:34절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때는?

3. 포악해지는 시대입니다.

본문 3-4 절 상반절 말씀에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사람에게 성품 중에 주관적 경험, 표출 된 행동인 ‘정서[情緖, emotion]’가 있는데 그 정서가 메말라 가면 인정이 없어집니다. 인정의 감정이 없는 인간은 포악해집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으면 원수를 맺게 되고 원수를 맺으면 복수심이 작동하여 무슨 일을 자행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역시 포악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말세에 타나날 징조들을 열거하면서 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을 때 일어난 살인사건이 바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죄는 포악한 사람을 만들고 포악한 세상을 만듭니다. 

‘참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을 비방하는 자입니다. 남을 비방하면 원수를 맺게 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악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포악해집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남을 함부로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헐뜯거나 비방하면 안 됩니다. 모함하기를 좋아합니다. 

'절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절제가 안 되면 사회의 불의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살인사건이나 강간사건이나 요즘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 어른들이 성추행한 것들이 자주 뉴스로 등장하는데 이런 것은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다툼을 일으키거나 큰 싸움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욕망은 절적하게 절제되어야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사나워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납습니다. 포악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예사로 압니다. 지난 6월에 중학생들이 자기 친구를 죽여서 담요에 말아 한강에 갖다 버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태연했습니다. 아들에게 게임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어머니가 잠자고 있을 때 둔치로 때려죽이고 갈무리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이런 비슷한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악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우리가 놀랄 것이 아닙니다. 예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런 포악한 세대들에게 신앙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이 내용들도 역시 인간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부추기는 내용들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디도서1:8절에 보면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는?

4.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쾌락의 종류가 많습니다. 육체적 쾌락이 있습니다. 성을 통한 쾌락입니다. 감정적 쾌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승리할 때나 그것을 이루어낼 때 가져다 주는 쾌감입니다. 이런 쾌락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락과 스포츠입니다. 노름이나 오락에 미치면 패가망신해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인간을 살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발적인 사건도 있지만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면서 살인하는 연쇄살인범들도 있습니다. 

로마서8:5절에 보면 ‘육신의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도모한다’고 했습니다. 가정파탄의 주범이 이성적인 문제입니다. 

요즘은 동성애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sbs 드라마 모 프로그램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제는 이런 내용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처럼 보입니다. 

정신적 문제로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질병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주인공을 의사로 설정해서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부반응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동성애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서는 비성경적입니다. 동성애를 동조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레위기 18:22-23절 말씀,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레위기 20:17절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

이것은 근친상간을 엄하게 꾸짖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전부 육체적 쾌락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정목을 십자가에 못 받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바른 교훈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4:3절 말씀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바른 교훈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온전하게 가르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 왜곡된 내용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요한복음3: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교훈을 받으면 자신들의 잘못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왠지 조금 비뚤어진 자, 조금 비뚤어진 기준을 가지고 가치관을 측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바르게 가르치면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왠지 왜곡된 내용, 잘못된 내용을 좋아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인기가 높고 올바른 가르침을 주장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을 하거나, 고지식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됩니다. 

교복을 입히면 고리타분하고 교복을 벗기면 아주 잘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아이들의 성숙도가 있는데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인권을 이야기 하면서 수업을 받다가도 매점을 이용하려고 하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비슷한 예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를 주장하면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목사가 되기 십상입니다. 주일저녁 예배를 강조하거나 수요예배를 강조하면 왠지 시대에 맞지 않는 지도자, 보수적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렇게 열린 시대에 술 담배에 대한 설교하는 목사는 조금 모자라는 목사로 취급받는 시대입니다.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삶을 너무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오후예배를 없애거나 수요 예배를 없애면 모두가 손뼉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르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바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바르지 않는데도 그것이 바른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바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렘23:17절에 이미 예언해 주셨습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런 시대에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정립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다리를 꼬고 있거나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거나 하는 것이 예사로 나타나는데도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오히려 저항을 하고, 그것을 그대로 두면 시대에 맞는 목사로 인정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시대에 교회교육, 신앙교육을 무엇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실천으로 따르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종말의 증거로?6. 스승을 많이 두는 시대입니다.  

본문 4:3절에 보면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왜 스승을 많이 둡니까? 현대는 물질만능의 시대입니다. 

출세지향적입니다. 그래서 교육의 목표가 올바른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헌법상으로 보면 ‘홍익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과 명예를 얻고 재물을 축적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스승을 두고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다 습득시키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의 능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동분서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라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스승을 많이 두고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예능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는 더욱 밝아지고 행복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더욱 악해지고 사회는 더욱 나빠져 갑니다. 범죄율도 증가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보면 학원문화가 팽배되어 있습니다. 학원문화는 학교교육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교육열과 함께 출세지향적인 삶의 방식과 함께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 자녀출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증가하지 않는 이유,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유 중의 하나가 교육비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교육비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는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자녀들은 학원을 몇 개 다니고 있습니까? 

어떤 초등학교 아이를 둔 엄마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요즘에는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피아노나 플롯 같은 악기 하나와 미술은 저학년 때, 태권도나 합기도 같은 운동도 시키고 논술까지 시키는데 돈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2007년도에 통계청과 교육인적자원부가 전국 초·중·고 2,72개교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06년 우리나라 사교육비 규모가 총 20조 4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한해 국가 전체 예산의 10분의1에 육박하는 금액입니다. 이 금액은 초·중·고 공교육 예산의 76%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학생 10명 중 7명 이상이 사교육을 받고 있으며 1인당 월 평균 28만 8,000원을 사교육비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국감 자료에 의하면 2008년도 학원 강사는 모두 23만 8,000명, 또 학습지 방문교사 7만명, 개인과외 교습자 21만 명까지 합하면 모두 51만 8,000명으로 추산된다고 했습니다. 

사교육의 성업은 지난해 6~7월 서울시교육청이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서울의 21개 초·중·고교 학부모 2만 5,955명을 상대로 실시한 사교육 실태조사를 보면 ‘학부모들은 매달 사교육비로 평균 65만 2,000원을 썼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통계청이 “서울 지역 1인당 사교육비는 29만 6,000원”이라고 발표한 것과 비교하면 2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이와 같이 사교육을 많이 받다보니 자연적으로 스승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인간성을 위한 스승은 없습니다. 다만 성공하기 위한 스승들이요,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는 인생을 위한 스승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사욕을 쫓는 스승을 많이 두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참 스승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잘 안내해야 할 책임이 교회교육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름성경학교 및 수련회에 학원이 가로 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종말의 증거로

7.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본문 4:4절 말씀에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귀를 진리에서 돌이켰다고 했습니다. 

듣는 귀를 잘 훈련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가졌지만 아무 것이나 들으면 안 됩니다. 사단의 말과 주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말을 분별해야 합니다. 욥기12:11절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예레미야 6: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할례 받지 못한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곡되게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의 귀가 할례 받지 못함으로 인해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거나 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할 때 듣고 있던 회중들이 이를 갈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귀를 틀어막고 돌을 던져 결국 스데반 집사를 죽였습니다. 

잠언 2:2절에 보면 ‘지헤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스가랴 7:11-12절에 보면,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되면 허탄한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거부하거나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면서도 오히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남의 허물 이야기, 잘못된 이단과 사이비 이야기, 세상을 왜곡시키는 이야기, 다른 종교 이야기 등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는 내용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3 -4 절에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20-21절 말씀에도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실 요즘 한국교회의 강단의 메시지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없지 않습니다. 딱딱한 진리의 말씀 보다는 구수한 이야기나 유우머스러운 내용의 말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 설교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아 설교에 십자가가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보다는 위인전이 더 좋아하고, 놀이보다는 게임을 좋아하고, 말씀 이야기보다는 음담패설을 더욱 좋아하는 시대의 사람들, 아이들에게 무엇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신앙교육을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딤후 3: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한 마디로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한 번 더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고통 하는 때가 이르겠다’고 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시대가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악한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최선의 생활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종말의 때,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나에게 맡겨주신 귀한 직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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