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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노년과 죽음 (창 2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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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노년과 죽음 (창 25:1-18)


창세기 25:1-18
1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우리나라에 오복(五福)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복으로 오래 사는 장수의 복과 부유하게 사는 부귀의 복과 건강하게 사는 강녕의 복과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유호덕(攸好德)의 복과 깨끗한 죽음을 맞는 고종명(考終命)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다섯 가지 복을 다 누린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 아브라함이 누린 그 다섯 가지 복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는 175세까지 사는 장수의 복을 누렸습니다(7).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나 하고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있지만 어쨌든 그가 장수를 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음은 자기 자식 이삭과 그 서자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줄 정도로 부귀의 복을 누렸습니다(5-6).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비록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사병 300여명을 거느리고 블레셋 왕과 계약을 맺을 정도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 그는 건강의 복을 누렸습니다. 8절에서는 그가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사했습니다. 그가 100세가 넘는 늙은 나이에도 다시 아내를 두고 여러 자녀들을 낳은 것을 볼 때 그가 매우 건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아브라함은 유호덕의 복을 누렸습니다. 여러 자녀를 두고 그 자녀를 통해 많은 부족들이 탄생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세상에 끼친 덕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이웃을 복 있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그의 모습이 대표적이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고종명의 복을 누렸습니다. 8절에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9절에 자기가 샀던 막멜라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이 깨끗하고도 편안한 죽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나 중동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 가족 묘에 편안히 안장되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5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나 다 복을 좋아하고 그 복의 내용도 같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복들은 모든 인류가 얻기를 소망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복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복이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말씀의 아브라함처럼 장수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평안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 말씀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매우 현실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 자녀가 많은 것,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수의 복을 누렸습니다. 심지어 오늘 말씀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스마엘 또한 137세를 살았다고 합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으며, 이후 평균 수명이 70이요 건강하면 80으로 짧아진 왕국 시대에도 그 나이가 차도록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병이나 사고로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저주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반면에 신약시대는 축복의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복보다 하늘나라에 대한 복이 강조되면서 이 땅에서 장수하며 사는 것이 더 이상 큰 복처럼 인식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 예수님이 33세, 요절이라면 요절이라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 모두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구약의 기준으로 본다면 저주스런 죽음이었다 할 것이지만 이 모두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오히려 그 순교가 아름답게 찬양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며, 어느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지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 중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물론 둘 다 누리면 좋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가 흐트러졌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축복입니다. 

신약에서는 요한3서 1장 2절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의도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목회철학이 바로 이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영혼의 축복, 범사의 축복, 건강의 축복이라는 3박자의 축복입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판이 많았지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살고픈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억누를 수는 없고, 저 또한 이것이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신약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과 순교가 예외적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 때문이며, 진리를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악과 싸우다 그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억압하는 뚜렷한 악이 보이지 않는 이상 고난을 스스로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또 우리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또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은 경고적 교훈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와 나눔이 필요합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늘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매여 탐욕을 좇아 살거나, 인색하게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삶들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 이 땅에서 욕심과 허망함을 좇아 산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간다 할지라도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하여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서 얼마나 신랄하게 경고하셨는지 우리는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장수 또한 하나님의 복이지만 그 보다 더 나은 복이 있음을 우리는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는 시인의 고백이 바로 그렇다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죄인으로서 산다면 그런 장수보다는 의롭게 살다가 짧게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의 복과 장수의 복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하면서도 우려스런 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자신들의 삶을 저주를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절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가난이나 병, 또는 단명함을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병과 사고는 죄의 산물이지만 한 인간에게 있어서 죄와 저주가 일대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 자신이 피해를 받기도 합니다. 

예컨대 부모로부터 좋지 않은 형질이나 환경을 유전 받았을 때가 그렇습니다. 자녀가 무슨 죄입니까? 배에 밑창을 뚫는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여러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얽혀 있고 그래서 죄의 원인을 따지기가 매우 복잡합니다. 또 여기에 욥처럼 하나님만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고난도 있습니다.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원인은 여러 가지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많지만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고난에 지지 말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기도 중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야베스의 기도를 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분은 그 기도대로 이미 하나님의 형통함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야베스는 역대상 4장 9절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야베스가 태어날 때 그 어미가 죽을 뻔하였거나 아마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안에 매우 어려운 일이 닥쳤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이라 불릴 정도로 저주스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가 나중에 형제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됩니다. 야베스를 존귀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 기도였는데 역대상 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그 네 마디 기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1)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2)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3)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4)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여러분도 야베스와 같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 인생에 닥친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의 불행을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진대 여러분의 인생의 축복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 노년기의 과제

오늘 읽은 1절에서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후처를 두었다고 합니다. 이 후처를 사라 죽음 이후에 얻은 것인지, 그전에 얻은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당황스럽게 만든 본문입니다. 사라와 오랜 동안 동행했으니 그냥 혼자 살며 정절을 지키다 죽으면 아름다울 것을 성경은 후처를 두었다고 말씀하고 여기로부터 6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을 매우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합니다. “아내가 죽었다 하여 노쇠한 몸으로 또 다시 결혼을 했다면 아브라함의 큰 어리석음에 틀림없다...... 분명히 말해서 아직 사라가 살아 있을 때 아브라함이 또 아내를 얻었다면 - 내 생각으로는 그랬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 그의 음행적인 결합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칼빈이 상당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백 살이 넘은 사람이 자녀를 여섯을 둘 수 있었을까? 하며 하나님께서 다시 회춘의 은혜를 주셨다고 주석하였습니다. 루터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들을 얻으려는 경건한 관심사 때문에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며 아브라함의 행동을 미화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이 장면을 달리 해석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아브라함의 정력이 회복되는 기적을 자랑하거나 아브라함의 부적절한 태도를 비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노년의 아브라함을 얼마나 축복하셨는가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자녀가 없어 고생했던 사람입니다. 어렵게 아들 이삭을 얻은 연후에는 자녀의 복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자녀를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동안 자녀로 인해 마음 고생을 했던 아브라함을 위로하십니다. 

눈물의 여인 한나는 기도 끝에 어렵게 사무엘을 얻은 후 그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나를 축복하여 그 후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욥은 자기 물질과 자녀를 잃는 고통을 겪은 후 하나님은 다시 물질을 갑절로 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다시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노년을 복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젊은 시절의 고생과 후회를 싹 씻어서 잊게 하시고, 오히려 더 풍요롭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19) 더 이상 과거의 고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황혼 무렵에 이런 고백을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찬양과 감사가 절로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 할 노년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씻은 듯이 사라지게 만드시고 감사를 찬양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노년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발달 과정을 연구했던 심리 사회학자 중에 에릭슨이 있습니다. 에릭슨은 인생을 그 나이에 따라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될 과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단계 구분은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신체와 정신 발달에 따라 그때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인생의 도전과 과제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에릭슨은 이중 마지막 8단계인 노년기의 과제를 통합성이라 했습니다. 

노년기는 육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퇴보하는 나이이며, 또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나이입니다. 이 때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정리하고 의미 부여를 하는 나이입니다. 또 못다 한 숙제가 있으면 보충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통합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기 인생이라는 작품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의미 부여를 통해 만족감을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은 다 되었고 작품은 제출해야 하는데 여전히 공백이 많고 수정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대로 부족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통합성은 화해라고도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 과거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없으면 의미부여를 해서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이나 상처를 반복함으로써 화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할머니들은 자기 남편에 대한 욕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바람을 피웠거나 모질게 대했던 것에 대해서 비난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대개 그 결론은 ‘그래도 그 영감이 정은 있었지’ 하며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과거와 화해하고 의미부여를 하고 나면 자기 인생이 의미가 있어 보이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과거와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원망과 미련이 많으며, 숙제를 끝내지 못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효자는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자식입니다. 반복해서 귀찮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제가 의미부여라고 하니까 마치 없는 것을 꾸며내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자기 인생에 대한 신앙적 고백입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과 화해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이 실든 좋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 운명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며, 나름대로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잠깐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아직 매듭짓지 못한 것이 있으면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매듭을 지을 수 없는 것이면 미완성인 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인생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자신의 오점으로 남았고 또 후회가 되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이스마엘의 문제였다 생각합니다. 이스마엘은 친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적인 술수를 부려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 때문에 집안이 시끄럽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어린 이스마엘을 내어 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쫓겨난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쫓아내었기에 아브라함은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에서 16절에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나오는데 야곱의 열두 아들과 같이 그 아들이 열두 명입니다. 하나같이 작은 부족들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아브라함은 마음이 흡족했을 것입니다. 자기 짐처럼 생각했던 이스마엘이 잘 사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브라함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된 것이지요. 9절에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사를 치릅니다. 이스마엘도 아버지 아브라함을 받아들였고 또한 형제간의 화목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모습을 보았기에 편안히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후회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이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풀어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평안한 죽음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노년을 축복하셔서 저주가 축복이 되도록 하시며, 후회가 감사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그릇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이삭 외에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들의 족보가 12절에서 18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앞서서는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를 통하여 여섯 아들이 나오고 거기서 나온 족속들의 명단이 2절과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들 중 미디안 족속은 기드온이 사사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형제임을 밝힙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동방”에 거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이삭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두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이런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입니다. 세상이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이스라엘로, 교회로 부르신 까닭은 우리만 복 받고 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분명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사람이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놀라운 비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3-25) 애굽은 이스라엘 남방에서, 앗수르는 이스라엘 북방에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민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민족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곳곳과 성경 곳곳에는 이방 민족, 특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들도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 가운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성경은 신앙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힙니다. 어떤 목사님이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을 약간 비틀어 ‘공부해서 남 주자!’로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은혜 받아서 남 주자’, ‘복 받아서 남 주자’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축복과 은혜를 주신 이유는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이웃 또한 잘 살고 복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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