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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의 믿음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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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믿음 (막 4:35-41)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원래 사도바울의 조수 출신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종자라는 말로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시다정도의 인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가가 마가복음을 쓰고 나니까 마가복음의 위상이 바울의 어떤 글보다도 높아져서 신약성경을 보면 마가복음이 먼저 소개되고 한참 후에 바울서신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바울 선교팀의 주니어 멤버였습니다. 바울이 있고 바나바가 있고 한참 뒤에 누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서열은 바울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그러나 그런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니까 바울의 글보다도 더 위상이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서신은 하나 두 개가 빠져도 되지만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문서가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돼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제일 짧은 것이 마가복음이고 가장 쉬운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쓴 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바울은 어려운 논술체로 신학과 교리와 철학을 썼지만 마가는 일기를 쓴 것처럼, 신문기사를 쓰는 것처럼 간결하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논술로도 다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진리를 마가는 간결한 문장으로 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와 같은 경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는데 동시에 영적인 교훈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이 생겼다는 것을 보고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하여 기록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풍랑이 그친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왜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 라고 믿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 에피소드의 키워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 믿음을 어떻게 간수하느냐,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느냐, 믿음이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루느냐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한 것처럼 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데 바로 35절에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예수님이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심으로 이 모든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천명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천지창조가 시작된 것처럼 모든 일은 믿음의 신앙생활에 관계된 모든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그것을 우리가 듣고 그것을 따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순종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졌다고 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배를 타고 건너가는 중에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을 시험할 만한 일이 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에 머리를 베고 주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8절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에요. 

예수님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피곤할 때가, 주무실 때가 있었다는 그것만을 말한 게 아니고 풍랑 중에 믿음의 위기가 있는 중에 예수님이 주무시더라, 예수님이 계시는 데 안 계시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고 우리의 상황을 모르시는 것 같더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예수님이 계시면서도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두려움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믿음이 더 필요한 시점이에요. 믿음이 시험을 당할 때 그때가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정이 경제적인 위기를 당하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때가 정말로 가족애가 필요한 것처럼, 국가가 위기를 당할 때 그때가 정말 애국심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풍랑을 만났을 때 그때가 정말로 믿음이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애초에 뭐라고 말씀하였느냐면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건너가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내가 건너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건너가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속성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만을 나타내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해야 되는 일만을 나타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할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므로 공동의 작업인 것입니다. 

한쪽만을 강조하다가 실수합니다. 나만의 의무 ․ 나만의 공로 ․ 나만의 노력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나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나를 강조하거나 하나님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공동의 작업이에요. 파트너십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자기만의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과 자신의 공동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나의 인생의 결과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내 인생의 결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십니다. 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지, 나의 삶이 장차 어떻게 될지 나만이 관심을 갖는 게 아니고 하나님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도 거기에 많은 것을 투자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투자하십니다. 우리의 미래에 투자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결과에 투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열매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열매를 바라신다는 말은 투자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바랄 수 있는 자격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쉽게 낙심한다거나 쉽게 포기한다거나 하면 안됩니다. 내 삶이지만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 것입니다. 나만이 경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삶에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나같이 작은 인간, 나같이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귀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차별하지 않고 병들었다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계급을 만들고 또 서로를 남과 나, 그들과 우리-they we 이런 식으로 구별하지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아주 귀중한 단어중의 하나는 ‘누구든지 믿으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whoever, 누구든지 상관없이, 누구에게라도 이러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므로 내 인생 내 신앙을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고 제 일이고 여러분의 일입니다. 제가 이 목회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성공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성공하시는 것이 우리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내 배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지만 계시고, 계시는 데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밀히 계십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고 예수님이 지켜보기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이 확실하고 화끈하게 개입해 주시기를 바라지요. 심판할 자가 있으면 좀 더 빨리 심판하고 도와주려면 좀 더 확실하게 더 화끈하게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그게 우리의 소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이 배에 타고 계시는 한은 이 배가 가라앉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이 배에 타고 계시는데 배가 가라앉을 리가 없습니다. 배가 가라앉는다면 예수님이 이 배에 타지도 않았고 주무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배에 계시고 주무신다는 사실은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까짓 풍랑 따위는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무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인간이이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에요. 그러므로 믿음을 갖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궁극적인 성공과 승리를 바라보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이 배가 풍랑을 만나든 시련을 만나든 위기를 만나든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궁극적인 결과를 낙관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풍랑이 일고 있을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결과를 낙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내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기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내지 못할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셨다는 것은 끝낼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지요. 영어 성경을 보면 ‘Let there be light-빛이 있을지어다’ 하니까 빛이 생긴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Let us go over-우리가 건너가자’ 그 말은 건너가게 하라는 말이에요. Let us go over 라는 말은 엄밀하게 번역하면 건너가자가 아니고 건너가게 하라는 말이에요. 이건 예수님의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건너가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건너가게 됩니다. 도중에 만나는 풍랑은 믿음의 시험일뿐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주무시느냐. 그리고 주무시다가 깬 후에 제자들을 나무라셨어요.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 왜 두려워하느냐고 나무라셨어요. 나무라신다는 말은 제자들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뭐를 잘못했습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하기를 바라셨을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우리가 평소에 바람을 꾸짖는 일이 별로 없지요. 개를 꾸짖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바람? 꾸짖는다고 대꾸를 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바다에게 말을 해요?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돌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말씀하셨어요. ‘잠잠 하라! 고요 하라!’ 그랬더니 순종했어요. 이건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파워가 물질세계 위에 있어서 물질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적이에요. 이게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그런 거 잘 몰라유, 나는 그저 교회만 다니면 돼유.’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텐데 그건 마치 택시를 타고 머리에 지고 있던 짐을 그대로 지고 있는 할머니와 같아요. 택시를 태워주는 것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어떤 미국의 노부부가 TV에서 부흥사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집회를 보면서 서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여보, 우리는 우리가 평생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저게 진짜라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았소.’ 진실한 그리스도인 중에도 그 신앙의 참 면모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그 유산의 귀중함에 대해서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성경말씀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라고 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며 새 방언을 말하며 또 손으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도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어요. 믿는 자에게 따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내 환경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울 때도 있지만 환경을 극복하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바람을 견디게 하는 면도 있지만 바람을 잠잠하게 하는 때도 있다는 얘기에요. 꾸짖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과 이 길을 가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 길을 가는데 내 길을 가로막는 어둠의 권세 앞에서 예수님의 권세로 그것을 꾸짖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잠잠 하라! 그만하라! 멈춰라! 물러서라! 비켜라! 꾸짖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꾸짖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꾸짖으면 듣습니다. 물러갑니다. 그칩니다. 그래서 바다가 잠잠해집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했었다면 예수님은 깨어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신 후에 꾸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지난주에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나무라신 적은 별로 없어요. ‘너희가 왜 죄를 지었느냐’라든가 ‘왜 이렇게 죄가 많으냐’ 이런 말씀 하신 적 별로 없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셨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든가 아니면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든가 오늘 본문에 ‘너희가 왜 믿음이 없느냐 왜 두려워하느냐’ 주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람이 불든 풍랑이 일든 반드시 건너가게 됩니다.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뜻은 그 뜻대로 되도다 우리 아버지의 뜻은 거룩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그 뜻대로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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