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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안에 거하라 (요일 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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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거하라 (요일 4:11-2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인간 삶의 테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주는 것이 인간 삶의 내용입니다. 사랑 속에 산다는 것 자체가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삶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생활이 잘못되어졌기에 삶이 병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곧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만드시는 역사입니다. 곧 사랑은 성령의 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것은 인간최고의 만족이며 인간 최대의 행복이자 인간 완성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5-39)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이자 본 뜻인 강령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첫째임과 동시에 마지막이며 중심과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어 놓으신 인간구원의 역사를 믿고 받아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소유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 4:15-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드릴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엄청난 사랑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인간의 구원이 그 속에서 성취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뚜렷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사랑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지식입니다.
온전히 안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 있는 지식을 만들어 줍니다.  
부모의 사랑 안에서 어린아이는 신뢰가 무엇임을 알게 됩니다. 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드릴 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사랑 안에서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의 지식을 얻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녀가 될 때, 병든 지식을 가질 위험을 있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고 가치 있고 보람된 것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비관적이며 회의적이고 불행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 맞선을 보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격식과 예의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점점 깊이 교제하면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을 때, 서로를 이해하는 지식을 갖게 되고 서로 조화할 수 있는 지식을 찾게 됩니다.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의 지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두 남녀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됩니다. 
부부는 사랑 안에서 가정의 행복이 무엇임을 알게 됩니다. 서로의 지식을 얻습니다. 남녀의 다른 이성의 조화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한 부부생활의 지식을 얻습니다. 사랑하기에 상대의 귀중성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부의 삶이 무엇인지 부부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행복의 지식을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인간관계는 형식적인 격식, 표면적 예의를 갖추는 데에 민감해 집니다. 단지 상투적인 표현, 피상적인 말만이 오고가게 되어 불편하고 어려운 분위기가 지속 됩니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되기에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많은  니다.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논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이해는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신앙이 될 때에 그 신앙은 외식적 신앙으로 발전됩니다. 겉의 과시, 외형적 경건, 위선의 신앙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은 메시야에 관하여 많은 예언의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들은 메세야이신 예수를 거부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론과 지식은 부족할 지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구원받는 생명의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살고, 왜 죽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는 살아있는 지식이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감정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된 나 중심의 감정에서 자유하게 하여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정을 가지게 합니다. 사랑은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도록 내 이기적인 감정에서 자유하게 해줍니다. 사랑은 일곱 번 씩, 일흔 번 씩 용서하도록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은 나 중심의 감정에서 자유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병든 감정에서도 자유하게 해줍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3)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감정은 어떻습니까? 이유 없이 쓸쓸합니까? 텅 빈 것 같이 허무합니까? 의욕이 없이 무력합니까? 이유 없이 불안하며 우울합니까? 무거운 쇳덩이가 짓 누르는 것 같이 무겁습니까?   
  
우리의 감정은 병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복수와 파괴적인 감정으로 지배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쓸데없는 교만과 우월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교만과 우월감은 상처난 감정이 만들어준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두려운 감정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운 감정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감정입니다. 
 
처음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불순종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 그들은 나무숲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져 숨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감정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는 하나님으로 부터 단절되게 만들었고, 이 단절된 감정은 두려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에게는 두려운 감정이 있습니다. 이 두려운 감정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감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러한 감정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것 같은 그 글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하나님의 사랑은 논리가 아니고 감동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기적이고 병들고 잘못 된 감정 그리고 두려운 감정에서 자유하게 해 줍니다.

책임적인 행동을 하게 합니다. 
사랑은 서로 희생하는 책임적인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는 희생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책임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책임적인 행동을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이웃사랑입니다. 성서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사랑 안에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1:6)”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에게 ‘왜 전도하십니까?’ 고 물으면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고 물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당신은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이웃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큰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십니까? 고 물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왜 자녀를 위해 희생하십니까? 왜 그렇게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왜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책임 있는 행동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한 죄 많은 여인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비난하는 바리새인 시몬에게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4-47)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존경하여 식사에 초대하였지만 죄를 사하시는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깨닫는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은 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으며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은 예수님을 믿는 생명의 지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녀는 부끄러움, 수치심, 자존심의 감정에서 자유로왔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입맞추어 드렸습니다. 사랑은 그녀를 그렇게 되도록 했습니다. 여인은 옥합의 향유를 아낌없이 붓는 희생의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인은 예수님께 아낌없는 헌신뿐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책임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생명의 말씀이 되도록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4-1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깨닫고 생명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책임적인 행동의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드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사랑 안에서 소유되는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의 능력으로 나 중심의 이기적 감정과 병든 감정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이 하게 하는 책임적인 행동으로 가치 있는 생활을 이루십시오. 사랑 안에 거하심으로 사랑이 만드는 축복자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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