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시 23:5)

  • 잡초 잡초
  • 414
  • 0

첨부 1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푸른 초장에서 누이시고, 잔잔한 물 가로 인도하시고,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켜주신 하나님의 목자 되신 사랑은 시인에게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본문 말씀에서 그보다 더 넘치는 은혜를 피력하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하게 잔칫집의 문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잔이 부딪치고, 질 좋은 포도주로 넘쳐나는 그 기쁨의 광경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 자신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 잔이 하나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이 영혼의 빈 잔을 이 세상의 물질의 소유와, 쾌락, 명예 등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들로는 그 빈 잔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기쁨을 언제 경험했을까요? 성경은 오늘날 어색한 단어가 되어버린 벅찬 감격과 희열에 사무치는 이 시인의 경험을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름으로 그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구절을 이번에 먼저 살펴봅시다. 상은 히브리어로 ‘슐한’입니다. 이 단어는 상 중에서도 밥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의 목전에서 시인에게 베푸신 밥상이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인의 식사 관습을 알아야 합니다. 동양인에게 식사는 가족과 형제 됨의 관계를 의미하는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그 관계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식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눈앞에서 그에게 식탁을 베풀어주신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단수로 나오는 이 ‘원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를 나타내는 ‘쪼레라이’입니다. 결국 종합하면 “나를 괴롭게 하는 많은 자들의 면전에서 주님은 나에게 한 밥상을 베푸시나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다윗이 궁지에 몰렸을 때 수많은 원수들이 그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큰 밥상을 베푸시고, 그와 함께 마주하여서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 가운데 원수들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시인을 헤치려는 마음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잘못하셨을 때는 때리시며 징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때리실 지라도 원수들이 시인을 헤치는 것은 차마 보실 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에 관해서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의 악에 대해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응보적 공의인데 이것들은 불택자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따라서 징벌을 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정적 사랑으로 선택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입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시인을 에워쌌지만 그들은 이 시인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약했지만 그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은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받았던 밥상은 성대한 식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정말 배고픈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 온갖 산해진미로 차린 커다란 상의 네 귀퉁이에 줄을 매달아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셨구나.’하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인은 너무 배가 고파 제사장 이외에 먹지 않는 진설병을 먹고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은유일 것입니다. 바로 말씀의 식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만나로 먹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 쌓이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고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모든 악한 원수들이 바라보는 그 면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성대한 진리의 식탁을 시인을 위해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그 식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먹으면서 굶주린 자신의 영혼의 큰 배부름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났던 시인이 이기는 방법이었고,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시인이 그 상처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던 비결이었습니다. 그 성대한 말씀의 잔치 앞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직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환경이 자신을 저주할지라도 주님이 여전히 자신을 하늘 가족으로 여기시고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짧은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도 한때는 시인처럼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곤고한 인생의 시련의 강가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을 살리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깨 위에 날개를 날아 그 절망의 계곡 건너편 언덕에 이르게 하셨던 그 놀라운 승리는 무엇을 통해서였습니까? 곤고한 우리의 영혼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진리의 말씀’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오류에 눈먼 우리를 보게 하셨고, 죄악에서 건지셨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곤고한 영혼들을 건지시고 메마른 땅을 지나는 언약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식탁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때에만 우리 가까이 계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지경에 있고 심지어는 스스로 주님을 멀리 떠날 때조차도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큰 목자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니, 그 사랑은 이렇게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시는 말씀의 성대한 식탁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늘 평탄한 풀밭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신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며 자기의 인생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 이름 위에 살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비바람이 부는 광야를 지나게도 하시고, 폭풍 가운데를 거치게도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혼자 있는 좌절과 외로움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말씀의 식탁으로 이끄십니다. 거기에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인간의 허물을 능가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보석과 같은 성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하십니다. 

시인이 남긴 80여 편의 시는 대부분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며 아름다운 찬양으로 꽃 피웠던 것입니다. 그처럼 좌절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을 걷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서 베푸신 그 풍성한 말씀의 식탁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녹이시며, 인격적으로 설득하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의 영혼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그것은 모두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그 말씀의 성찬 앞에서 죄인에게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은 바로 그 큰 사랑 앞에서 감화를 받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을 다 살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내 의지로 행할 수 있지만,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 앞에서 승복해서 무릎을 꿇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삶의 자리에 놓여있든지 이 말씀의 식탁으로 돌아오십시오. 그 말씀 앞에서 영원한 새 생명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