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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는 눈과 듣는 귀 (눅 4: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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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과 듣는 귀 (눅 4:21-30)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신앙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신비롭고 소중합니다. 특별히 귀는 우리 삶에 필요한 정보를 흡수하는 기관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귀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의학자 알프레 토마티(Tomatis)는 1940~50년대 오페라 가수들을 치료하면서 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들은 무대에서 아주 큰 목소리로 노래했는데, 그들 중 고음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가수들이 토마티에게 치료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가수들의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은 후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마티는 후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이크도 없이 높은 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될 때 자기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약 130~140데시벨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트기 엔진으로부터 3~4m 정도 떨어졌을 때의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토마티는 청력이 상실된 소리의 주파수대와 발성하지 못하는 소리의 주파수대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토마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자기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만 낼 수 있다. 사람은 후두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노래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토마티 효과'라고 부릅니다. 청각에 문제가 생기면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면 이웃들과의 대화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저하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로 들어야 신앙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노래는 무엇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 잠길 때, 우리 속에서 신앙의 기쁨이 샘솟고 참된 신앙의 노래가 연주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기를 거부합니다

신생아의 천 명 중 두 명 정도가 자폐증을 갖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자폐증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력이 떨어집니다. 언어발달이 늦거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미소를 짓거나 눈을 맞추어도 그것에 응답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물을 볼 때도 감동이 없습니다. 때로는 무관심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자폐증 아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듣는데 무심하다는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귀는 정상인데 반드시 들어야할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치 우물과 같은 깊은 곳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알프레 토마티는 자폐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은 곤충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은 듣습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듣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자폐증의 모습입니다. 

때로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자폐증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걸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기뻐하고 감격하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합니다. 벌컥 화를 내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비난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존과 충돌합니다

누가복음 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이사야 61장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이 바로 오늘 임하였다. 오늘 너희들의 귀에 들려지고 있다. 지금 이 메시아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이 말씀을 들은 회당의 사람들은 처음에 아주 놀라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누가복음 4:22) 

그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기대하여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신선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곧 그들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보다 더 나아가면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실존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는 공자나 붓다의 말을 들을 때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 역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그 말씀에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함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만나면서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현실세계의 땅을 밟고 있는 내가 예수님을 통하여 열려지는 하늘의 초월성을 보게 될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은 거짓이요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예수님을 향하여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고향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은혜로운 말로 받았던 이들이 말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별 볼일 없는 평범한 가문의 아들이 아니더냐? 여기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선입관, 고정관념을 통해서 예수님을 끌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격하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의 문과 귀를 열고, 볼 수 있는 눈을 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꽉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자폐적인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들의 반응이 얼마나 격해졌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누가복음 4:28~29) 

인간의 마음이 한 번 닫히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셔도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회당에 있던 자들은 처음에는 경탄했지만 그 놀라움은 분노와 적대감으로 변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24)

우리의 선입견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시기심과 질투심이 영적인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체된 영혼을 새롭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확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을 비난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지금 주무시고 계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고 바로 앞에서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었을 때 수많은 과부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그 고통에서부터 구원을 받은 여자는 사렙다의 한 과부뿐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음에도 엘리사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회당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는 더욱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직접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안 보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인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면 너무 멀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나는 모르겠다고 항변합니다. 이것이 닫힌 마음, 감겨진 눈, 듣지 못하는 귀를 갖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봄이 되면 농부가 밭을 갈아서 전부 뒤집듯이, 우리의 침체된 영혼을 갈아엎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자부심을 뒤집어놓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가졌다,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의식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됩니다.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말씀을 경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듣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듣고 빈 기름병을 갖고 왔습니다. 그러자 기름병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서 나왔습니다. 그때 그의 병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도약이 가능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간에 의해서 차곡차곡 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듣는 마음을 가질 때 업그레이드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역전이 가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비약과 도약이 가능하도록 열려진 종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왜 우리에게 멋지고 소중한 것입니까? 남자나 여자, 있는 자나 없는 자, 세상의 고관이나 평범한 사람 어느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믿으면서도 도약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쁨과 감격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귀를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폐증과 같은 어리석은 것을 버리게 해주세요.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게 해주세요.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주세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주세요. 다윗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주세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주세요. 바울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주세요. 듣는 귀를 갖고 말씀을 받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십니다. 생명을 약속해주십니다. 치유를 허락하십니다. 죄 용서의 기쁨을 주십니다. 듣는 귀를 갖고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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