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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주에서 모험적 신앙으로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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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에서 모험적 신앙으로 (마 14:22-33)


14일 일간지에서 하버드대에 생활비를 포함한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한 학생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결혼하여 딸을 낳았답니다. 그런데 이혼하고 홀로 딸을 양육하였답니다. 싱글맘이 되어 의류매장을 하며 어렵게 살았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이 이런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에 안주하며 살겠습니까? 또 다른 세계를 향하며 모험을 감행하겠습니까? 이 집사님은 딸을 유학 보내기로 했답니다. 딸을 유학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의류매장을 하면서 나오는 얼마 되지 않는 수익을 쪼개서 유학 자금으로 남겨두었답니다.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김 양은 홀로 캐나다로 보냈답니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 집사는 또 고민하기 시작했답니다. 이 정도로 안주할 것인가? 또 다시 모험을 감행할 것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대학 학비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이 집사님의 마음속에는 다시 “안주할 것인가? 모험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있었을 것입니다.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하버드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요청하면서 입학원서를 냈다고 합니다. 미국 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하며 입학원서를 낸다는 것은 합격• 불합격을 개의치 않는다는 뜻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이 집사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편 126:5)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는데 생활비를 포함한 전액을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답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안주할 것인가 모험을 할 것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안주(安住)란 술안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을 보면 “한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삶.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함.”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험(冒險)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함. 또는 그 일.”이라고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란 이 집사님의 경우처럼 안주해도 위험부담 없는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문제 있는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모험을 할 것인가 결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런 상황이 나옵니다. 그냥 그대로 안주해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육지로부터 10리쯤 떨어진 호수 가운데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9시간 이상을 죽을힘을 다해 풍랑과 바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무서워 소리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을 물 위로 오라고 하십시오.” 만일 주님이시거든은 의심이 아닙니다. “과연 주이시므로” 뜻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셨다는 확신이 서자 그도 그와 같이 행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모험적인 신앙으로 나아가는 장면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입니다. 

확률적으로 볼 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 볼 때, 이성적 판단을 해 보았을 때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풍랑이 일고 바람이 거센데 바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차라리 폭풍과 풍랑으로 고생한다 해도 배에서 안주하는 것이 훨씬 상식적이고 미래가 보장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하고 조정이 가능한, 즉 우리가 우리의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모험을 감행하겠습니까? 


1. 우리는 말씀 붙들고 모험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때 “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예”하는 것이 모험적 신앙입니다. 말씀 붙들고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모험적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노아를 보십시오. 한 번도 홍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내리니 방주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땡볕에 방주 짓는 노아를 조롱하듯 쨍쨍 내립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안주하지 않고 말씀 붙들고 모험을 감행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 즉 메소포타미아는 문명 발생 지역입니다. 그곳에 안주하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 때 그는 안주 보다 말씀 붙들고 모험적 신앙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베드로도, 바울도 말씀 붙들고 모험적 신앙의 길을 택했습니다. 순종의 모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험의 출발점은 단순한 자기 충동이나 야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라”하심에 순종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주님의 허락,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험입니다. 우리 생애에 가장 큰 모험은 하나님께 '예'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은혜에 충만하여(?) 한강을 건너기로 하였답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고 하셨고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 강을 맨발로 건너기로 한 것입니다. 물위로 한발 내어 딛었을 때 물위로 걸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청년은 그만 물에 빠져들어 실망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 따지듯 물었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는데 저는 기도하고 은혜도 충만한데 왜 물에 빠지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이 청년의 물었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그러니까 빠지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험적 신앙으로 나아갈 때 욕심 붙들지 말고, 말씀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험을 감행한 모험적 신앙인은 한결 같이 말씀 붙들고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기 원하시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될 뿐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고맙지만 전 모험을 원치 않아요!"라는 대답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 전 안정적인 것을 원합니다. 전 예측 가능한 것을 원합니다. 전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전 제 맘대로 조정하는 것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 고맙지만 모험을 원치 않아요!"라는 말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을 원하십니다. “주여 말씀 하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라는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모험을 할 때 늘 위험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노예가 되면 모험을 할 수 없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라]라는 책을 쓴 벤 카슨 박사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위험에 미리 겁먹지 마라. 둘째 감수할 만한 위험을 선택하라. 셋째, 실행에 옮겨라”라고 말합니다. 벤 카슨 박사는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에 성공한 분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빈민가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안주하지 않고 모험적 신앙으로 인생을 도전했습니다.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성형외과, 종양학과, 소아과 교수이자 소아신경외과 과장이 되었습니다. 아주 모험적 신앙을 가지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매일 뇌와 척수를 다루는 위험한 수술에 도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환자의 생사를 다루며 불투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산고의 고통 없이는 숭고한 탄생도 없듯이, 위험에 도전하지 않으면 짜릿한 성공도 맛볼 수 없다. 미지의 세계로 항해를 나선 콜럼버스, 노예해방선언을 공포한 링컨 대통령, 첫 비행을 시도한 라이트 형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의 아이젠하워를 보라. 성공의 크기는 위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최선보다는 최악의 결과를 두려워한 나머지 무조건 위험을 피하려고 한다. 위험을 피하는 방법에만 익숙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방법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데니즈 베커라는 열세 살 소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질 지속 상태'의 병에 걸렸답니다. 지속적인 발작 상태로서, 두 달이 넘도록 발작이 멈추지 않고 있었답니다. 발작 때문에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기관절개술을 받은 탓에 몇 달째 말도 못하고 있었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이였는데 발작이 시작된 후로, 미국 전역을 돌며 여러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았으나 상태는 계속 악화되어만 갔답니다. 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일부 신경과 의사들은 이 환자에게 대뇌반구절제술을 시도하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미친 짓이라고 여겼답니다. 뇌 중에서도 특히나 다루기 힘든 부분이고 지속적인 발작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아주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며칠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장 반대했던 사람이 장기간의 국제학술회의에 참석차 해외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그는 부모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대로 놔두면 데니즈는 죽습니다. 이 수술을 하더라도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술을 하면 적어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부모가 동의하고 모험을 감행하여 수술을 하였는데 아이의 발작은 멈추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일을 할 경우 예상되는 최선의 결과는? 이 일을 할 경우 예상되는 최악의 결과는? 이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최선의 결과는? 이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최악의 결과는?”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감수할 만한 위험을 선택하고 모험을 감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원하면 어떤 위험이 있어도 모험을 감행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말씀이기 때문에 사자굴과 풀무불 속에서도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에스더는 말씀이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 마음 먹고 죽음의 위험을 예측하면서도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그 때 자연 법칙도, 상식도, 이성도 초월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다 위를 걸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험을 감행하는 자에게 새로운 세계는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특별한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며, 자신의 백성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왕국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험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 일에 우리가 예로 동참하면 상상을 초월할 경험과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에 모험적 신앙으로 예로 동참하니까 그 홍수 가운데 살아나는 경험을 합니다. 모세가 모험을 감행하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의 사람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모험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은 역사 속에 있었던 상륙작전이 500번 가운데 단 한번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만 성공했다고 모험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가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모험을 감행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콜롬보스는 모험을 감행하여 신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1492년 당시에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이 유행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지구가 둥글다는 확증을 얻기 위하여 모험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를 물 속에 던지려는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콜롬부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대서양을 횡단하면 반드시 육지가 있는데 하나님은 이 큰 목적을 위하여 만인 중에서 나를 택하신 것이다."라고 외치며 121명의 선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인 라이트 형제는 자기들의 몸을 공중에 내던지는 모험을 한 끝에 비행기를 발명했습니다. 벤자민 플랭크린이란 사람도 벼락에 맞아 죽을것만 같은 위험속에서 모험을 감행하여 뇌성벽력이 치는 하늘에 대담하게 연을 띄워서 전기를 발견했습니다. 인류역사를 볼 때 큰 모험을 감행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좋게 만들고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모험함으로 신비를 체험했지만 계속 걸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물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바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속으로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씀 붙들고 모험적 신앙으로 나아갔다면 끝까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 주변에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바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세상 바람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과거에 집중하게 합니다. 타인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신앙인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예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핵심에 집중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주크와 제임스 앨런은 10년 동안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핵심사업에 집중한 회사였다고 합니다. 핵심에 집중한 회사가 지속적인 수익을 올리며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에게 집중하면 실패합니다. 인간에게 집중해도 안 됩니다. 환경에 집중해도 안 됩니다. 목사에게 집중해도 실패합니다. 결국 실망합니다. 제도나 교회의 규모나, 프로그램에 집중해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 집중하지 않고 풍랑을 바라볼 때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8)"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폭풍 가운데 찾아 와 폭풍을 잠잠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오늘날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고 말씀해 주십니다. 레이놀드 W 그린씨는 말하기를 "인생에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고난과 슬픔이라는 보자기 속에 쌓여서 온다"라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 인생길에 폭풍이 다가 옵니다. 폭풍 가운데 괴로워하며 노를 저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고 도망간 아담과 하와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힘겨운 싸움을 하면 버립니다. 폭풍을 만나면 다 도망갑니다. 회사도, 가정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폭풍을 만난 사람을 찾아 오십니다. 마지막 희망 아들이 죽고 절망가운데 처한 나인성 과부에게 예수님은 찾아가 주십니다. 열두해 혈루증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여인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으며 사는 삭개오를,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씨병 환자를 예수님은 찾아가십니다. 

폭풍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폭풍을 잔잔케 해 주실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폭풍을 만나면 사람들은 자꾸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상대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환경에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는 우리 주님께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간증이요 이것이 나의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아멘 (204장 3절)”


3. 우리는 문제보다 더 큰 믿음으로 모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면서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큰 믿음의 아니라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문제를 이길만한 믿음입니다. 문제에 정복되는 믿음이 아니라 문제를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결국 모험적 신앙으로 모험을 감행했지만 실패한 이유는 그의 마음속을 움켜잡은 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험 신앙을 가지고 모험을 감행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지고 모험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바다 체험을 두 번이나 한 사람입니다. 눅5:1-11에서 물고기 잡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 보았으나 그 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를 말을 할 때 그 말씀 붙들고 그물을 던지지 그물이 찟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폭풍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 진 것입니다. 
마8:23-27을 보십시오. 폭풍을 잔잔케 하는 체험을 이미 한 사람입니다. 폭풍속에서 주무시던 주님께서 바람을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보며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위기를 당하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성경에 보면 모험적 신앙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믿음으로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모두가 믿음으로 모험적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라고 말씀합니다. 모험적 신앙으로 나아가면서 믿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9:29).

믿음은 불가능한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도응답의 열쇠입니다.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집니다(마 21:22). 믿음은 성취의 비결입니다. 믿음은 소원을 현실로 만들어 줍니다. 믿음은 기적을 위한 기초입니다. 믿음으로 한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은 인생의 성공을 가져옵니다.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벧전 1:7). 칼빈은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다주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주는 수송 파이프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모험적 신앙으로 살다가 위험이 닥쳐왔다고 믿음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말씀 붙들고 가지만 때때로 어려움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험적 신앙으로 가나안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모험적 신앙으로 갔지만 마라의 쓴물을 만났고, 요단강을 만났고 광야를 만났고 여리고성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창창 대로가 열려야 할 텐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느냐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이런 폭풍을 주었습니까? 결국 우리는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폭풍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유령이라고 무서워 떤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고 이제 진정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만큼 큰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 병을 났게 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것 특별하기는 하지만 선지자들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정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폭풍은 믿음의 테스트요, 믿음 키우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큰 믿음을 가지고 성공적인 모험을 하시길 원합니다. 믿음이 결국 이깁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97장 1절)”

신앙적 모험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미국 시카고대 정신생물학연구소의 소냐 카비겔리 박사에 의하면 모험을 겁내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합니다. 쥐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니까 모험적인 쥐들에 비해 평균 20% 짧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이나 환경과 만났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며 이 때문에 일찍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부부관계가 순탄치 못하든, 질병으로 두려워하든, 엄청난 빚이나 우울증에 눌려 있든, 불확실한 미래를 보며 겨우 앞가림만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든, 하나님의 손을 따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 땅으로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모험이든지 힘들지 않은 모험은 없을 것입니다. 위험부담이 없는 모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험은 큰 불편과 희생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험의 끝에는 엄청난 상급이 놓여 있습니다. 안주하기 보다는 모험적 신앙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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