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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죽는 사람 (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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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는 사람 (고전 15:31)


성경을 차례대로 한 번에 한 장씩 설교를 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주로 수요기도회 때나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때 그렇게 하곤 하였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참 많은 은혜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본문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차례대로 성경을 읽는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그때, 그때 마다 꼭 적절한 말씀들이 주어지는지 감탄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처음부터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막막한데 그렇다고 다른 성경을 찾아 읽을 수도 없으니 그날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씨름하면 기막힌 은혜들이 주어지곤 했었습니다.

창세기 23장을 강해할 때였습니다.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는 것과 남편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서 매장하였다는 이야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고 은혜를 받고 은혜를 끼치는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참 막막한 본문을 가지고 대책 없이 씨름하다가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몇 살에 죽어 어디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정확하게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가 내가 한동안 나의 죽음을 잊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것이 지혜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의 뿌리는 자신의 죽음을 잊고 사는 것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때 지혜로워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예날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 종에게 자신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제일 먼저 ‘대왕님, 대왕님도 언젠가는 죽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들으면 아침부터 재수 없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말이요 소리였습니다. 우리도 알렉산더 대왕과 같이 날마다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잊지 않고 살아야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잘 산다’라는 말과 ‘잘 죽는다’는 말은 같은 뜻이고 같은 말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을 떠나 잘 사는 법은 없습니다. 잘 죽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잘 죽지 못하면 절대로 잘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우리 말 중에 ‘죽기 살기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 속에 죽기로 살아야 잘 산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공부할 때 한 번 죽어야 합니다. 공부할 때 죽지 않으면 평생 죽어 살아야만 합니다. 공부할 때 잘 죽은 사람이 남은 평생을 남보다 더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공부할 때 일하라고 하고 일할 때 공부하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이 말에 속으면 평생 바보가 됩니다. 저는 사탄에게 속아 공부할 때 열심히 일했습니다. 저는 일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공부는 나를 위하여 하는 것 인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공부해야 할 때 죽도록 공부하는 것을 놓쳤습니다.

공부할 때 죽도록 공부하는 것은 놓쳤지만 다행이 일할 때 죽도록 일하는 것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교회 일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일도 일은 꾀부리지 않고 참 열심히 하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죽기 살기로 일은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은 일할 때 꾀 부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나름 열심히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부할 때도 일할 때처럼 죽기 살기로 했었다면 지금보다 더 유용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하는 후회를 해 보지만 그것은 이미 늦은 일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꾀 부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꾀가 왜 어리석음이 되는지 아십니까? 꾀는 죽는 일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잘 죽어야 잘 사는데 꾀는 죽는 것을 무조건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복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보면 교회 일에는 꾀부리지 않고 충성하나 세상 일에는 꾀부리고 사는 사람이 있고, 세상 일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 교회와 교회의 일에는 꾀부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일이든 세상 일이든 하여튼 꾀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의 일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고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도 꾀부리지 말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꾀는 죽음이고 죽음이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또 죽여야만 하는, 꼭 죽여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습관과 좋지 않은 성격입니다. 죽어야만 하는 잘못된 습관과 고쳐야만 하는 좋지 못한 성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 이하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탄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죽여야 할 잘못된 습관과 고쳐야만 하는 좋지 못한 자신의 성격을 죽이기 위하여 애를 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죄된 습관과 옳지 못한 성격에 대한 아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싸워 그것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의에 대하여 살 수 있는데 우리는 죄와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고 대충대충 싸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복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된 일입니다. 제주도에서 집회를 할 때 어느 집사님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담배를 일곱 여덟 갑을 피우는 골초셨답니다. 손에서 담배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길 거리에서 갑자기 목사님을 만나게 될 때 너무 급해서 담배 불도 끄지 못한 채 불 붙은 담배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어 옷을 태운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통곡을 하며 울었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끊어지지 않는 담배가 너무 속상해서 하나님께 ‘저 아무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담배 하나를 못 끊습니다’하고 소리를 치며 통곡했답니다. 그 날로 담배가 끊어졌답니다. 끊은 것이 아니라 끊어진 것입니다. 20년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잊혀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습관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곡이 하나님께 기도로 상달되어 그것을 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뒤 끝은 없습니다. 화를 잘 내기도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풀기도 잘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그래도 뒤 끝은 없어’라는 말을 잘 합니다. 자기는 뒤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합리화하려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며 끊고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평생 뒤는 깨끗하지만 앞은 깨끗하지 못한 부끄러운 삶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합리화하지 말고 죽어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바울처럼, 제주도의 어느 집사님처럼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 살 수 있습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도 10여년이 넘은 이야기인데 잊을 수 없습니다. 초창기에 학교가 참 어려웠습니다. 특히 총장님이 참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어느 날 총장님이 학교일로 인간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집에 들어오셨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을 일을 당하고 들어오셨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하시고 코까지 골며 주무시더랍니다. 사모님이 하도 그 모습이 신기해서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잠이 오시느냐?’고 물으셨답니다. 총장님의 대답이 정말 걸작이셨습니다. ‘죽었는데 뭐’ .......

저는 그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믿음으로 자신의 성질을 죽이신 분입니다. 나는 말로만 죽었는데 그 총장님은 믿음으로 정말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내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의 잘못된 성질과 성격과 습관을 죽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잘 죽어 잘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은 잘 죽어 잘 산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원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자기를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끓어 안고 눈물로 저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굴 속에서 만났지만, 인간적으로 단칼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믿음으로 요셉처럼 원한을 죽여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 죽어 잘 산 사람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느보산에 올라가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과 성공에 대하여 죽을 줄 알았던 훌륭한 신앙의 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이전에도 모세 이후에도 모세만한 선지가가 없었다라고까지 칭찬하셨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저는 모세의 느보산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큰 일을 이루고 느보산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어 훌륭한 삶을 살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기를 죽이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가 삶으로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으로 삶의 목적과 꿈을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이루는 것을 꿈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자신을 위하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부활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입니다. 거기에는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말로 잘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를 잘 사는 나라라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말하지만 세상엔 잘 사는 나라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잘 사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뿐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려면 세상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죽지 못해 늘 죽어 삽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좇아 다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고 산 사람입니다. 부활 후 누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알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삽니다. 날마다 살아야 영원히 삽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정욕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적으로 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잘 못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도 잘 죽어야 잘 삽니다. 부자의 죽음은 나눔에 있습니다. 피 같은 돈을 세상과 하나님을 위하여 흘리는 것이 부자의 죽음입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또 남보다 잘 지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며 예수를 떠나갔습니다. 영생 즉 진정으로 잘 사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지만 세상적으로도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적으로 성공도 한 것 같습니다. 어디를 가든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 봅니다. 소위 제법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크게 가난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해졌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말하자면 저는 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생명인 줄 알고 붙잡고 있으면 그것도 놓치고 보다 귀한 생명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성공도 죽이고, 유명함도 죽이고, 가지고 있는 재산과 물질도 잘 죽여야 할 과제가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도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울처럼 부활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참 힘들지만 하나, 하나 나의 세상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진정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힘과 기회를 나를 위하여 쓰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 쓰면서 관제처럼 남은 나를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쏟아 붓고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살려고 하면 죽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려고 욕심을 부리면 부릴 수록 하나님 나라에서 못사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처럼 죽어야 삽니다. 날마다 죽어야만 날마다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욕심 부리며 살아올 때 바울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어떻게하면 남보다 더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잘 죽어야만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를 잘 믿어 세상에서 그리고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잘 죽어 잘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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