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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길 바른 선택 (갈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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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길 바른 선택 (갈 5:16-26) 

 
한라산 꼭대기에는 백록담이 있고 백두산 꼭대기에는 천지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물론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백두산 동쪽에는 두만강이 있고 백두산 서쪽에는 압록강이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리고 또 있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있는 천지에서부터 두만강과 압록강이 시작된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러니까 백두산 꼭대기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전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동편으로 떨어지면 두만강 물이 되어서 동해로 흐르게 되고, 반대로 조금만 서편으로 떨어지면 압록강 물이 되어서 황해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차이입니다만 그 미세한 차이가 결국 동해냐 황해냐 하는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차이도 이런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느냐 육체를 좇아 행하느냐 하는 차이는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겠습니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늘 본문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뒤집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어떤 신앙상의 책임을 못하면 그것은 자기가 게으르고 나태했기 때문이라고까지는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내가 비록 열심이 없어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를 않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은 매순간마다 저절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잠시 안하고 있는 것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 쪽에서 전혀 다른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플러스도 아니고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 상태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로 가지 않는 모든 순간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너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성령을 좇아야 하지만 하나님 반대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반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특별히 절간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우상단지를 섬기고 맨 날 술 먹고 노름하고 틈만 나면 열심히 교회를 훼방해서 거기에 대한 죄 값으로 결국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만 안 믿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열심히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하지만 자기의 신앙을 까먹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것 없이 그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구원 얻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전부 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구원은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구원을 얻은 천국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혼만 구원을 얻었고 우리의 육신 -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 몸뚱아리는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육신의 소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한 몸 안에 두 가지 상반되는 욕구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는 싶은데 생각만큼 잘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 집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시험 때만 되면 잠자리에 들면서 깨워달라는 얘기를 합니다. "엄마! 나 내일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야 하니까 새벽 다섯 시에 깨워주세요" 하고는 잠을 잡니다. 그래서 다섯 시에 깨워주면, 벌떡 일어나서 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0분만, 10분만 하면서 한사코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졸린데 왜 그러느냐고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정작 아침이 되면 큰일났다고 화들짝 놀라면서, 깨워달라고 했는데 왜 안 깨웠느냐 엄마 때문에 시험 망쳤다고 도리어 화를 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깨워달라고 부탁한 것이 진짜 자기 모습입니까 아니면 졸린데 귀찮게 왜 깨우느냐고 짜증을 부린 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 몸 안에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욕구가 같이 섞여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욕구 중에서 과연 어느 욕구를 따라가느냐 하는 문제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고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해라!" 하고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면 문둥병자가 깨끗해집니다. "바다야 잔잔하라" 하면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면 죽었던 사람도 도로 살아납니다. 그런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굳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원하노니 너희 모두는 성령 충만하게 될지어다!" 한 말씀만 하시면, 문둥병자가 낫고 바다가 잔잔해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처럼 모든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될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으시고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고 말씀하셔서 성령을 좇아 행할 책임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닙니까? 혹시 만들었다고 해도 아주 보기에 흉칙하게 만들어서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게 했으면 될 것 아닙니까? 선악과나무를 아주 높게 만들어서 사람 손이 닿지 않게 했어도 될 것이고, 아니면 선악과나무 주변에 높은 담을 쌓던가 깊은 계곡을 만들었어도 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려고 손을 뻗는 그 순간에 하늘에서 천둥만 쳤어도 선악과를 따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떻게 해서 먹지 못하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저 인간들의 탐욕에서부터 선악과를 보호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었다면 하나님으로서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선악과를 지키는 것이 뭐 그리 까다로운 문제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선악과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의 책임으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따먹게 되면 감당 못할 일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따먹을 수 없는 그 어떤 장치를 해두신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으로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는 얘기가 바로 그런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직 성령을 좇아 사는 것 말고는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게 만들지를 않으시고 우리에게 책임으로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아담이 불순종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고 엄히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을 만큼 선악과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맞아, 그렇게 해야 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몸뚱아리가 육체의 욕심에 너무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 죄인이다 보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죄를 짓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죄 된 본성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만큼 익숙해있는지 제가 잠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집 아이가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보고 있는데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 부모가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공부하려면 제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관둬라"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 "공부하려면 제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관둬라" - 공부를 하든지 하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왕 하는 공부, 제대로 정신을 집중해서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하, 내가 공부한답시고 폼은 잡았지만 사실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구나" 하고 자신을 뉘우치겠습니까 아니면 그나마 하던 공부를 그만두겠습니까?

저는 아직 제대로 애를 키워본 적이 없습니다만, 아마 자녀를 키우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일 겁니다. 무슨 얘기를 하면 꼭 삐딱하게 반응합니다. 어른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듣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얘기가 자기한테 꼭 필요한 아주 중요한 얘기인 줄은 모르고 무작정 세대차이라고 합니다. 

또 얘기의 내용에 관계없이 무작정 잔소리한다고 그러고, 부모님은 자기를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요컨대 부모는 자녀가 훌륭해지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아이들은 이 다음에 훌륭해지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편한 것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만 이 얘기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모습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 재정을 받아 보는 집사님 말입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10년째 재정을 보고 있는데, 하여간 제가 보기에도 신앙생활을 참 아름답게 합니다. 

그 집사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재정을 맡아서 교인들의 헌금을 계수하다보면 은근히 짜증날 때가 있답니다. 언제 짜증이 나는고 하니, 1년 내내 십일조 액수가 똑같은 교인을 보면 은근히 짜증이 난다고 합니다. 십일조 헌금은 말 그대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헌금입니다. 

그러니까 장사를 하던 봉급생활을 하던 십일조 액수는 매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야 정상입니다. 장사를 하면 장사가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될 때가 있으니까 십일조 액수가 그때마다 달라져야 하고, 봉급생활을 해도 보너스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때마다 그 액수가 달라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한 번 5만원을 십일조 하면 1년 내내 5만원이고 한 번 10만원을 십일조 하면 1년 내내 10만원입니다. 1년 내내 똑같은 것이 아니고 3년 내내 똑같고 5년 내내 똑같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십일조 헌금 봉투에 넣어서 헌금은 했지만 사실은 십일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그럴 수는 있습니다. 십일조를 아예 안 하려니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려니 너무 아깝고 그래서 적당하게 십의 일조가 아닌 이십의 일조나 삼십의 일조를 십일조 헌금 봉투에 넣어서 헌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사실을 지적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자기의 잘못된 십일조 습관을 고치겠습니까 아니면 그나마도 아예 안 해버리겠습니까? 아마 자기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하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래도 십일조를 아예 안 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안 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그렇게 제대로 못할 바에야 아예 깨끗하게 안하고 말지 구차하게 무슨 짓이냐?"고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누가 하나님 쪽으로 더 가까이 오는가 하는 것에 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들끼리 키를 재면서 누가 자기보다 못한 지에만 열을 내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비유입니다만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다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교회에서 다툴 수 있느냐?"가 아니고 교회에서조차도 다툴 수 있을 만큼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보다 죄에 더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투고 나서 예배를 드리려고 앉아있으면 예배가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분이 안 풀려서 씩씩거리면서 무슨 예배를 드립니까? 그러면 이런 경우에는 "내가 예배를 드린답시고 예배당에 앉아는 있는데 내 마음은 전혀 하나님을 예배할 준비가 안 되어 있구나" 하고 자기를 다스려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기분으로 예배는 무슨 예배냐? 저 아무개 때문에 예배도 못 드리겠다" 하고는 떳떳하게 예배를 빼먹고 자기의 혈기에다가 예배를 안 드린 책임까지 묶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마땅히 자기 마음을 추스려서 하나님 쪽으로 한 걸음 옮겨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하나님 반대쪽으로 더 빨리 가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자기한테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차!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구나"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미처 챙기지를 못하는 바람에 공연한 오해의 소지를 남겼구나" 하고 자기를 추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을 뜯어고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고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모처럼 마음잡고 열심을 부리다가도 이런 일만 만나면 기꺼이 하던 일을 내팽개칩니다.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안하고 말지, 그 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를 좇는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바른 것인지를 도무지 모릅니다. 그만큼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그만큼 죄의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들을 많이 하지만 자기 자식의 잘못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하물며 자식에서 한 칸 건너 손자만 되어 보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 손자는 언제나 천재입니다. 그렇게 똑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식도 제대로 판단이 안되고 자기 손자도 제대로 판단이 안됩니다. 그럼 하물며 자기 자신이 지금 옳은지 틀린지는 제대로 판단되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예뻐보이고 자기 손자가 예뻐보이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언제나 옳은 것 같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술에 취한 줄을 모릅니다. 자기는 똑바로 걷고 있는데 길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는 자기 친구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면 "어허, 이 친구 취했구만......" 하고 그 사람이 취한 것은 압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는 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에 젖어 있는 줄은 모르니까 자기가 지금 성령을 좇아 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있는지 제대로 분간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분간하는 법이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19-23)

19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하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에 속한 일은 뚜렷하게 구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이 현저하다는 얘기는 성령의 열매는 현저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제대로 구별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자신있게 "이건 이래야 돼!"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그것은 주로 틀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험을 볼 때 흔히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시험 문제가 쉽게 나왔다고 희희낙락하는 학생들은 주로 시험 못 본 아이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무슨 시험이든지 시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는 함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함정마다 다 걸린 학생들은 자기가 틀린 줄도 모르고 시험 잘 봤다고 히히덕거리는 것이고, 이것인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인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는 학생들이 오히려 시험을 잘 본 학생들입니다.

하다못해 이 세상에서 학생들이 보는 시험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성령을 좇고 있는지 육체를 좇고 있는지 자신있게 얘기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자기 생각에는 아무리 콩을 심은 것 같아도 실제로 팥이 나왔으면 그것은 콩을 심은 것이 아니라 팥을 심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지금 육체를 좇고 있는지 성령을 좇고 있는지도 그 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로 인하여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을 좇아 행한 결과이고, 아무리 그럴 듯한 일을 했어도 그 일로 인하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이런 것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을 좇아 행한 것이 아니고 육체를 좇아 행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자기의 뺨을 때렸습니다. 이 경우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분을 안으로 삭히면 성령의 열매 중에서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자기가 뺨을 맞았다는 이유에 근거해서 화를 내면 "분냄" 이라고 하는 육체의 일을 범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틀리냐를 논리적으로 따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리는 죄에 오염된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결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콩이 나왔으면 콩이 심겨진 것이고 팥이 나왔으면 팥이 심겨진 것입니다.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성령의 열매가 맺힌 것을 보니 내가 성령을 좇아 행한 모양이다" "내 생각에는 내가 잘한 것 같은데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도리어 육체의 일만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잘못한 모양이다" -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사과나무 같아도 가을이 되어서 배가 열렸으면 그것은 사과나무가 아니고 배나무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배나무 같아도 사과가 열렸으면 그것은 사과나무입니다.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결과를 보면 성령을 좇았는지 육체를 좇았는지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얘기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그 말씀을 기준으로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이라면 그것을 돌이키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필코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어리석음이 적어도 우리 중에는 아무에게도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모든 신앙 여정 속에서 더욱 더욱 풍성한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모두를 축복해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해성의 성도님들은 성령을 쫓아 행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풍성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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