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누구인가? (갈 2:20)

  • 잡초 잡초
  • 505
  • 0

첨부 1


나는 누구인가? (갈 2:20)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배우는 것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까? 예수를 본 받는 것입니까? 예수처럼 사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겁니까? 다 귀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오순절날 성령받을 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비로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곧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A. W. 토저 라고 하는 신학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는 한 방향만 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를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괴로와 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과거는 없습니다. 내세울 것도, 위축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한평생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람에게는 아무 의도 공로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알려면 십자가에 담긴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습니까? 

1. 십자가는 나의 과거를 장사지낸 자리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먼저 십자가를 쳐다볼 때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요 내 대신 예수님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데 그리스도가 대신 죽었습니다. 아직 나는 살아있으나 의미상으로 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내 대신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체험이 확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나를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예요. 나의 존재는 나의 인물도 아니요 나의 능력도 나의 지능도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가 계시되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벌써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여러분 자기를 이겨보려고 했습니까? 가끔은 그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마음을 비우세요." 마음이 비워집니까?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을 비웠다고 큰소리 치지만  남보고 비우라고 하지 자기는 안 비우더라고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이기는 일이 정말 가능할까요?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내가 확인하는 필요합니다. 

또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어둡지만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환하게 관조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진리를 이렇게 정리해줍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죠.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살아서는 안 되는 죄인이요.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아요.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알던 것을 다 내려 놓습니다. 자아를 다 내려 놓습니다.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 없어요. 자기 감정도 내려놓습니다.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무슨 할말이 있어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그저 할 말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다'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장사지냈다는 것을 고백할 뿐입니다.
  
특별히 갈 2:19절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여러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율법 앞에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 내가 죽어야 됩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도 감옥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는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자를 정죄합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질 때, 내 영혼이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를 죽였습니다. 쳐다볼 때 나는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 십자가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새롭게 죽음을 확인해요. 마틴 루터는 이것을 받아서 좀더 깊은 말씀을 합니다. 나는 날마다 침례받노라.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율법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우리는 매일 같이 새롭게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날마다 십자가에 자기를 복종하고 자기를 부정할 때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자아를 못박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인생을 사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가 그리스도가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안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말해 내가 충만해서 그리스도가 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가 살아나십니다. 

한국 교회사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김익두목사님이 본래 신천 장의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아주 소문난 깡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전도사가 되어서  불같이 열심히 끓어올라 매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얼마 전까지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이러고 다녔단 말이에요.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죽었나 살았나 한번 시험을 해보자.' 문 앞에 와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는 걸 설거지물을 얼굴에다 확 뿌려버렸어요. 그리고 "죽었나 살았나 보자"했더니 김익두 전도사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죽었으니 네가 살았쟎느냐"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십니다. 내안에 내가 살면 그리스도가 사실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살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불같이 화를 냈어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심을 부렸어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에 목숨을 걸었어요. 안 그렇습니까? 이제 십자가에서 나는 이미 죽었어요.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비위를 건드리든지, 감정에 불을 지르든지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벌써 죽고 예수가 사시기 때문이예요.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내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3. 십자가는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는 목적은 무엇이며 사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표현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크고 놀라운 사랑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몸을 찢으면서까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 되는대로 살면 안되지!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살면 안되지!  이렇게 시시한 것에 인생을 낭비하면 안되지! 나도 사랑해야지 그리스도께 풍성한 사랑을 받았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부어주며 살아야겠다. 하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또한,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우리는 '사랑 할 때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크면서 가끔 속상할 때 그래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해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는 이것 참 깜짝 놀랄 일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얼마나 사랑하고 정말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데 이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거예요. 왜요? 사랑의 방법이 다르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할 때, '아! 하나님의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건강해야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사업도 잘 돼야지. 그리고 직장에서 승진도 잘 되어야지, 세상에서도 유명해지고 잘 살아야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이야, 한평생.'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그게 맘에 와 닿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철이 들면서 부모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듯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고 느껴지는 은혜가 임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속에 엄청난 사랑의 계시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의 감격함.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받은바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격해서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표현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카이스트에서 28세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하진이라는 이가 있어요. 대덕에서 연구원생활을 하는데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인 연구원들의 생활이 퇴근하면 서양화파, 동양화파로 나뉘어집니다. 서양화파는 카드로 노름하는 것이고 동양화파는 화투로 노름하는 것입니다. 동양화파에 들어가 날마다 광이나 팔면서 세월을 보내는데 어느날'내가 이래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는 나가지만 늘 졸다가 돌아오는 생활의 연속이었는데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장 마지막절에서 테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으로 가려고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뭅니다. 그 땅이 맘에 든거죠. 테라는 하란에서 205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테라의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태라와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잇었던 것입니다.

최하진 박사가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열심히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중국의 대학생들을 위해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 연구원으로의 출세, 화려한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중국으로 떠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저들을 사랑합니다. 방학동안 자기의 집을 오픈하여 대학생 열 두명을 초청하여 함께 지내며 영어를 가르쳐 줍니다. 부인은  작은 집에서 어린 딸과 함께 지내며 젊은이들을 밥해먹이고 빨래해주고 청소하며 그고생을 기쁨으로 감수합니다. 

어느날 한 학생이 묻습니다.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부담스럽도록 잘 해주는 겁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살던 나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큰 사랑을 부어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으로 나는 행복해져서 내가 받은 사랑을 너희들에게 표현하고 싶어서 이렇게 온 것이다. 너희도 부담스러우면 나에게 사랑을 받고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베풀면 된다."  그렇게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부인이 어느날 거울을 보다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해졋어요." 섬기느라 너무 바쁘다 보니 관리할 시간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행복해요. 이 주근깨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잖아요."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안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과거는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지냈나요?  여러분의 현재속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사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십자가에서 표현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이끌고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정체성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