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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세우심 (삼하 3:3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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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세우심 (삼하 3:31-5장) 
 
 
지난주에 이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넬을 피살 소식을 접한 다윗의 첫 번째 반응은 살인자 요압을 저주한 일입니다. 시편에도 다윗이 원수들을 저주한 시들이 있는데, 원수도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저주를 한 것은 합당치 못하다는 비판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이 저주들은 ‘사적’인 적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29)라는 본문의 선언도 공의의 실행이 핵심이지요. 하나님 나라에서 공의의 실행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신원하실 것만 말하지 않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실 것도 동시에 말합니다.

다윗의 두 번째 반응은 아브넬의 죽음을 “애통”(31)해 하면서 “애가”(33)를 짓고 ‘금식’(35)한 일입니다. 왕이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상주처럼 행한 것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음을 알려줍니다(31). 사무엘서 기자는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36-37)고 했습니다. 당시 아브넬의 죽음을 다윗이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진실한 행동들이 의혹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한 것이겠지요(시 105:25).

다윗의 세 번째 반응은 공의의 집행을 하나님께 의뢰한 일입니다.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39b)고 했지요. 다윗은 요압의 죄에 대해 형벌을 집행함이 원칙이지만 현실적으로 공의를 실행할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능력이 미비한 상황에서 어설프게 공의를 집행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한다면, 공의가 서기는커녕 질서만 혼란해질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에 맡겼습니다. 신정왕국의 참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 때에 아도니아의 반란에 가입한 일을 계기로 요압이 제거되게 하셨지요(왕상 2:28-35).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39a)라는 고백 속에서 인간 왕의 한계를 봅니다. 다윗이 기껏 할 수 있었던 일은 요압에게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도록 명령하는 일이었습니다(31). 요압은 나중에도 개인적인 이권을 계산해서 압살롬과 아마사를 죽였는데(18:14; 20:10), 이는 그가 아브넬의 장례식에서 전혀 회개하지 않았음을 말해주지요. 본문의 사건은 원칙을 알지라도 원칙대로 살아낼 힘이 없고, 한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인간 왕의 무능성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능이 드러났을 때 감추려고 무리하게 권위를 부리기보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신정왕국의 진정한 왕이심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가 바르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기관인 교회도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3대 표지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권징을 실행할 힘이 부족한 연약한 교회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칙을 알지만 원칙대로 실행하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확실하게 ‘모’가 아니면 ‘도’라는 식의 비판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습니다. 충분히 공의를 실행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날이 올 것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갚으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나은 방편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태도라면 말입니다.

4장은 이스보셋의 군장인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침상에서 잠든 “이스보셋”을 암살하여 그 목을 다윗에게 가져왔을 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록합니다(4:1, 6-7). 암살자들은 밤새 약 95km를 행하여 다윗에게 찾아와서 자기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일로 보고합니다.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8). 하지만 그들은 자기 주인의 목숨을 팔아서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즉각 사형시켰습니다(11).

다윗은 ‘결과’가 좋은 것을 빌미로 ‘수단’은 정당화시키려는 자들을 용서치 않았습니다. 스스로 불의한 수단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의한 수단을 취한 자들이 가져다준 좋은 결과조차 은근슬쩍 반기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보면 폭군 옆에 간신들이 많아지고 성군 옆에 충신들이 많아지는데, 지도자가 어떤 사람을 대우해주고 어떤 사람을 처벌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세를 잘 파악하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거룩하지 못한 수단 사용에 뻔뻔한 사람들, 실상은 자기의 출세와 이익을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환영받고 존중을 받는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다울 수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목적’이라면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도 거룩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충분하지가 않고, 목적을 세운 ‘동기’와 ‘수단’까지도 거룩한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속으로는 내 미래를 함께 도모한다면 동기가 거룩하지 못하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들먹일지라도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같은 수단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도덕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의 파렴치하고 무서운 진리 왜곡이 더 이상 교회에 통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됩니다(5:1-5).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도 다윗은 이스라엘을 신속히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 혈통으로 보나, 입증된 지도력으로 보나,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보나 -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인정하기까지 기다렸지요. 다윗은 저희와 “언약”을 세웠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30세에 유다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다스렸던 다윗은 이제 온 이스라엘 왕이 되어 33년을 더 다스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무엘서 기자는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결정적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2).

그 동안 다윗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정책을 사용했고, 정략결혼도 했으며, 미갈을 다시 취하여 왕조의 정통성도 확보했지요. 사울의 집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우위도 유지하면서도 이스보셋 왕의 암살범들을 처형함으로써 북쪽 왕조를 끝까지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노력들 자체는 비판 받을 요소와 실효성 없는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다윗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으로 하여금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16절은 전체 이스라엘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도읍을 옮긴 일을 기록합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 족속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로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지요(출 23:23; 신 7:1-2). 그리고 이 기사 는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12)는 평가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임을 여러모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다윗이 유다 왕으로서 사울 집안을 견제하고 있을 동안에는 그냥 두었던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통일과 함께 침공해옵니다(17-25). 1차 전투에서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19)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19)는 약속을 받고 나가 “바알브라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고 고백했지요(20). 2차 전투에서도 “다윗이 여호와께 묻”고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25) 대승을 거둡니다. 이후 블레셋은 더 이상 팔레스틴 땅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 기사는 하나님 나라를 수호하고 유지하는 분 역시도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시편 37편 5절을 직역하면 “너는 여호와께 너의 길을 맡겨라. 그리고 너는 그분을 신뢰하라. 그러면 그분, 그분께서 행하실 것이다”가 됩니다. 맡기지 않고 내가 뭔가 행해보고자 했던 일은 뒤돌아보면 허물투성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그 최선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마치 더러운 누더기처럼 깨끗하지 못하지요. 다윗이 행동 중에 칭찬할 만한 일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 37:7)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참아 기다린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분의 뜻대로 순종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심으로 세워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한 악인들로 서로 피 흘리며 싸우다 망하게 막으셨고, 침략도 막으셨습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신뢰하고, 열심히 그분께 묻는 일이었지요. 또한 말씀에 순종한 후에 하나님께서 일하셨음을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고 감사하며 그분께서 일하신 것을 기념하며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주객이 바뀌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잠잠히 신뢰하고 그분께 맡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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