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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앞에 세워진 사람들 (엡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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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앞에 세워진 사람들 (엡 1:1-2)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야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낮은 산들을 바라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한없이 이어지는 산들을 보고 있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지난 번 백두산에서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산정에 올라서서 천지를 바라보고 또 그 주변을 바라볼 때 끝도 끝도 없이 펼쳐있는 그 황홀한 광경 앞에 정말 시인들의 고백처럼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학자들은 오늘부터 우리가 은혜 받고자하는 말씀, 에베소서를 이런 산꼭대기, 정상에 비유합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귀하지만, 우리가 에베소서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 마치 산 아래를 바라 볼 때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을 받는 것처럼,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장엄함과 천국의 진리를 발견하고 깊은 감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그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 왔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줍니다.(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 보면 아주 기본적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저자가 누구이며, 이 수신자는 누구이며, 이 편지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 누가 썼습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시도 된 바울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에베소서는 AD60년, 61년경,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비롯해서 감옥에서 기록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 네 가지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를 소개 할 때 쓴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시도 된 바울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나 바울은”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기록한 사도 중의 사도요, 위대한 기적을 일으켰던 사람이요, 세계 복음화에 기여했던 사람이요, 하나님이 높이 들어 쓴 위대한 종이 아닙니까? 누가 바울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 그것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기 다 알지 않습니까? 사울입니다. 

여러분, 사울을 아시나요? 사울을 알아야 여러분은 바울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가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었던 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오고 있습니다. 8:3절에 보면 “교회를 잔멸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딤전1:13절에는 “내가 전에는 헤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더니” 고전15:9절에 보면 “...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하는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그가 고백한대로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그가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을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 합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나 그 일을 맡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직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부인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사울이 어떻게 사도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변화되는 게 참 어렵습니다. 반대로 변질되는 건 참 쉽습니다. 여러분, 변화와 변질의 차이를 잘 아실 겁니다. ‘변화’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고, 반면 ‘변질’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변화는 어렵고 변질은 쉬울까요? 인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악해지기는 쉬워도 선량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지식으로 인간이 변화된다면 벌써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오히려 배운 사람들이 사악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배운 사람들이 큰 도둑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법과 제도로도 인간이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교한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가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예수를 핍박하고 당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교회를 잔멸한 자가 사도가 될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줄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혁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게 한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리의 노력과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전15:10절에 무엇이라 고백을 합니까?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이 죄가 많아서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고 그를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니까 그의 지난날의 죄악 된 삶 전체가 송두리 째 뽑히고 그 속에 새로운 영적인 갈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깊이 체험한 바울은 정말 한 생을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자기를 믿어주시고 또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의 그 파격적인 은혜 앞에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은혜를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를 매주 낮 예배 때마다 붙잡으면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룬 줄 알고, 내가 잘난 줄 알고 함부로 내 동료, 내 가족, 내 이웃의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 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병균이 들어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나는 아는 체하고 다녔지만, 내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부어 주세요” 이런 기도가 나의 삶을 다시 지배하기를 바랍니다. 

2.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기적을 가져다 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수신자인 에베소 성도들의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1절 하반절을 다시 보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성도들’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에베소라는 도시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유리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음행이 들끊고, 우상숭배가 가득했던 쾌락의 도시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신앙생활 하기 아주 힘든 도시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처럼 화려한 도시가 없습니다. 로마 당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신 로마로 불리웠습니다. 무려 2만 5천명을 수용하는 대 극장, 체육관, 음악당과 거대한 쇼핑상가와 대 목욕탕 시설이 있는 도시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도시의 겉모습일 뿐 이미 영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도시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여전히 세상 속에 있고 순간 순간 환경에 젖어 살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성도, 신실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가 다 능동적으로 쓰여진 단어가 아니라 수동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노력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신실한 자라는 칭호와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이들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성도라는 말은 ‘부름을 받다’, ‘분리된 삶을 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신앙을 지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은혜가 그들을 붙잡고 죄악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데 그토록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꽃 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에 대해 그는 1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in ChrisfL)! 그들이 이렇게 기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혁명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기적도 가져다 줍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성도로, 신실한 자로 인정받지 못하면 두 가지 치명적인 결과가 따르게 됩니다. 먼저, 우리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흥,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 모양인 걸 보면 하나님도 별 수 없구나. 예수? 뭐 대단하지도 않구나.’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자식이 함부로 대하는 부모를 공경하는 이웃 봤습니까? 부인이 무시하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웃을 보셨어요? 우리가 진지하게 믿지 않으면 우리의 태도를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이에요? 만약 내가 예수님을 적당히 믿는다면 내 자녀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여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모인 나 때문에 내 자녀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 때 또 하나 커다란 문제가 따릅니다. 바로 이 사회가 하나님을 추방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방법은 안중에도 없이 세상의 유행이나 풍조를 따라 살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현대판 무신론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날마다 의식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니까,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맙니다. 

「한국유리」창업자인 고 최태섭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정직한 기업을 경영하고 기부도 많이 한 기업인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6.25 전쟁 당시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아군이 1.4 후퇴를 할 때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도 피난을 가야 되는데,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있어서 얼른 갚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급히 은행에 가서 직원에게 대출금을 갚겠다고 했더니, 대출 장부도 없고 피난가야 되니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받으라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영수증을 떼어주고 받았습니다. 그 후 제주도로 피난 가서 사업을 했는데, 군부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단장이 그의 정직성을 보고 생선 납품을 요청합니다. 주문 물량이 자꾸 늘어서 부득이 큰 배를 구입해야 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은행으로 가서 대출을 요청합니다. 담보도 없고 전쟁 통이라 돈을 못 빌려준다는 답변이었습니다. 포기하고 나오려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1.4 후퇴 당시 대출금 갚은 것이 잘 정리됐는지 확인해 봅니다. 영수증을 제시했더니 은행원이 깜짝 놀랍니다. 반가워하면서 “바로 그 분이군요! 선생님은 은행가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어요. 은행장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은행장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무담보로 거액을 대출해 줍니다. 그 돈을 갖고 사업에 크게 성공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한국유리」창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고, 이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물질주의의 노예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돈 하면 누가 봐도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진짜 하나님의 존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면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차려요. 겉으로는 우리를 괴롭힐지 몰라도 속으로는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정말 있는 것 같다’ 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별된 소유, 곧 성도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갖고 거룩한 존재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존재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서로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저 사람이라면 신뢰할 만해”라고 인정받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 올바를 자의식을 가지고 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는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통계청에서 낸 2007년도 사망 통계 자료에 보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라고 합니다. 이 수치는 계소 작년에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작년에는 14000명 정도 하루에 34명 정도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고 합니다. 요즘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의 평안을 잃어 감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삶은 더 안락해지고 편안해졌는데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가 없을까요? 사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평안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평안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두 가지 주셨습니다. 바로 ‘은혜와 평안’입니다. 이 은혜와 평안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습니다.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시작하는 샘이라면 평강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시편에는 이를 설명해주는 한 폭의 그림이 있습니다. 시65:9절에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것이 은혜의 저수지입니다. 그 저수지로부터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케 대사”는 이것이 평강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시65:13절의 말씀처럼“ 초장에는 양 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혔으며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하고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처럼 평강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삶의 여건은 편해졌지만 우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병에 의해서 죽는 수보다 스트레스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음식은 좋아지고 생활은 편해졌는데, 사람들은 더욱 더 피폐해져 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음에 평안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축복을 빼앗긴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주님의 평강을 우리 마음 안에 누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평강을 주기 위해서 이 에베소서를 썼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혁명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싶으신지요? 이 메마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소낙비 같이 쏟아져서 하나님의 축복을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손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우리에게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와 에베소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얻은 계시의 모든 진리로 여러분을 권면하노니, 교우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놀랍게 변화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충만한 은혜 가운데 마음에 평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처럼 옥에 갇혀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평안이 사라지고 우울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은혜와 평강을 소유한 우리가 그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정치가들을 바르게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붙들어 주어야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으로 지친 사람들을 붙들어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은혜에 잠겨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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