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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사람으로 말미암아 (창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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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으로 말미암아 (창 18:32)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오정 즈음에 뜨거운 햇볕을 피해 바람이 잘 통하는 장막문에서 쉬고 있을 때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귀한 손님 세 분이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곧 천사들이요, 그중에 한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으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방문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여호와의 일행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달려나가서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인사하고 나서는 하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분별할 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 방문하신 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부인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종에게는 자신이 직접 고른 기름진 송아지를 요리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속하게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려다가 하나님을 대접하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소재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장막에서 이 말씀을 들은 사라는 웃으면서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이미 경수가 끊어져 버린 지 오래된 사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기쁜 것이었지만 오랜 인생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라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라를 하나님께서는 부드럽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하나님의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의심이 믿음에 의해 극복되고 난 후 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반복하여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잠깐 머물렀던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여장을 꾸린 그들은 아브라함과 작별 인사를 하려다가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이 더 있다는 말인가?’아브라함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크지. 사람들의 안타까운 간구를 나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왔어. 이제 그 땅은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 같아.”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들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옮기실 때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은 그 도시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그들의 죄악이 무거운 것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그들 자신에게 있었으며, 자신과 세상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내 삶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고 믿음이 연약해질 수도 있지만,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입을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깜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더니 가슴에 무엇인가가 박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자기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던 가족과도 같았던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곳에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메신저였던 그들이 이제는 심판의 메신저로 변하여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아브라함은 그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대면합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어도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의인 오십을 위하신다면 그 성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발걸음도을 멈추어 섰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 사자의 입술에서 이내 대답이 나왔습니다.“그럼! 그렇게 해야지. 오십 명의 의인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성을 용서할 것이다.”그리고 몸을 돌려 소돔을 향하려는 순간 귓가에 다시 아브라함의 간청이 들렸습니다.“마흔 다섯 명이라고 한다면요?”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자 사이에 긴 대화가 계속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마치 목표를 향해 돌진해서 물었다가 놓았다를 반복하는 날쌘 짐승을 닮아 보였습니다. 그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무릅썼습니다. 왜냐하면 멸망받아야 할 그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담대하게 만든다. 사랑이 충만한 이상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는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그분의 가슴에는 인류를 다 품고 그들을 건져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의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두렵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 사랑은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 담대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부르시고, 우리를 관계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오늘도 관계를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과감하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놀랍도록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아 주십니다. 너무나 적은 의인의 숫자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넓고 광활한 소돔과 고모라의 온 지역(26절)을 극소의 사람들로 인해서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아브라함의 간청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분은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에 유의해 오셨던 하나님께서 몰라서 소돔과 고모라에 직접 가서 보시겠다(20-21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심판을 유예시키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죄인이 돌아와서 용서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작은 열 사람으로 인해서 큰 공동체를 다시 바라보십니다. 몇 명 안 되는 작은 의인(사람)으로 인해 거대한 공동체를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나라, 이 민족, 이 강토를 봅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깨어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백성의 마음까지 흘러가 오염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개탄합니다. 그러나 비난할 뿐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중보적인 기도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할 때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타깝게 찾으시는 의로운 10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10명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은 이 땅을 긍휼이 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10명의 의인이 될 때 수만 개의 교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 공동체를 긍휼이 여기시고, 그 교회를 주님의 몸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세계 21개의 문명 중 대부분이 몰락했는데 내부의 부패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제국도 훌륭한 제국이었으나 내부의 부패로 인하여 몰락했습니다. 역사 속에 로마제국처럼 훌륭한 체계를 수립한 국가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당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를 이혼의 증가와 가정의 파괴, 과다한 세금부담과 지나친 소비풍조, 지나친 쾌락의 추구와 스포츠의 잔혹화, 지나친 군비의 증강, 종교의 다양성과 혼란이었다고 한다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강성한 로마가 급속히 멸망하였습니다. 
죄는 나라로 망하게 하고 의는 나라를 왕성하게 만듭니다.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고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만듭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의인 10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이 조건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심히 타락하였고 부패하였습니다. 결국 무서운 심판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의인 10명만 있었어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인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병들고 타락하여 부패해도 그 중에 신실한 의인들이 있으면 그 의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보류하십니다.
군사력이 나라를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경제력으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의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전부 의인이 되어야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시는 것 아닙니다. 모두가 의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의인될 수도 없습니다. 소수의 의인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하여 이 사회를 붙들어 주십니다. 

왕하 13장에 엘리사의 마지막 사적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세상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울며 부르짖습니다. 요아스가 엘리사를 향하여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엘리사가 있음으로 나라가 든든했었다는 고백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한 사람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나라를 지켜 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의인의 중요성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시 5: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의인을 귀하게 평가하시는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담이 되고 울타리가 되는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내 종을 건드리지 마라. 내 의인 다니엘을 건드리지 마라. 내 의인 요셉을 건드리지 마라.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라고 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 37: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의인의 땅을 남이 침노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의인의 흔들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 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시 118:15)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시 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의인의 집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항상 계셔서 도와주시고 적을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의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이 득의 하면 큰 영화가 있습니다

(잠 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들이 즐겁게 됩니다

(잠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언에는 이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인들이 있음으로 사회가 형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 위에 계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의인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 역할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따라 적당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일어납니다. 때로는 나 하나쯤 잘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잘난 척 해봐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을 이기십니다. 잘난 척 한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잘난 척 좀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마친 두 천사는 날이 저물 때에 소돔 성의 죄악을 살펴보기 위하여 소돔 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천사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이어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롯의 집에 머물 때 소돔 거민들은 악한 행동을 자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이 타락했고 그 원성이 하늘까지 미쳤지만 그래도 곧바로 심판을 실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실상을 파악하시기 위해 발걸음을 소돔으로 옮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성문에 나타나자 롯은 달려나가서 머리를 땅에 조아려 절하며 하나님의 사자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롯은 하나님의 사자를 맞이하면서 자기 집에서 발을 씻고 편히 쉴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두 사자가 롯의 가정에서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타락한 소돔 성의 사람들은 그 집을 둘러싸고는 그들을 이끌어 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하겠다고 아우성 치는 모습 속에서 그 도시 사람들의 타락한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롯이 손님들을 내어 놓지 않자 문을 부수어서 억지로 그들을 끌어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창 19: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사악하고 오만 불손한 저주받은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의인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겨나갑시다. 할 수 있는데 까지 해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를 지키는 영적 군사가 더 위력이 있습니다. 나라의 군사력만 의지하지 마십시오. 나라의 경제력만 쳐다보고 있으면 실망합니다. 의를 지키는 영적 군사가 많아야 나라를 튼튼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의 가장자리에 서 계서도 세상을 운행하시던 손길을 멈추시고,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간구의 편협함과 얕은 영혼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받아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십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 합시다

아브라함의 간구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발길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렀음이 틀림없습니다.

(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우리의 간구도 멸망과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고 떠나는 하나님의 사자 위에 묻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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