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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민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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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민 14:1-9)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나치 독일에 의해서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는 아주 비극적인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의 가스실에 끌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식들을 먼저 앞세워 보내야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충격인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그의 삶의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그를 지켜본 간수들까지도 아주 놀랐다고 합니다.
     
한번은 나치의 게슈타포가 그를 발가벗겨 하루 종일 끌고 다녔습니다. 그를 지켜보자는 의도였습니다. 흥분한다든지 분노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주하고 대드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가스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대들은 나에게서 부모를 빼앗아 가고, 또 내 아내도 빼앗아 가고, 내 자식들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절대로 그대들이 나에게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은 바로 내 선택의 자유다. 내가 비극적인 환경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선택의 자유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있다.”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태도를 가지고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빅터 프랭클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 스스로의 감정에 휩싸여 원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형편에 등이 떠밀려 차선의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포기함으로 더 나쁜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이라면 우물쭈물 아주 나쁜 일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자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 중에 최고의 자유는 바로 선택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자유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결과로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로 스스로 절망하기도 하고 스스로 희망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그 땅에 올라가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올라가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살펴보기 위하여 올라갔던 열 두 사람 중에 열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과연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는 하지만 올라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땅 거주민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 거주민은 거인으로 보고 자신들은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I. 절망
     
첫 번째 반응은 절망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보고가 있자 일순간에 무거운 그림자가 온 회중들의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온 회중이 떠들썩하게 소리 높여 아우성쳤습니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울음은 가장 일반적인 절망감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그동안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끝이 났다고 여겼습니다. 
     
1. 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울음은 자신의 삶을 정화하기도 합니다. 눈물은 고통을 씻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한 것은 이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다는 절망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하여 오신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울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절망감이 짓눌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바로 함께 계신 예수님이 생각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한참 울고 난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우리가 이 광야에서라도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따라서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부러운 사람은 애굽에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내오면서 죽은 사람이 그 다음으로 부러웠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신을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2. 그들은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더 큰 고생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동경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에 들어간 후에 실수로 문이 밖에서 잠겼습니다. 아무리 빠져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상태를 화차의 벽에다 기록해 나갔습니다. 
     
“점점 몸이 차가워진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점차로 몸이 얼어 옴을 느낀다. 나는 이제 몽롱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직원들이 그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에 이미 그는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사실은 그 냉장고 화차는 오래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기도 충분하고 실내 온도가 섭씨 십삼도의 쌀쌀한 온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이 그를 죽였습니다.
     
죽을 상황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겠다는 생각이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죽음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도록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힌 그들은 또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어찌하여 여호와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한다고 탄식합니다. 그들의 아내들과 자식들은 사로잡힐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자신들은 칼에 죽고 가족들은 잡혀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3. 그들은 망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런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셨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하여 고통에 던져 넣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 
     
망할 것이 아니라 흥할 것을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선한 계획을 가지신 좋으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라입니다.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혀 망할 것을 생각한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지휘관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사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의 자리로 인도하셨다고 믿었기에 사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지도자를 하나 뽑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사람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심을 거절하고 인간을 왕으로 세워주기를 요구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웅을 만들고 환호하며 기대려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서로 세워주고 격려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삶에서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의지하려는 것에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절망의 소요돌이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절망의 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희망도 있었습니다.


II. 희망
     
두 번째 반응은 희망이었습니다. 무거운 그림자가 온 회중들에 드리운 그 순간에도 마치 먹장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리 쬐이는 빛내림과 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밤새도록 울부짖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들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떠들어대는 사람들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엎드렸습니다. 
     
1. 이들은 엎드렸습니다.
     
이 순간 모세와 아론은 왜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 것일까요? 모세와 아론은 회중들에게 엎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중들에게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엎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회중들을 위하여 기도하려고 엎드린 것입니다. 이 완악한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기 위하여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실 진노를 거두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옷을 찢었습니다(: 6). 옷을 찢는 것은 슬픔에 겨운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릴 때, 함께 슬픈 마음으로 백성의 죄를 슬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엎드려야 합니다. 거짓 우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질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희망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야 이 땅에 희망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향락으로 밤을 새우고, 절망의 울부짖음으로 밤을 새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와 이 사회를 위하여 기도로 밤새우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들은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외쳤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돌아다니며 정탐하고 온 땅은 기막히게 좋은 땅이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얻을 가나안이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죽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향하여 달려갈 희망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과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2. 이들은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거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미래를 향하여 나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향수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들은 또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이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즉, ‘우리가 여호와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공동] 하나님께서 인도해 들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며 자신들은 죽고, 가족들은 포로로 잡혀가겠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될 일이 있다는 희망을 선포하였습니다.
     
3. 이들은 흥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살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망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흥할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렸어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면 사는 것입니다. 정말로 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흥하게 하시면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넘어 앞에 나가자 /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현재명 시 ‘희망의 나라로’]
     
다시 희망을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회중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의지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뒤돌아가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용기입니다.
     
4.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망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희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자신과 가정에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민족과 역사에 희망을 품고 나아가시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순간 이스라엘이 무엇을 선택하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순종이 아니라 반항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방황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십년이 지난 후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 11: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과 저주를 두고 그들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에게도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절망을 선택하여야 할지 희망을 선택하여야 할지는 우리의 순종에 달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하는 선교사에게 아프리카에서의 선교활동을 정말 좋아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이 일을 좋아하느냐고요? 천만에요. 저와 제 집사람은 더러운 것은 딱 질색이에요. 우리는 상당히 섬세한 감각을 지닌 편이거든요. 그 냄새나는 고약한 오두막에 기어들어가는 일은 아예 몸서리쳐져요. 그러나 자기가 싫다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좋다든지 싫다든지 하는 것은 선교사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우리는 그저 ‘가라’는 명령을 받아 갔을 뿐이죠. 사랑이 우리를 강요한 것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절망과 희망이 마치 하루에 밤과 낮이 있는 것처럼 수도 없이 교차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상황에 등이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마땅히 취하여야 할 것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바른 선택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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