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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자랑할 것 (렘 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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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랑할 것 (렘 9:23-24)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 우리 사회의 한 풍경

무더운 여름날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을 불어넣으시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십니다. 낙화처여실落花處餘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는 말입니다. 도로변의 은행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 싱그러운 잎 사이에서 수줍게 자라고 있는 포도송이는 만물에 숨결을 불어넣고 계신 주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더위에 정신이 몽롱해질 때 나무 묵상을 하노라면 마음이 절로 넉넉해지고 평안해집니다. 그럴 때면 해야 할 일들(have-to-dos)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듭니다. 마음이 넉넉해지면 일을 대하는 태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마음은 묵정밭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깃들어 살 수 없는 불모의 공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 풍조는 우리로 하여금 삶을 성찰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로 늘 분주한 우리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친구가 처음으로 놀러와서는 ‘아줌마, 이집 몇 평이에요?’ 하고 묻더라는 교우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요즘 아이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조차 부모들이 누리고 사는 공간의 넓이나 경제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은 정상적인 세상이라 할 수 없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금은 위기의 때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우리 마음을 암울하게 만드는 사건 사고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는 징조처럼 보입니다.

● 자랑하지 말라

조국의 멸망을 예감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예레미야는 넘어지는 담을 받치려는 절박함으로 백성들에게 주님께로 돌이키자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예민한 감성으로 분별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꼭 손에 쥐고 싶어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23)

‘지혜’, ‘힘’, ‘재산’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발생합니다. 자랑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심과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제가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과시욕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대화를 주도하려는 이들과 만나면 피곤합니다. 그들은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이 없는 사람들과는 될 수 있으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일전에 인사동 길을 가다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어떤 40대의 건장한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다 드러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가슴 근육을 부풀리며 걸었습니다.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근육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는 살맛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근육을 만드느라고 수고는 했겠지만, 저는 그에게서 멋진 근육이 아니라 허영심과 조바심만 보았습니다.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이들의 과시적인 소비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화감을 조성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면 자랑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는 열등감에 닿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랑하는 이들은 대개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약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지혜와 힘과 재산을 구합니다. 

자기 내면에 힘이 있는 이들은 굳이 다른 이들 앞에 자기를 과시적으로 내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르네 지라르라는 학자는 인간의 욕망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매개되어 있다(mimetic desire)고 말합니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의 뿌리에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나 하는 사람에 대한 선망의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관심한 것에 대해서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 하나님 인식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불편해 합니다. 사람들은 남과 구별되기를 원합니다. 명품을 선호하는 것도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발현입니다. 그런데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사람들과 남과 같아지기 위해 안간힘을 다 씁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이 없습니다. 그 기준이 되는 ‘남’이 누구냐에 따라 삶은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높을수록 삶의 만족감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신앙이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선망의 대상이 된 사람이나 가치에 자기를 조율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조율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긍휼, 공평, 공의가 그것입니다. 긍휼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몸으로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친절함 혹은 관대함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흠까지 품어 안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돕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유대교 신비주의자는 “누군가의 육체적인/물리적인 필요는 나의 영적인 의무”(Someone else's physical needs are my spiritual obligation)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공평tzedakah’이란 ‘치우침이 없는 공정함’을 일컫는 말이지만, 성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를 이르는 말입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나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계층적․계급적 차이가 생깁니다. 그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집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셨습니다. 추수할 때에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든지,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든지, 포도를 수확할 때도 일부는 남겨두라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안식년이나 희년은 그런 일상적 규정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땅의 주인이신 주님은 우리가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공의mishpat’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공의가 아닙니다. ‘옳음’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합니다. ‘이익’이라는 말은 ‘편의’라고 바꾸어도 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은 법을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적용합니다. 탈옥수였던 지강현은 인질극을 벌이다가 무정한 바깥세상을 향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의가 바로 서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사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기뻐하십니다. 얼마 전 우리는 베트남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온 지 일주일 만에 정신병 이력이 있는 남편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주의 어떤 마을에서는 지적 장애를 가진 여중생을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어제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자 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인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세상입니까?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까? 부자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까? 유대 전통에서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부유한 집안의 소녀들은 누군가에게 옷을 빌려 입는 게 관례였다고 합니다. 옷차림에서 차별이 느껴지면 이미 축제가 축제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 씀이 우리 사이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샬롬의 세상이 열릴 겁니다. 

•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다

여러분, 하나님이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신앙에 있어서 ‘서술법은 명령법을 포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고백에는, 고백자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분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동참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단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12세기 사람인 모제스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는 중세 최고의 철학자이자 랍비였습니다. 그는 <<당황하는 이들을 위한 지침>>(The Guide for the Perplexed)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존재, 인간 인식의 한계, 악의 문제 등을 다룹니다. 주제가 어려운 만큼, 내용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말미에 그는 자기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고도의 지적인 사색을 거쳐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 책을 쓴 후 그의 삶은 크게 달려졌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늘을 향한 발돋움이지만, 결국 그것은 땅에서 바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 병든 이들을 고쳐 주었고, 고민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또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사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 기쁨의 수확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낮잠을 자다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깨어 세상이 무너진 줄 알고 달아나는 토끼 이야기를 아시지요?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토끼 뒤를 따라갔습니다. 우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모습과 현대인의 모습이 다르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우리는 소비주의 세상이 제시하는 삶을 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행복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달리다보니 풀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웃들의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서면 행복한가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행복은 쾌락과 달리 삶을 잘 사는 데서 얻어지는 만족감입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타적인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에 비해 만족감을 24% 이상 증대시킨다고 합니다.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행복감을 11% 가량 더 느낀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20:35b)는 말씀도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삶에 만족이 없다면 삶의 방향을 바꿔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과 시간을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바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행복감을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들을 만지고, 그들을 돕기 위해 몸을 굽힐 때, 우리는 자기로부터 해방되어 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심하simhah는 즐거움 혹은 기쁨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은 나눔을 통해 얻는 행복을 일컫는 말입니다.

행복을 갈구하면서도 우리는 그 행복의 길을 외면합니다. ‘진리를 피하면서 찾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빌어 말하자면 우리는 행복을 피하면서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important) 일과 시급한(urgent)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급한 일들에 집중하며 사느라, 정말 중요한 일들은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돈벌이에 몰두하느라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삽니다. 자식들 성적 올리는 일에 몰두하느라 그들에게 심어주어야 할 인간적 가치를 소홀히 합니다. 예를 들자면 참 많습니다. ‘중요한 일’과 ‘시급한 일’을 구별할 수만 있어도 인생이 깊어집니다. 시편을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17:15)

‘떳떳하게’라는 말이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한비야 씨는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애썼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혜와 힘과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긍휼과 공평과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 공평과 공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그런 삶으로 전환하지는 못한다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 길을 닦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불어와, 하늘 군대로 거듭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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