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한다 (고전 8:1-3)

  • 잡초 잡초
  • 319
  • 0

첨부 1


성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한다 (고전 8:1-3)


우리가 성령강림절 이후로 계속해서 성령 안에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강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인데 그 성령의 인도함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는 16:14절의 주제말씀이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지혜로 신령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항상 우리는 이런 고민 가운데 살아갑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님은 어떻게 나와 함께 하시는가?’,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에 대하여 자신들 나름대로 해답을 찾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심령부흥회를 통하거나, 아니면 기도원을 통하여 무슨 하나님의 신비한 음성을 들을 수 없을까, 이상하고 놀라운 꿈을 꾸지는 않을까, 신기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들을 찾고 구하고 두드립니다. 
  
이런 문제와 고민에 대하여 오늘 어느 정도 해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여러분의 삶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지에 대하여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제 성령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신비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기적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구하지 말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면 이제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삶이 나타납니다. 죄와 사망의 왕국에서 살던 삶이 아니라 생명과 의의 나라에서 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성령으로 사는 삶이 여러분 안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 한 구절에서 사도는 ‘같은’이란 말을 자그마치 세 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분쟁이 없이 합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교회가 분쟁에 빠지지 않고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바울은 권면하였습니다.
  
그럼 무엇이 같은 말이며 같은 뜻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1: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구원얻은 백성과 구원얻지 못한 백성을 구별시킵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인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련하다고 하며 십자가의 도를 받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말과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음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여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문벌이 좋음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부함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권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2:10-12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나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십자가의 도는 마가복음의 말씀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이름을 통해서 자신이 할 일을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즉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사 사흘 만에 살아나는 이 길을 가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 계속 강조를 해 드렸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그저 세 치의 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늘 제가 입교교육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가장 간단하게 대답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에 우리의 구원의 길이 함축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럼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니까 고난주간이 되면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사건처럼 십자가를 나무로 만들어 어깨에 메고 거리행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아주 기본적인 원리를 갖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논쟁을 벌인 사건에서 주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우리 가운데, 아니 고린도교회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일어난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중에 누가 크냐?’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즉 세상은 문벌이 자기가 가장 높다고 하며 자기를 크게 높입니다. 세상은 돈이 제일 많다고 자기를 크게 높입니다. 세상은 권력이 제일 세다고 자기를 높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사신 길입니다. 세상은 이 길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에 나와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희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주님은 제일 낮은 길을 가셨고,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서로 나뉘어 바울파, 그리스도파, 게바파, 아볼로파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쟁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서로 자신들이 더 크다고 자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자신이 어떤 지도자로부터 세례를 받았는지 자랑했습니다. 

또 어떤 지도자가 교회에서 문벌이 좋은지 자랑했습니다. 또 어떤 지도자가 교회에서 세력이 있는지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지도자가 말을 잘 하는지 자랑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를 자랑함은 그 지도자를 높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따르는 자기를 자랑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다고 자랑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문벌을 추구합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은 문벌을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어려서부터 유치원을 보내면서 서울대를 가기 위하여 막대한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은 이런 일에 힘을 다하고 열성을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누가 ‘십자가의 도’를 자기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겠습니까? 성경을 배우는 것은 문벌을 얻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잘 모르며 아이들에게도 강조하며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좋은 교육과정은 무엇이든 찾으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듣고 들어도 어려우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세상의 복잡한 교육이론은 잘도 귀에 들어옵니다.

또한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문벌이 좋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문벌이 좋은 자에게는 정성을 다하고 모든 것을 다 줄듯이 대접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문벌이 떨어지는 자에게는 2급 정도로만 대접합니다. 이렇게 차별적으로 대하며, 은근히 자기 자신은 문벌이 좋은 자와 함께 함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부함을 추구합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가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주식투자, 부동산 등 이런 일에 매우 큰 관심을 보입니다. 일확천금을 얻어 편안하게 살 일만 생각합니다. 재물을 쌓아도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며 도우려고 합니다. 비교적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도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주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남을 돕는 것을 자기 자랑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돕는 것을 통하여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돕고 구제하는 일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회용 선행으로 끝날 뿐 이웃의 약함을 끝까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힘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벌도 힘입니다. 부함도 힘입니다. 이러한 힘을 얻어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의 원리요,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자기가 부끄럽게 되거나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게 되면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중에 어떤 신자들로 말미암아 말로나 일로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일차적으로 내 이름을 세우려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상처를 받아 상심을 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 일로 교회를 저버린다는 것은 그 안에 이미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교회를 나오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과 세상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를 시키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4:8-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린도교회와 사도들의 모습이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이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사도들은 죽이기로 작정된 자처럼 끄트며리에 두셨고, 세계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고린도교회와 사도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다른 것입니까? 더구나 사도 바울은 11절에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사도들의 삶이 왜 이런 모습을 나타내어야 했습니까?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신 것처럼, 사도들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형제를 돕고, 형제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삶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조차, 더군다나 먼 거리에서 교회를 나오는 것조차 그들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아니 조롱하며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것입니다. 세상이 조롱하고 미워해도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흔들림이 없이 갈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지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감에 있어 어떤 부끄럼이나 수치를 당해도 괘념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십자가의 도를 따라 걸음을 자랑합니다. 환난을 즐거워합니다. 이런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를 다 강론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다 못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두 가지만 강론하고 나머지는 다음 주에 이어서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십자가의 도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따라 행하는 삶은 ‘우리 중에 누가 크냐?’고 논쟁을 벌였던 제자들의 다툼으로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뭇사람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뭇사람의 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곧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 것인지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삶의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개인구원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한 지체로 자신을 생각하여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이 나타남이 곧 성령의 행하심입니다.
  
현대의 사회는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이 지내는 자가 오히려 쿨하다고 합니다. ‘내가 돈을 번 것으로 나를 위해 쓰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로 교회를 생각하고 형제를 나의 몸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령의 행하심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한 몸으로 생각할 때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모든 일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지체가 아무렇게 행동하고 심지어 범죄를 한다 해도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형제를 바르게 세우며 때로는 책망하고 징계하여서라도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음행한 일이 있었을 때에 ‘왜 너희 중에 이런 일을 판단할 지혜로운 자가 하나도 없느냐?’고 책망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서로 아볼로파다, 바울파다 하여 지식의 자랑으로 고린도교회는 서 있었는데, 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가 범죄한 일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어찌 이런 일을 판단할 지혜로운 자가 하나도 없느냐고 바울은 꾸짖었습니다.
  
이런 음행사건은 아니더라도 현대 교회 안에 있는 삶들도 이런 공동체로써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개인과 자기 가족의 복을 위하여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제목도 그저 자기 가족의 식구들이 잘되고 복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고 그저 내 자식만 성공하고 출세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교회로써의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가족만을 위하고 자기 가족만을 섬기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니 가족 중에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교회를 돌아볼 아무런 힘이 나지 아니하고 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족 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교회를 생각하고 기쁨으로 움직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어떤 경제적인 문제로 성도 간에 송사가 벌어졌을 때 세상의 영을 받은 자는 이 일이 ‘내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로만 판단하여 형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로써 주님의 한 몸을 나타내는 성찬에 참여하여 한 떡을 먹고 마시는 지체로 형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들 때보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취하여야만 합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먹어야 합니다. 그리해서 다른 사람이 그런 자신 때문에 고통이나 피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기 만족.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많이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럼 성령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런 세태 속에서 어떻게 우리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까? 자기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 생각하고 사는 자들이 바로 성령이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인간 ‘조정재’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몸이 주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형제, 자매도 또한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존귀하게 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처소로써 자신을 생각하고 모든 일을 행합니다. 형제끼리의 약속이나 만남을 쉽게,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몸의 연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질서는 부부연합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부터 결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7장7절에 말함으로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온 것입니다. 그는 이미 성령 안에서 신령한 연합을 이루고 있으니 이 세상의 장가가고 시집가는 질서에 매일 필요가 없었고, 모든 성도들이 자기와 같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사랑으로 행함에 대하여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8장 1-3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교회가 주일학교나 오후 성경강론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지식 추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다 하는 것은 지식을 쌓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추구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말씀을 듣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안다 하는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지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옆구리에 두터운 신학서적을 끼고 다니기는 하는데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일에는 어두우면 그건 정말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신학자의 고매한 사상이나 글을 소개하기를 즐거워하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는 아주 약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고매한 지식은 자기를 높이기는 하겠지만 덕을 세우는 일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유명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부모는 일류 학교를 나와야만 일등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많이 쌓으면 일류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제일 사랑하는 부모가 일류 부모입니다.
  
지식으로 많이 알게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는 만큼 더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온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나 때문에 저 형제가 믿음이 강건해지고, 나 때문에 저 형제가 변화되면 그것이 바로 덕을 세움입니다. 내가 전하는 성경지식으로 형제가 온전해 지는 일, 이것이 바로 성령의 행하심입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유익하도록 봉사함이 바로 사랑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죽고 부활하신 사역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심은 순전히 자기의 높아지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앉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점과 흠이 없이 서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의 죄를 지셨던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무언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대하여 명쾌하게 풀어 설명을 잘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깜빡 속을 때가 많습니다. 말을 잘 하는 것 때문에, 풍부한 지식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의 ‘안다’하는 말은 단순히 지식의 용량을 더 늘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제함으로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사랑함으로 부부가 서로를 잘 아는 것과 같은 그런 앎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압니다. 사실 구원의 교리도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영접하는 교리에 대하여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영접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도 사랑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교리도, 세례 문답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처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응답하고 맹세해야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고백하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다음에 천당가려고 고백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을 물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안다 하는 지식은 거의 다 자기 권리를 행사하기 위함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과연 형제에게 유익한가 아니한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형제를 유익하게 하는 덕 세움이 목표여야 합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것도 단순히 개근상을 받으려는 목표가 아닙니다. 또 내 구원을 온전하게 위함도 아닙니다. 형제 사랑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모든 다른 어떤 일보다 더 형제와의 모임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셨고 그걸 누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리를 아는 대로 다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권리를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겸손히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을 복종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리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 권리를 아는 지식이 있었지만 그 지식대로 쓰시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덕을 세우는 표본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권면을 한다 하면서도 항상 높은 소리로 나무라듯이 합니다. 특히 제가 그렇게 많이 합니다. 목소리를 높이므로 나의 힘을 높이는 것입니다. 목소리의 톤을 높여서 상대방 위에 서서 그를 아래 둠으로 권면하려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무슨 잘못을 알게 된 것이 큰 약점을 잡은 것처럼 공격의 빌미로 삼아 자신이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서 심하게 꾸지람을 주는 것입니다.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와 있고, 분노를 담은 높은 목소리를 갖고 상대방을 나무라거나 꾸짖으면 이건 덕을 세움이 아니라 실제 싸우자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낮추어 뭇사람의 끝이 되어 형제를 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결국 그 결과는 싸움의 험한 상처만을 남깁니다.
  
물론 우리는 그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권면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높은 목소리와 분노와 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건 실제 전쟁터에 나선 군사의 모습과 같지, 절대로 사랑을 전하는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 분노와 화를 담아서는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식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우리의 사랑의 표현은 목소리까지라도 낮추어야 합니다. 위치도, 자세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익합니다. 상대방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 위에 자신을 높여 군림하여 상대를 짓밟는 권세를 나타내어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그 십자가를 자랑하고 기뻐하며 그 길을 걷고 계십니까? 그건 어떤 체험보다 더 확실한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또 교회의 한 몸됨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형제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고 계십니까? 그건 분명 성령이 함께 하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어떤 일이든지 사랑으로 행하십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정말 그런 분은 성령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