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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한다(2)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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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한다(2) (고전 13:1-13)


지난 시간에 ‘성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게 한다’는 제목으로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거의 안개에 덮인 것처럼 성령충만,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역사 등의 말들은 희미하고 확실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니까 내 마음에 어떤 선한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일을 따라 행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행함도 좋기는 좋은데 결국 자기 마음이 어떠하냐는 상태에 따라 성령이 인도하심도 되고 성령이 인도하심이 안되는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청년시절까지도 성령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기 위하여 애를 썼었습니다. 산상수련회나 심령부흥회 같은 집회가 열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을까,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체험할까, 그래서 멋있는 간증을 했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하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고, 신비한 체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늘 궁금한 점은 성령이 어떻게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속시원하게 답변을 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이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더랬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도 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고 그저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삶들만 되풀이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오래 신앙생활하며 하나님께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한 번도 자그마한 음성이라도 들려주시지 않아서 이제 포기하고 그저 예수만 믿고 천당을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알고 오늘도 성령의 임재하심을 누리면서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인도하심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이런 문제와 고민에 대하여 이번 기회에 여러분이 확실하게 해결하고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붙잡는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성령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 것은 잘못된 구원관에 있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십시오.’라는 말을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주신 일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사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을 영접한다고 했고, 내가 아닌 다른 어떤 분이 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이 곧 나를 구원함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고, 내가 행위로 이룰 수도 없는 일을 누군가 나 아닌 다른 분이 나를 대신해서 이루어놓은 일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뜻도 물론 성경에 있지만 사실 그런 뜻이 우리의 구원을 말하는 필요충분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시기를 요청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을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믿거나, 아니 믿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며,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구속의 일을 믿거나 아니 믿거나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구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을 믿는다라는 말은 주님의 그 사역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객관적인 위대한 능력의 일을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는데 나는 그처럼 신기한 기적적인 일을 믿는다는 의미로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은 모두 우리를 사랑하심의 발로였고 그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독생자를 주심’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디베랴 바닷가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 요한복음 21장의 세 번의 베드로의 고백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으로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사랑의 맹세를 3번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주님을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통하여 사도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베드로는 끝까지 주님을 사랑함으로 순교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놀라운 부활의 기적을 안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사랑하심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십자가를 거꾸로 지기까지 따른 것이 베드로 사도였고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이게 구원이니까, 이게 좋은 것이니까 선택해서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날 사랑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그 주님의 길에 동행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건 세상에 없는 길입니다. 하늘의 질서와 생명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곧 세상의 영이 임한 사람들과 성령이 임한 우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 길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십자가의 도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다는 것은 어떤 위대한 성인이나 군자의 가르침을 알고 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몸으로 함께 사는 언약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십자가로 나타내셨으니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주님과 함께 거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는 그냥 일어난 문제를 사건별로, 시간별로 배열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가르침을 말한 뒤에 교회 안에 일어난 음행 문제를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6:15-20절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 한 몸으로 연합합니다. 그리하여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며 내 삶이 나의 것이 아니며 나를 사랑하는 배우자의 것임을 알고 삽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 가운데 내 몸을 아내의 몸으로 주지 않고 다른 여자의 몸으로 주는 것이 가장 큰 범죄임을 알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행은 다른 범죄와 다르게 자기 몸에게 행하는 범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르침을 주님의 사랑으로 받은 사람들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며 주님의 몸임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 압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아무렇게 아무 곳에 버려두거나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럼 세상에 있는 연합 가운데 가장 강한 연합은 무엇입니까? 결혼입니다. 한 몸되는 관계요, 세상의 사랑으로 연합한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 결혼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한 몸의 관계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은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하늘에 속한 질서와 생명을 가져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행하심은 눈을 감고 꿈을 꾸는 것처럼 행하시지 않습니다. 이상한 기운을 받아 뜬 구름처럼 사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성령은 인도하십니다. 즉 새 시대와 새로운 관계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고린도교회의 물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답하는 원리는 새로운 하늘의 질서가 그 바탕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이 7형제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한 형수에게로 들어갔다고 하면 부활할 때 누가 그 형수의 부인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25절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결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질서가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이런 독신으로 살 수 있겠지만, 바울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질서로 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독신으로 산 것은 유령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삶이 아닙니다. 구름처럼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산 것도 아닙니다. 눈에 보이게,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으로 산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은 바울이 하늘의 질서를 가져와 이 땅에서 자기 몸으로 산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시집가고 장가가는 질서에 매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의 문제에 대하여, 또한 결혼한 삶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여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도 말하듯이 결혼하기 전에는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다가 결혼한 후에는 남편이나 아내를 위하여 더 열심을 냅니다. 장가 간 자가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는 것을 세상 일이라고 말합니다. 시집 간 자가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는 것을 역시 세상 일이라고 말합니다. 처녀 총각으로 있을 때는 주의 일을 염려하다가 시집가고 장가 간 후에는 세상 일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거꾸로 돌아간 것입니다. 주의 일을 염려하다가 세상 일을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만을 자신의 신랑으로 섬기다가 아내와 남편을 더 섬기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주의 일이 하늘의 질서이면, 아내와 남편을 섬기는 일은 세상 일이니 하늘의 질서로 살다가 다시 세상의 질서로 돌아간 경우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도 이를 말하여 줍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는 자유하는 아들의 의인데,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다시 할례를 받아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종으로 다시 되돌아갈려고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바울 서신서에서도 나타내지 않았던 저주와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연합은 결혼관계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의 관계가 왔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이제 주님을 더 사랑하는, 죽음을 이기신 강력한 연합이 왔습니다. 아내보다, 남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연합이 온 것입니다. 성령 안에 사는 자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 질서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질서를 더 갈망하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잘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어찌 그리 자기 아내의 말에 절절 매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새 가족관계를 선언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3:31-35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령이 거하는 자는 새 가족을 중시하여 살아갑니다. 자신의 혈육의 관계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질서 가운데 가족의 질서는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육신의 혈율관계를 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의 질서가 아닌 하늘의 질서가 왔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유령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새 가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새 가족이 왔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행하는 자,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한 몸된 형제 자매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가족만의 안위와 화목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주님의 몸에 연합된 이 지체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들의 생각이요, 눈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요모임도 금요가족모임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하늘 식구들이 모여 한 아버지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소중한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눈에 보이도록, 손에 만질 수 있도록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임이 주일에 성찬상에 앉은 한 몸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명절에 온 친척들이 다 모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근데 어찌 일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금요가족모임을 갖지 못한다고 하면 성령이 임한 자들로 바르게 분별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년 중 하루도 여러분은 다른 모임이나 문화행사에 참여하시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바쁘게 지내신 것입니까?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그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 그 뜻대로 행하는 신령한 하늘 가족 모임을 여러분이 누리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눈에 보이게 나타내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고린도전서는 십자가의 도의 가르침을 처음에 말한 후에 한 몸됨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교회의 한 몸된 것과 부부의 한 몸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럼 다음에 따라나올 이야기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이제 한 집에 동거하며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마치 사랑을 맹세한 후 결혼식을 하고 결혼 피로연의 식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늘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저희가 드리는 예배질서와 같습니다. 말씀예전, 세례, 성찬예전의 순서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질서입니다.

이것처럼 고린도전서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 언약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며 이제 그리스도의 몸된 교제에 참여하여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8장 이후로 11장1절까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심에 대한 문제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지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며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께 자주 이 비유를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신혼 때 아내가 요리를 내오면 그건 분명 지식으로는 맛이 없습니다. 오래오래 어머님의 요리 맛에 길들여진 탓도 있겠지만 실제 요리 초보자인 아내의 솜씨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맛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지식을 가지고 그대로 맛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안됩니다. 맛이 없어도 맛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맛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요리를 혀의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맛으로 먹기 때문입니다. 내 입맛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먹지 않고 내 입맛을 포기하고 아내의 유익을 위하여 맛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한 몸으로 연합하여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은 이처럼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주장하여 먹고 마시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눈에 보이도록 역사하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럼 어떻게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2-33절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으뜸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경건의 어느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참선을 행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더구나 죄인을 위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의 본이요 사도가 함께 좇아가는 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엇인든지 자기의 영광,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어떻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그저 찬양 시간에 하늘을 향하여 손뼉을 치며 손을 높이 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무슨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도록 손에 잡히는 그런 삶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할 때 그 일은 바로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봉사할 때 자기의 권리를 다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봉사를 받아야 하는데도 그는 자비량하며 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으로 먹고 마시는 신자의 삶은 대표적으로 교회의 예배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모든 먹고 마시는 삶의 절정은 바로 주일에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몸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이 예배 공동체로써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질서입니다.

자기 자신에에 임한 은혜와 은사가 아무리 확실하고 크더라도 질서가 우선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배 시에도 서로 방언이나 예언을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누구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 자기 은사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배가 혼란스러웠겠습니까? 그리고 서로 자기 은사가 먼저요, 우월하다고 하면 그 일은 얼마나 무질서하게 보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 은사를 자랑함으로 자기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못을 박듯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33절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만일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계속 자기의 신령함을 주장한다고 하면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엄하게 꾸짖습니다. 고린도전서 14:37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무질서는 불법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정치는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얼마나 자기 자신이 옳은 판단을 하는지는 몰라도 장로님이 부르시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은 정말 안되는 일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이 당회에 교회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겼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질서, 여러분이 세운 권위를 복종해야 여러분 자신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임시 집사의 말은 무슨 신령한 판단인 것처럼 들으면서 당회의 판단은 무시하는 것입니까? 그래서는 절대로 안되요. 교회는 신비적인 은사보다 질서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1학년부터 우열반을 편성해서 대학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 때 우반에 들어가면 1학년 공통수학 문제를 서울대 문제도 아니라 동경대학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그런데 출제한 수학선생님은 그 문제를 못 풀어도 학생들 가운데 푸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이 선생님을 무시하면 됩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푸는 실력보다 질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질서도 없습니다. 어떻게 어른보다 아이가 더 높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른이 아이의 종노릇을 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질서를 동반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질서를 나타내는 삶이 곧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그는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원칙으로도, 바르다는 말로도 이건 설명이 안되는 일입니다. 왜 죄인이 아니심에도 죄인으로 여김을 받아 죽으셔야 합니까?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에요. 주님은 아들로써 아버지의 일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 나타내신 일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리와 권세와 말씀이 있었어도 자기를 비어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먹고 마시는 삶의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먹고 마시는 삶과,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든 삶의 목표는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그 목표는 썩고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습니다. 

십자가의 도의 가르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에 연합된 공동체로 사는 삶도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도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며 그의 양을 먹이는 삶 속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은 모두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성령으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심으로 새 시대와 새 생명을 교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부활의 빛 가운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삶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죽고 나서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 때 부활하겠지 하는 소망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 땅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에 속한 삶을 성령 안에서 드러내며 살므로 이제 부활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 안에서 서로 한 몸을 이루고, 그 한 몸 안에서 서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교제하는 삶 모두가 다 부활의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손으로 만질 수 있게.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고 하면 사도 바울 자신이 가장 비천하다고 말합니다. 15:19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왜 불쌍한 자입니까?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더랬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아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세상의 끄트머리에 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나중에 좋은 곳에 간다고 하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아무렇게 살다가 결국 천국에 골인을 하게 될 것이라는 구원의 교리는 성경에 없습니다. 정말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은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승리해서 하늘 나라를 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무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12:31절에 가장 좋은 은사를 구하라고 하며 바울은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13장에 말함으로 가장 유익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증거합니다. 12: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렇게 말한 후에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가, 교회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주님의 사랑으로 연합을 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삶의 근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도, 방언도, 예언도, 희생도 다 사랑이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끝까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성령충만은 사랑의 충만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주제로 사도 바울은 16:13-14절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남자답게 강건하게 믿음으로 사는 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의 말씀도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여기서 바울은 주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믿는다는 말을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에 사랑이 당연히 포함되기는 하는데 교리의 가르침이 그것을 왜곡시켰기 때문에 바꾸어 생각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구원만을 사랑해서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은 절대로 부활로 말미암은 하늘 나라의 유업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이게 바로 성령이 나를 인도하는 삶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시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주님의 기업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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