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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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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6-13)

   
얼마 전 거의 19년 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00라는 대학교 후배인데 저를 잘 따랐던 친구입니다. 서울 친구인데 대전에 내려와 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청년부 생활을 했습니다. 심성이 착하고 열정이 있는 친구였기에 교회와 학교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는 서로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주전에 교단 총회를 통해 저를 찾아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아세아 연합신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결교단인 서울신학교에서 M. Div 과정을 마치고 성결교 목사가 되어 시흥시에 있는 교회에서 부목사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아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을 하고 성실하게 섬기는 이 목사에게 개척을 시켜 주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미얀마 선교에 뜻을 두고 계신 분을 통해 이 목사에게 함께 미얀마 선교 사역을 하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특히 한국에 들어와 있는 미얀마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데 그들을 섬기며 함께 미얀마 선교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얀마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미얀마 선교를 할 것인가 고민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마다 미얀마 노동자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미얀마 노동자와 미얀마 선교를 결정하고 담임목사님께 교회 개척을 하지 않고 미얀마 선교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과 당회가 말리고 말렸지만 결국 미얀마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천에서 상가 일부를 빌려 미얀마 노동자들을 위해 열정을 다해 섬기며 돌보았습니다. 미얀마 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해 약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주일이면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미얀마 선교에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 30명 정도와 미얀마 노동자 30명 정도가 함께 예배를 드리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자신이 돌봐 주었던 노동자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 들어 지금은 약 150명 정도의 미얀마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답니다. 그곳에 현지인 목회자를 세워서 교회를 이끌게 하고 뒤에서 후원 해 주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국교가 불교로써 복음을 전하기가 보통 어려운 곳이 아닙니다. 미얀마 최초의 선교사가 ‘미얀마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심기보다 호랑이 이빨을 뽑아 오는 것이 쉽다’라고 표현할 만큼 미얀마 선교가 어렵습니다.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뒷바라지 하며, 그리고 외국 땅에 와서 외로워하는 미얀마 노동자들과 함께 목회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운전하고 온 승합차가 그렇게 낡은 것을 보니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2학년의 아이들을 이끌고 어려운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왜 저에게 이렇게 어렵고 힘든 목회의 길을 가도록 하실까요?’ 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힘들어 하는 얼굴 표정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생각을 하다가 제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이 목사, 자네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만해 보이셨는가 보다. 하나님께서 미얀마 노동자들과 미얀마 사람들에게 복음은 전하고 싶으신데 힘들어서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자네가 만만하게 보이셔서 “이 목사, 힘들겠지만 네가 나를 대신해서 미얀마 사람들을 돌봐 주거라” 고 자네를 부르셨는가 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눈 주위가 뻘게지더라구요. 그러면서 ‘목사님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다시 힘이 생깁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부천에서 목회를 하니 이번 주중에 한 번 방문해 볼까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보내고 새벽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는데 제 마음 속에 ‘서 목사, 너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만만한 사람이냐? 아니면 깐깐한 사람이냐?’ 는 질문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주간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만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일이 있는데 시킬만한 만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실 때 하나님께서 만만히 보시고 편하게 ‘네가 힘들어도 이 일을 좀 해줘야 겠다’ 고 말씀하실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에게 자식들이 있지만 그 자식들 가운데서도 더 만만한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다른 자식에게는 말을 못하고, 부탁하지 못해도 만만한 자식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자식이 많아도 한결 같이 깐깐하다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 아닙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하시고 싶으신 일, 어렵고 힘든 사람을 좀 도와주고 싶은데, 위로하고 싶은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이 있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실 때 그 중에 만만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한결 같이 인색하고 까칠하다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목회자인 저도 목회를 하다가 교회를 위해서, 또 한 어려운 이웃을 보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만만한 사람이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하며 그 일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깐깐해서 일을 풀어갈 수 없으면 얼마나 힘이 들고 지치겠습니까? 제가 행복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목회를 하면서 함께 생각을 나누며 기꺼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만만한 사람일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인색하고 깐깐한 사람일 것 같습니까?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실 때 믿음 안에서 만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기쁨과 위로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가 헌신해야 할 일들이 곳곳에 많이 일어납니다. 결국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 안에서 만만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들은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만만하게 여기시는 믿음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남 이스라엘의 왕족 출신으로 높은 학문과 식견을 가지고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치의 역학구조를 꿰뚤어 보고, 역사 발전의 방향을 정확히 내다 본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안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패역하고 악한 세상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 할 것 없이 악을 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안을 노래하는 곳에서 멸망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과 뜻을 전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심은 ‘이사야야, 네가 나를 위해 일어나 이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청에 응한다는 것은 그의 삶이 거칠고 험한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서소’라고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편하게 여기셔서 그 일을 맡기시기 원하신다면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제가 그 일을 감당 하겠습니다’ 고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일을 맡을 사람을 찾으시던 중에 만만한 사람인 이사야를 부르시고 이사야의 응답함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서 목사, 너는 하나님께 만만한 사람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만만하게 보인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노아,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만만하게 보신 사람을 묵상하는 가운데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타고 가신 나귀 새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구약 스가랴서 9장 9절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마을에 들어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너라 만약에 누가 왜 그것을 가지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신다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풀어 가지고 옵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재산 목록 1호에 해당하는 나귀 새끼를 내어 줍니다. 

그가 누구인지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이라도 새겨지고, 역사에 남는다면 그 명예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나귀새끼를 내어 주겠지만 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헌신자입니다. 그의 말없는 헌신을 묵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만만하게 여기신 사람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만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건강이 약한 사람에게 영양제를 하나 놓더라도 부탁하면 영양제를 갖다 주시는 도호응 집사님과 근무가 끝나고 피곤하지만 교회로 오셔서 주사를 놔 주시는 이은숙 집사님의 봉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조그만 선물을 하나 전달하려고 해도 가정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손길과 그것을 가지고 땀을 흘리며 가정을 방문하는 봉사자들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학교 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해도 뒤에서 개미처럼 수고하며 애쓰는 헌신자들이 있을 때 은혜 가운데 잘 마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뒷짐을 지고 옳다, 그르다는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아닌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일할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감동을 만들고 계십니다. 

저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깐깐하고 까칠한 모습이 아니라 만만한 믿음이 사람들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뛰어난 분별력과 판단력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데 있어서는 약간 어리석을 정도로 하나님께 만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만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만만한 사람과 교회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감동을 더 크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만만한 사람,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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