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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 그 세 번째 말씀 (왕상 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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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그 세 번째 말씀 (왕상 19:9-14) 
 
 
❚세미하신 하나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합당한 말입니다. 수레에 뭔가 꽉 차 있으면 소리가 안 납니다. 그런데 빈 수레인 경우 돌멩이 하나가 들어있으면 그렇게 요란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택배를 하나 받았습니다. 상자가 얼마나 큰지요. 흔들어보니 덜그럭 덜그럭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정말 자그마한 물건 하나 달랑 들어있는데 왜 그리 포장을 거창하게 했는지, 정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실감 나더군요.

여러분,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성숙한 사람은 조용합니다. 그런데 빈 수레처럼 속이 비어있는 사람들이 제일 시끄럽고 요란한 법입니다.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은 조용한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 딱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그 작은 지식 가지고 시끄럽게 떠듭니다. 재산도 아주 많은 사람은 오히려 가진 티 안 내고 삽니다. 최근 스마트폰이 인기를 끌면서 사람과 사람을 인맥으로 이어주는 페이스북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도 이 프로그램으로 오래 전 소식이 끊긴 친구나 제자들과 연결이 되었는데 이미 지구촌 5억 명이 가입했다고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개발한 마크 주커버그라는 26세 된 젊은이는 단숨에 4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조 8000억 원의 재산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회사 근처 작은 집에 살고,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고 합니다. 그 흔한 호화주택, 고급 차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재산 벌어들였다고 호화롭게 있는 티내며 사는 빈 수레가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작은 지식, 작은 재산, 작은 권력에 취해 요란하게 사는 사이에 우리 인생은 마치 빈 수레처럼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요란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주 차분하고 세미한 분이십니다. 얼마 전 한 기독교계 신문을 보니 어떤 목사님이 이런 글을 기고했어요. 교계에서, 또 교회들마다 과연 무슨 취임감사예배, 당선축하예배 등등 요란하게 행사를 치루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총회장에 되어 감사하다고 요란하게 감사예배를 드리고, 또 무슨 연합회장이 되었다고 요란하게 취임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 국회의원 당선되었다고 무슨 시장 당선되었다고 교회에서 당선감사예배, 취임예배 드리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맞다 틀리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판단에 맡길 일입니다. 다만 그 글 맨 뒤에 나온 질문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그런 요란한 취임예배, 감사예배를 드렸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그런 요란한 예배 드리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 우리 하나님은 요란하고 시끄러운 분이 아니라 세미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빈 수레처럼 소리만 요란한 분이 아니라 정말 속이 꽉 찬, 알맹이가 꽉 찬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빈 수레 같은 분이었다면 아마 성탄절 날 대단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틀림없이 왕이 사는 궁정에서 왕자나 최소한 대단한 권세를 가진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요란한 잔치와 축제를 벌였을 것입니다. 절대 갈릴리의 비천한 목수 집안 아들로 태어나게 하실 리도 없고, 부모가 잘 방도 없어서 베들레헴 마구간에 자게 하시고 또 아기 낳아 누일 곳도 없어 초라한 말구유에 눕게 하시지는 않았겠지요. 십자가 같이 천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만 있게 내버려 뒀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런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약한 방법, 가장 무기력한 방법을 택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조용한 방법을 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도 요란하게 빈 수레처럼 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에 실속도 없고 알맹이도 없으면서 밖으로만 잘 보이려고 거창하게 포장하고, 이런저런 요란한 행사로 선전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의 방법은 오히려 아주 조용히, 아주 겸손하게, 아주 낮게 그러나 가장 실속 있게, 가장 능력 있게 드러나는 방법입니다. 그야말로 “소리 없이 강하다”는 말이 꼭 맞으시는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맞겠지요.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는 빈 수레 같은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참 요란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이 무슨 대단한 권세인 양 행동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방언 등 은사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깔보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늘 잡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 중에 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재산 좀 가진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가 늘 시끄러웠습니다. 교회 오래 다닌 사람과 교회 새로 나온 사람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좀 잘 난 사람, 가진 사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얼마나 잘 난 체 하고 왕 노릇하려고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그런 반면 9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복음 전하느라 수고를 제일 많이 한 바울 일행을 어떻게 대하셨는지가 나옵니다.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생략...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제일 수고하고 고생한 바울 일행을 이렇게 박대하고 제일 약하고 못난 자들로, 찌꺼기 같은 인생으로 만드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조용한 듯 하나 가장 강인한, 가장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지만 가장 분명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열심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지난주까지 엘리야 선지자의 탈진과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주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엘리야를 위로하고 회복시키신 방법은 엘리야를 만나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 읽었던 열왕기상 19장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호렙산은 시내산이라고 했습니다. 지치고 탈진한 엘리야를 쉬게 하시고 먹이시고 난 뒤 그 힘으로 사십 일 밤낮을 걸어 시내산, 호렙산에 이르게 하십니다.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동굴 속에 들어가 머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전히 엘리야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피하게 하고, 쉬게 하고, 먹게 하셔서 엘리야를 회복시키시지만 오늘 이 대답을 보면 엘리야는 여전히 아직 피곤하고 힘들고 탈진해 있습니다. 완전히 회복이 안 된 것입니다. 이 말을 요즘 말로 다시 풀어볼까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정말 열심히 믿었잖아요?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하고 제일 충성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왜 나 홀로 싸워야 합니까? 왜 나 혼자만 이렇게 죽어라 일하는 겁니까? 아직도 아합과 이세벨 같은 원수들은 저를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저한테만 이렇게 심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데 문제가 해결 안 되냐? 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오냐?” 이런 말 우리가 참 많이 하지 않습니까? 또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믿고 봉사하는데 왜 나 혼자만 만날 고생하고 사냐?”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복 받고 잘 되어야 마땅하지 왜 오히려 더 고생하고 외롭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문과 불만 가진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엘리야도 지금 똑같은 의문과 불평을 하나님께 늘어놓은 것이지요. 왜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불평과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고생도 제일 많이 했는데 왕 노릇은커녕, 인정과 칭찬은커녕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굶고 잠 못 자고, 매 맞고, 죽을 뻔 하고, 제일 밑바닥에서 찌꺼기 같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차이는 이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이 뭔지 이해했기에 그 고생을 하고도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고, 엘리야나 오늘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왜 나만 이 고생이냐고 나한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 점검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의 열심이 과연 제대로 방향이 잡힌 열심인지 말입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우리도 하나님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삽니다만 방향이 제대로 맞아야 소용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열심을 품고 일을 하되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야지 말은 하나님 위해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열심을 품고 나 나름대로 내 방식대로 열심히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나님의 열심은 오직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중매쟁이가 열심히 중매하듯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엘리야는 열심은 열심이로되 진정 하나님의 열심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허탈하고 낙심하지요. 그렇게 열심히 하고도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내 열심, 나를 위한 열심히 아닌 오직 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도 주를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세미한 은혜

이제 이렇게 불평하고 아직 회복되지 못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키시는지 봅시다. 11절부터 12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이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엘리야에게 동굴 안에 처박혀 원망만 하고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하나님 앞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도 엘리야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조금만 힘든 일 있으면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남들을 원망합니다. 그러고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것처럼 오늘날 세상 많은 사람들은 ‘동굴의 우상’ 속에 살아갑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서, 자기 고집과 주장 속에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한 엘리야가 동굴 속에 처박혀 투덜대고 있는 것처럼 좀 힘들다고 자기 동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혼자 좌절하고 혼자 세상 짐 다 진 것처럼 한숨 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동굴 속에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빨리 나와서 하나님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안 그러면 자신의 동굴 속에 갇혀 한숨 푹푹 쉬다가 그대로 죽고 맙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빨리 지금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동굴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어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앞에 선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소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본문 11절부터 잘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소리 가운데 임하시는지 말입니다. 첫 번째로 크고 강한 바람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 바람 소리 속에 하나님이 임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그 바람 소리가 얼마나 강하고 큰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 정도로 강력한데도 하나님은 그 소리 속에 임하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는 어떤 소리입니까? 지진 소리입니다. 지진이 얼마나 크고 무섭습니까? 세상이 다 주저앉을 정도로 강하고 큰 굉음을 내는데 그 지진 소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세 번째 소리는요? 불 소리입니다. “아니, 불이 무슨 소리가 있습니까?” 하시는 분은 어렸을 때 그 재미난 불구경을 못해본 분들입니다. 불구경 하다보면 정말 불이 활활 소리를 내며 탑니다.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강하고 큰 불 소리 중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에 어떤 소리가 납니까? 아주 작은 소리입니다. 세미한 소리입니다. 히브리말 원어에 보면 이 말이 ‘고요할 정도로 아주 작은 속삭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소리, 지진 소리, 불 소리가 아닌 들릴까 말까한 너무나 작고 세미한 속삭임 속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가나안의 신들이나 세상 모든 다른 우상들은 등장할 때 얼마나 엄청난 소리를 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폭풍이나 지진, 번개 같은 엄청난 소리가 나면 신이 나타나는 소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신들과 달리 너무나 작고 고요한 중에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잘난 방법, 대단한 방법, 요란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주 작지만, 낮지만, 부족하고 약하지만 그 세미한 소리 속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가청범위(可聽範圍)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크기는 약 20~2만Hz 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범위를 넘어서는 너무 큰 소리나 작은 소리를 우리는 못 듣는 것이지요. 하지만 동물들 중에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범위의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코끼리는 인간의 가청범위 아래에 있는 20Hz 이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개는 인간의 가청범위 위쪽에 있는 4만Hz 이상의 주파수를 들을 수 있고, 고양이는 5만Hz 이상, 돌고래는 최고 15만Hz까지 듣는다고 합니다. 동물이 인간보다 소리에 훨씬 더 예민한 것이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아주 세미하고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소리뿐 아니라 못 보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지 않으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는 복음성가 가사처럼 우리의 작고 세미한 소리도 들으시고 귀 기울이는 예민한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영적으로 예민한 성도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크고 놀랍고 웅장한 방법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깨닫지만 아주 작고 세밀한 방법으로 임하시는 은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대단한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만 요란하게 임하시던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세밀하게 임하시는 은혜가 더 크고 놀라운 법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해서 영적 가청범위가 넓어져야 그 세미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저 사람처럼 큰 은혜와 응답을 저에게는 안 주십니까?” 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날마다 매 순간마다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건만 네가 깨닫지 못한 것뿐이다!” “하나님, 왜 저 사람처럼 저에게도 응답해주지 않으십니까?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십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늘 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안 빠지고 늘 응답했는데 너는 그 세미한 내 음성을 듣지 못한 것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어디서나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은혜를 예민하게 깨닫고 살아가는 능력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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