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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줄 (겔 20: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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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줄 (겔 20:33-39)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 유혹은 이방 나라인 애굽, 앗수르,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보다 잘살고, 강대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이 여호와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방 국가의 형통함과 번영을 보고 이방 국가가 섬기는 우상들에게 끊임없이 미혹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우상들이 축복과 번영을 준다고 하여 애굽의 우상과 앗수르의 우상을 들여왔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불태워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몰렉 신까지 들여왔습니다. 이런 유혹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다윗 시대의 성가 대장을 지낸 아삽도 미혹을 받았습니다. 

시 73편 12절로 13절입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가 대장이 되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가 대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세상 사람들을 보니 악인들이 번영하고, 평안하고, 재물을 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실로 헛된 일이라고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시편 73편 2절로 3절입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조차도 이방 나라의 번영을 보고 이방 나라의 우상에 마음이 흔들리고, 실족할 뻔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일반 백성이 느끼는 유혹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삶의 고난이 오고,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번영이 오고, 형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비슷한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겔 20장 1절을 보게 되면 에스겔 20장의 메시지가 언제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 온 것이 B. C 598년입니다.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났으니 B. C 591년에 임한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포로 된 지 오 년 째에 말씀이 한 번 임했고, 육 년째에 임했고, 칠 년째에 말씀이 임했습니다. 매년 한 번씩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 두어 사람이 와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물었는지 뻔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포로에서 언제 해방되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언제 돌아가겠습니까? 이방 나라처럼 언제 번영을 누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바벨론의 포로로 칠십 년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자리 잡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 두어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말씀을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을 또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소원을 우상에게 빌어 이루려고 합니다. 자신의 뜻에 맞게 신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웨이터입니다. 이것이 샤머니즘(shamanism)의 정신이고, 이방 종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정신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정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해서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상 숭배와 기독교는 이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이 장로들은 마음속으로 우상 숭배하는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물으려고 하니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 하지 않으신 대신에 장로들 마음속에는 우상 정신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에스겔 20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에는 귀재이십니다. 너희 우상 숭배는 애굽에서 시작되었고(5-9절), 광야 40년 동안에도 우상 숭배는 계속되었고(10-26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우상 숭배는 계속되었고(27-29절), 심지어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도 우상 숭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30-32절)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 32절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장로들의 마음속 생각을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은 결코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올 때 하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세 가지 반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Ⅰ. 그런 계획이 성공 할 수 있을까? 

택한 백성이 마음에 우상을 품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번영과 부요를 누리고자 할 때 그런 계획이 성공 할 수 있습니까? 답은 ‘결코 성공 할 수 없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우상 목석을 숭배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구별되지 않은 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절대 인정하지도 않고, 축복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마음에 품고, 우상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찌라”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품고 나오는 주의 백성은 맹세하시고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상 숭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 결혼시킨다고 날 받으러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점치러 다니지 마시고, 사주팔자 보러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에게 물으러 다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명절에 유교식으로 제사 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분노로 엄하게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이방 나라에 숨어 우상 숭배 가운데 번영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내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이 이방 나라에 섞여 살고, 편하게 사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분노하시므로 이방 나라에서 모두 끌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계획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끌어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숨어 살려는 것을 인정치 않으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싫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만 잤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놔두실 리 없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게 하시어 선원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누구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힙니다. 하나님은 배 밑창에서 요나를 끄집어내어 고래 뱃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아닌 척하고 술집에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숨어서 우상 숭배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에 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Ⅱ. 택한 백성이 우상숭배하고 이방나라에 숨어 살면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본문 35-36절입니다.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내가 애굽땅 광야에서 너희 열조를 국문한 것 같이 너희를 국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방 나라에 섞여서 우상 숭배하고,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끄집어내어 열국 광야로 모으십니다(the desert of the nations). 그리고 그것은 우상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 광야에서 국문한 것처럼 열국 광야(the desert of the land of Egypt)에서 국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집트라는 땅 자체가 광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살게 하실 때 처음부터 노예로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 될 때에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 아들들을 살려 주시려고 애굽으로 오게 한 것입니다. 요셉은 고센이라는 땅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이 잘 먹고, 잘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우상에게 이끌리고,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왕을 바꾸어 버립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일어나 노예로 만든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은 우상 숭배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의 고통을 애굽땅 광야라고 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을 먹으면서도 우상 숭배의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열국 광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 열국 광야는 포로 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노예 생활의 고통은 애굽땅 광야요, 포로 생활의 고통은 열국 광야입니다. 열국의 우상을 섬기고, 열국처럼 번영을 누리려고 했지만, 포로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열국 광야는 포로 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영적인 광야입니다. 이사야 21장 1절에 보면 바벨론을 광야라고 불렀습니다. 

또 에스겔 19장 13절을 보면 바벨론을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열국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우상 숭배를 심하게 하니깐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끌어모아 칠십 년 동안 국문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영적 광야로 이끌고 가십니다. 고통을 주십니다. 슬픔이 있게 하시고, 눌림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영적으로도 메마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영적인 광야가 찾아오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살았는가?’ 또 ‘내가 내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욕심을 이루어 달라고 했는가?’ 샤머니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웨이터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내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하게 되면 나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던 존재가 도리어 변하여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열국 광야입니다. 

Ⅲ. 하나님이 열국광야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에스겔 20장은 보배 같은 세 가지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기 27장 32절에 보면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소와 양의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문을 다 열어 놓는 것이 아니고 반만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문에 막대기를 놓습니다. 한 마리씩만 막대기 밑으로 지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열 번째를 하나님의 십일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스무 번째, 서른 번째 받으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받은 여호와의 것을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하니깐 열 번째, 스무 번째를 약한 것, 못생긴 것으로 갖다 놓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와 양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아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어떤 농부에게 소가 두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데 한 마리가 병들어 죽게 되자 죽은 소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백성도 못된 마음을 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법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짐승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것과 아닌 것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이 광야를 지나게 되면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과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어려움을 겪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도 별 볼일 없다고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어렵다고 나가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은 참된 백성입니다. 

6·25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민군이 총을 겨누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남아 있으시오! 믿지 않은 사람은 다 나가시오!” 다 나가고 목사님과 장로님만 남았습니다. 그 때야 인민군이 총을 내려놓고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교회에 진실 되게 예수 믿는 사람 둘밖에 없습니다. 당신 둘만 살려 주겠습니다.” 

포로 생활의 고통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흡수되어 이방인처럼 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자가 되어, 남은 자(the remnant)가 되어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별해 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남은 자를 언약의 줄(the bond of the covenant)로 매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검은 보자기에 싸여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말을 했습니다. 막대기 밑으로 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로 된 짐승들을 다 묶어서 구별해 놓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국 광야 가운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언약의 줄로 묶어서 참된 구원,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저도 이 말에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선지자는 은혜의 언약을 계속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에 36:24-28).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될 남은 자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의 언약(새 언약)입니다. 남은 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았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거룩해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심으로 남은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막대기로 지나게 하고, 언약의 줄로 묶고, 너희로 하여금 나를 예배하게 하는 백성이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잘나서 구원받은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불신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택하여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자랑하고 높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벌써 술 먹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을 가리켜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았으면 우리도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택하시고, 남은 자가 되어 은혜의 언약을 따라 언약의 줄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남은 자로 하여금 참된 예배를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참된 예배는 참된 회개(에 20:43)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무슨 죄가 크다고 죄인이라고 하십니까,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참된 예배는 참된 지식(에 20:44)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참된 지식이란 머리로 아는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기도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 이것이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예수 믿고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되었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신앙입니까? 기도해서 한 번도 응답받은 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번 양수리 수양관 집회 모두 올라오셔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 충만 받기를 바랍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올라와서 부르짖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예배는 참된 헌신(에 20:40)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첫 열매도 요구하시고, 예물도 요구하실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받으시라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불신자들하고는 인생의 성공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우상 숭배하고 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상관하십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해서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배 생활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인생 전체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 되어 예배에 나오셨습니다만, 계속 나오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주일 집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오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예배 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내 영혼이 곤비하고, 인생의 모든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배가 먼저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육신의 강건한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입니다. 

성도가 마음에 우상을 품으면 인생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열국 광야가 찾아옵니다. 또 예배의 동기는 내가 죄인임에도, 지옥 가야 할 마땅한데도,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택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내가 구원 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은혜다라는 것을 알고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의 동기입니다. 예배의 자세는 이미 저지른 악과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내 생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피 값을 주고 나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지방회가 있어서 월드비전교회에 갔습니다. 목양실에 가보니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현수막에는 “너의 주인은 예수님임을 잊지 마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매일 그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 시간,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달라고 하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주인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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