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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이 될 사람 (삼상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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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될 사람 (삼상 16:1-13)


영화를 볼 때 잘 만든 영화일수록 등장인물과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그를 동정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가 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이기면 내가 이겼다는 생각을 하고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면 내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생각되고 주인공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문학의 위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화관을 나올 때 기분이 으쓱으쓱 하든가 또 비장한 마음이 들면 그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아이들로 시작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골리앗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다윗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약하고 상대방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울산에 있는 중공업에 가보니까 가장 큰 기중기를 골리앗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외에는 자기를 골리앗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성경은 픽션이 아니에요. 문학적인 효과를 쓴 효과를 위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냉정합니다. 사랑과 사람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국물이 없습니다. 이스마엘을 내쫓은 일, 얼마나 냉정합니까. 또 에서가 축복에서 제외된 일, 얼마나 철저합니까. 사울 왕이 버림받은 일, 얼마나 엄합니까. 성경은 내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내 현실을 반영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 불허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1970년대 숀 코넬리 주연의 왕이 될 남자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 나오고 얼마 안돼서 타임지가 영국의 찰스 황태자를 표지 인물로 선택하면서 왕이 될 남자라는 제목을 내 건 적이 있습니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에요. 그러나 찰스 황태자는 아직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이 될 남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연세가 많지만 본인도 나이가 많아요. 정말로 왕이 될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일은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 3주 동안 믿음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믿음이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아주 귀중하고 단순한 믿음의 원리에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나 저나 그 한마디 말씀을 기다리고 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그 한마디 말씀, 그 결정적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12절에 ‘이가 그니’ this is the man-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이 한마디에 다윗의 운명이 결정됐습니다. 반대로 다윗의 형들의 경우에는 그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얼마나 냉정합니까. 우리가 다윗과 같은 입장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 형과 같은 입장에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고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겠습니까.

미국의 사형제도에 대한 TV다큐멘터리를 보노라니 집행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집행당하기 전과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형수가 남긴 유언이 ‘나는 인생이 내게 준 패대로 살았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건 카드게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카드를 돌릴 때 그것을 패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이 내게 돌린 패대로 살았을 뿐이다.’ 

이 말은 ‘내 운이 나빴다. 내 환경이 열악했다. 내게 주어진 환경대로 살다보니까 이렇게 되었다.’라는 뜻인데 여러분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이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패를 나눠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패를 나눠줍니까,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결정됩니까. 세상에는 다윗처럼 임금이 될 운명이 있고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는 운명이 있고 임금의 꿈도 꾸지 못할 운명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각 사람에게 패를 돌리시는 분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운명은 정해졌는데 뭣 하러 믿음이니 신앙이니 도움이 되겠습니까. 각자 자기의 운명대로 살면 되지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얘기입니까. 그건 성경의 메시지가 아니에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은 운이 좋고 그 형들은 운이 나빴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믿든지 말든지 다윗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임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고 다윗을 통해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을 읽을 수 있어야 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째는 인생의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장차 왕이 될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기존의 왕은 자격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세상에 사람이 많지만 쓸 만한 사람은 의외로 없습니다. 기존의 임금이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일꾼은 늘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기회는 언제든지 존재합니다. 

제가 신문을 읽어보니까 197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에 재벌 기업이 된 회사는 STX와 웅진밖에 없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존의 재벌들이 꽉 잡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불행한 현실이지요. 우리나라에 미래가 있으려면 새로운 기업도 대기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됩니다.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에게 축복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몇몇 대기업은 사상 초유의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쪼들리고 있다는 이것은 정말로 불행한 불공정한 현실이 아닐 수가 없지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희망을 잃습니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 부자는 계속 부자이고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고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성경의 사상이 아니에요. 성경의 사상은 무엇이냐. 기존의 임금이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존의 사울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름 부으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1절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기름 부음은 임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름을 부으실 사람을 찾습니다. 기름 부음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 ․ 성령 ․ 축복 ․ 선택 ․ 직분을 말합니다. 이 세상 기존의 임금, 기존의 지도자, 기존의 부자, 이들 중에 자격을 잃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준비된, 하나님이 새로 선택할 수 있는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준비가 돼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세상에는 기회가 존재합니다. 

두 번째로 인생의 기회는 우연하지 않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 우편 강도가 우연히 구원받은 게 아니고 베드로가 우연히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우연히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우연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도박이 아닙니다. 운이 좌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good luck’ 이 좋은 말이 아니에요. 

인생은 운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우연히 왕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만이 보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기준이에요.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이 말은 외모를 보지 말라는 뜻보다는 사람은 외모밖에 볼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중심을 볼 수가 없지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없지요. 외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기준은 첫째는 변덕스럽지 않고 사람의 기준보다 공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옳고 그리고 사람이 그것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세간에 유행하는 자기개발에 대한 책들을 보면 처세술을 강조하고 인간관계의 테크닉, 기술을 가르치는 책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처세술이 아니에요. 우리의 처세술이 하나님에게 먹혀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처세술로 하나님까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가를 보신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제가 그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사람이 이유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마는 열일곱 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제 나름대로 주님에게 신실하게 충성을 바치면서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제가 경험한 것은 제가 주님을 높이려고 하면 주님이 반드시 저를 높이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반대로 제가 제 자신을 높이려고 했을 때는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신실한 신앙생활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밀히 보신다고 했습니다. 은밀히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이 보시던 사람을 선택하는 날이 옵니다. 그것은 우연히 아니에요. 평소에 하나님이 묵묵히 지켜보시던 사람을 선택하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이 오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걸 모르면 신앙생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생각,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이 들었을 때 거부하거나 싫어하거나 어려워하거나 반대하거나 핍박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수님의 말씀,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고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이 있었어요. 공자님의 말씀이든 석가모니의 말씀은 그런 식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격렬한 반대를 일으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지고,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자기 생명을 구하려하면 잃고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구하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반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관심하면 차라리 나아요. 무관심하다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는데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그리스도인 중에도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얘기에요. 저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 마음에 안 드는 말씀도 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하십니다. 변해야 되는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변해야 됩니다.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반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상태에 대해서, 나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내가 변화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망이 되고 때로는 싫은 감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시사하는 것은 우리 안에 뭔가 변화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목적으로 우리가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100 다 이해하고 100 다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천국 갈 준비가 된 분들이에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내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도 있다 그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 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되고 싶어 보인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이런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셨는지 몰라요. 이런 야망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셨는지도 몰라요. 임금이 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임금이 될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그의 형들, 그 형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사무엘이 ‘임금 될 자가 여기 있도다’ 임금 될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하나님 음성이 오기를 ‘이 사람이 아니다 너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그래서 이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계속 가다 보니까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당신의 아들이 이게 다입니까?했더니 이새가 말하기를 ’아직 말째가 있는데 들에서 양을 치나이다‘ 다시 말하면 그 아버지도 막내아들이 설마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윗 자신도 야망이 있다면 그 자리에 와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그 욕심이 없었어요. 그 아버지도 말째가 그런 인물이 될 줄 몰랐어요. 아마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 그것이었는지도 몰라요. 다윗에게 자기가 임금이 되려는 마음, 야망이 없는 것을 하나님은 순수하게 보시고 겸손하게 보시고 거기에서 뭔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런 뜻입니다. 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불필요한 욕심, 인간적인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이 한마디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이다’ 선택하시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다윗이 시련이 시작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기름을 붓고 나니까 그에게 주어지는 능력 ․ 기회도 있지만 이제 그에게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임금이 될 때까지, 임금이 된 후에도 그에게는 줄곧 시련이 따라다녔고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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