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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가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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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가 (시 1:1-6)


제가 미국에 처음 간 것이 1980년도 초반이었는데, 미국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때 미국을 돌아보면서 되풀이 한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복 받은 나라다. 이렇게 복 받은 나라가 있는가?” 몇 번이나 그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외국을 갔다 입국하면 저절로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30년 전에 미국을 보면서 했던 소리 그대로입니다. “‘우리나라 참으로 복 받은 나라다. 우리나라 국민들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복 받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다 복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 공감하실 것입니다. 복 받은 나라에도 복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복 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들 가운데서도 복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내가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에 또 개인 주변 환경이 그렇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IMF라든지 다른 좋지 않은 국제정세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내 가정이, 내 가족이 복 받은 사람이 되면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나라가 아무리 어려워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식이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 좋고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복 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시편 1편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을 해줍니다. 시편 1편의 첫 마디를 히브리 원어로 말하면 ‘아쉬레이 하위시’ 즉 이 사람들은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들인가?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말로 쉽게 번역했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 제가 복 받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보다 제 아들, 제 딸이 복 받은 사람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이런 소원을 하십시오. 또 하나는 결단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든지 제가 복 받은 사람이 되고 말 겁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아들, 딸이 복 받은 사람이 되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신앙만 하는 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결심 결단만 하는 그것도 아니 될 일입니다. 기독교는 둘이 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결단과 노력이 합해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믿음만 가지고,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 도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둘 다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1절이 그 대답을 해주십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시지만 사실 세 가지 다 비슷합니다. 힘들게 따지면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만 다 비슷한데, 이 뜻을 세 번째 오만한 자가 잘 설명해주십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비웃는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비웃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이런 일까지 관여하시는가?”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두고 “그저 좋은 말일뿐 그 말을 다 믿을 수 있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쉽지 않습니까? 참으로 쉽습니다. 제대로 알면 됩니다. 괜히 인생 어렵게 살 필요 없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은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 어떤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누구와 대화를 많이 하고 누구의 말을 많이 듣는가에 따라 사람이 바뀝니다. 그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에 따라 괜찮은 사람들도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잘못 나가는 사람들도 똑바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어머니 흉보는 사람들이 나중에 시어머니 닮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시어머니에 대해 말하면서 시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게 되므로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이 죽고 한 후, 그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왕의 이름이 ‘르호보암’입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의 대표가 왕을 찾아와 “왕이여, 당신 아버지가 계실 때 우리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왕궁을 건축하느라 20년을 보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멍에를 좀 가볍게 해주십시오.” 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긴 짓는데 정말로 그렇게 짓은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탈리아의 베드로 성당을 보았을 때 좋아 보이지만 예배당이 관광지 수입으로 살아가도 좋은 것입니까? 교인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많은 헌금으로 예배당을 잘 지으면 정말로 좋은가요? 인생이 힘들어 쩔쩔 매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회를 그렇게 짓는 것이 좋습니까? 교회가 부자가 되면 정말로 좋습니까? 정말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르호보암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흘 뒤에 오면 대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자문단을 구성했습니다.

 먼저 연세 드신 어른들을 모신 후 자문을 구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르호보암은 이 어른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말을 하기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솔로몬과 함께 있으면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인 이들은 왕에게 “왕이여,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서 그들에게 좋은 대답을 해주십시오. 왕이 먼저 백성을 섬기면 백성들이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에 꼭 맞는 대답을 했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대표에게 “여러분,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습니다.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여러분을 징계했지만, 나는 전갈 채찍으로 여러분들을 징계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 치면 자기 위상이 올라가는 줄 알고, 야단치면 자기가 높아지는 줄 알고 르호보암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르호보암과 늘 함께 하던 사람들이 이 정도였으니 그는 그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는가는 참 중요합니다. 아니라고 하면서 닮아갑니다. 심지어는 욕을 하면서도 닮아갑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결단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에 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면 좀 힘들지라도 끊으십시오.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망합니다. 망할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재주를 많이 부립니다. 속된 표현으로 하면 잔머리를 자꾸 굴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잔꾀를 부리지 마십시다. 너무 작습니다. 하려면 좀 큰 꾀를 부려야합니다. 우리 머리에 무엇이 들어있다고 자꾸 돌립니까? 거기서 나오는 것에 별 것 없습니다. 그러니 머리 쓸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자기 땅도 많이 있으면서 왕궁 앞에 있는 조그마한 포도원을 그렇게 탐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그 많은 실과를 두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합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 주인인 나봇을 불러 넉넉하게 쳐 줄 테니 자기에게 그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팔 수가 없었습니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봇은 왕에게 “왕이여, 죄송하지만 왕께서 아시겠지만 그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므로 팔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시만 내려놓으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아합은 포기하지 못하고 집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합 왕의 부인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성경에서 악한 여자의 대명사입니다. 그 이세벨이 자기 남편이 그러고 있으니 답답하여 죽을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이세벨은 “왕이여,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곧 그 포도원을 왕에게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돈으로 몇 사람을 매수하여 못된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나봇이 사는 동네에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치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봇을 치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나봇을 가운데 세운 후, 나봇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라는 말로 나봇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이세벨이 돈으로 산 사람이 “저 사람은 그럴만한 사람이 안 됩니다. 저 나봇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사람입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한 사람의 증인으로는 죄가 성립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간교한 이세벨은 이미 한 사람을 더 준비시켰습니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도 그 증인이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잔치 자리는 어느덧 법정이 되었고, 그 법정은 사형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져 나봇을 죽인 것입니다. 왕궁에서 그 보고를 받은 이세벨은 아합을 찾아가 “왕이여, 이제 가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이 살아있지 않고 죽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남편 아합은 장가 잘 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약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부러워 그들이 그렇게 칭송받는 연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어렵게 살아갈 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땅과 집을 팔아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을 보니 아마 이들 부부는 평생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존경과 칭송을 받으려고 합니다. 교인들은 좀 어수룩하여 조금만 잘해도 칭송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잔꾀를 부렸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땅 모두를 내놓으려니 너무나 아까워 자기 땅을 산 사람과 입을 맞추면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해주셔서 베드로가 이들 부부에게 “땅 파신 것이 전부입니까?”라고 물으면서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물음에 아나니아는 “전부 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삽비라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삽비라도 “그럼요, 이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교회 생활을 했지만 교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곳보다 충만하게 계시면서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잔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함께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잘 기억해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선 재주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말씀, 성경을 늘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복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별로 복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것이 쌓여 어느 틈에 복이 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조금 모자라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에 비해 좀 못난 사람처럼 그냥 하나님 말씀을 믿고 사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 맞는가? 아닌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저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가? 이럴 때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빛에 비춰서 자꾸 보아야 합니다. 

저는 양복을 입으면서 가끔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검은색이나 청색의 싱글 양복을 주로 입는데, 세탁소에서 올 때는 아래 위가 따로 오기 때문에 열심히 챙겨서 입고 나오지만 짝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검은 색 가운데서도 짙은 것이 있고 옅은 것이 있으며, 또 검은색과 청색이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햇빛에 나오면 금방 드러납니다. 그렇게 열심히 챙겨서 보았음에도 잘 보이지 않던 것이 햇빛에 나오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맞은 것 같았는데, 옳은 것 같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내 개인의 일이나 다른 어떤 일에 있어서 회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지금까지의 경험도 중요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 다수결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보다도 먼저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가, 아닌가, 하나님 말씀과 맞는가, 아닌가를 자꾸 생각하는 것,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가’를 다른 말로 한다면 복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쓰지 마십시다. 우리 머리는 아무리 써봐야 한계가 있습니다. 형광등 불빛에서 내가 색깔을 고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잘하는 것 같지만 실패가 너무 잦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얼마나 많이 쫓겨 다녔는지 모릅니다. 수십 년 동안 쫓겨 다니면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다윗이 자기를 그렇게 쫓아오는 사울을 죽일 천재일우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부하들이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유혹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너희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맡겨라.’ 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여러 가지 상황이나 정황으로 봐서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죽여도 괜찮은 것 같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한 번은, 사울이 부하 3천명을 데리고 다윗을 잡으려고 나왔을 때, 갑자기 변을 보아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큰 굴이 많습니다. 크기가 한 만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큰 굴도 있고, 몇 백 명, 몇 천 명 들어가는 굴은 참 많습니다. 경비들을 굴 앞에 세워두고 어느 굴에 들어가 사울이 옷을 내리고 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굴 안쪽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뒤는 방어하지 않고 앞만 방어하니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다윗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을 내가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하들에게도 일절 손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포위했을 때, 어떻게 하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보려고 다윗이 부하 한 사람을 데리고 적진을 정탐하러 나가보자 사울이 그 부하들과 함께 전부다 자고 있었습니다. 불침번도 없이 자고 있었으므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 때 부하 아비새가 “왕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길을 주셨습니다. 벌써 두 번째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주신 기회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직접 할 것 없이 제가 할 테니 모른 척 하기만 하십시오. 제가 죽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고 죄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한 번 찌르기만 하면 끝이 납니다. 이젠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되고 어쩌면 자기가 왕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죽이지 않아도 부하들이 하는 일을 눈감아 버리기만 해도 끝이 났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의 감정에 기울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말들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다시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다릅니다. 정반대였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르호보암을 보십시오. 그 때문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가정들이 갈라지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기도하시는 분들 모두 이런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겠습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그 아내 이세벨도 죽은 후에 그 피를 개가 핥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세시간만에 즉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좋다는 것입니다. 상당기간 동안 재주 있고, 지혜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잠시뿐입니다. 곧 망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똑똑하고 아주 멋있게 보이는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군대 시절 신병 때의 일입니다. 철책근무에 들어갔을 때 밥 당번으로 불을 피우는 일을 하느라, 산에 가서 불쏘시개로 쓸 나무를 해 와야 했습니다. 그때는 소위 군대용어로 공갈나무를 많이 해왔습니다. 공갈나무란 이파리가 퍼져 참 보기 좋은 떡갈나무, 도토리 나무 같은 것입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떨기나무가 그런 것일 겁니다. 이런 것들로 불쏘시개를 하여 불을 피우면 처음에는 불이 ‘후루루’ 잘 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이 붙지 않습니다. 공갈나무에 있는 가지에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제법 불쏘시개를 많이 넣었는데도 전혀 불쏘시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인들이 그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잘 타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을 잘 태우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인간의 재주부리는 분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좀 못난 사람처럼 사십시오. 하나님 말씀 따라 우직하게 사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 때문에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할 걸’ 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 때문에 실제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끝내는 그 모든 고생과 가슴앓이를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복 있는 사람’의 뜻이 원문에는 굽지 않고 쭉 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복 있는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건축하고 기념으로 대문 양 옆에 똑같은 나무를 하나씩 두 그루 심었습니다. 한참 세월이 지났는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한 그루는 얼마 자라지 않고 다른 한 그루는 너무나 잘 자랐습니다. 이상해서 양쪽 땅을 파보니 나무가 잘 자란 쪽에 수도관이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도관에 약간 금이 가서 물이 조금 새나가는데 그것이 그렇게 나무가 잘 자라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짝 금간대서 한 방울씩 새어나온 물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한다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라틴어 격언에 ‘Nemo repente fit turpissimu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No one reach the height of vice at once.’입니다. 단번에 악의 극치에 이르는 사람은 없다. 즉 한꺼번에 악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다보면 어느덧 내가 악인이 되고 망하게 됩니다. 재미없더라도, 잘 안 믿겨도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게 만드십시오. 자꾸 대하다 보면 어느덧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이 되고 기필코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선물을 받은 사람,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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