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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사는 사람, 경험으로 사는 사람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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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 경험으로 사는 사람 (창 12:1-9)


성경에 보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보통 복이 아닌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잘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나님을 잘 믿은 다윗은 정말로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도 참 하나님을 참 잘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녔던 길을 일부지만 가 볼 수 있었습니다. 차로 가기도 힘든 높고 험한 길들은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것을 생각하며 소름이 끼치는 것과 같은 은혜와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입과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학자였습니다. 참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입과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기 딱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실천적 열정을 가지고 몸으로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성경적 논리는 그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바울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 못지않은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 서신에 참 많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 평안, 감사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평범한 말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천국적인 축복들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바울의 삶은 그다지 부럽지 않습니다. 그가 고백한 것과 같이 많은 고난과 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과 고생을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 때문에 목이 잘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는 정말 잘 산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뻤고 언제나 감사했고 늘 평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워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참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대책도 없이 떠납니다. 왜 떠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 건지 떠나면 어떻게 해 주실 건지를 묻지 않고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이 믿어 졌습니다. 그러니 궁금하지도 않았고 불안하지도 않았습니다. 떠나라 하시니 그냥 떠났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저는 28살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28살에 낳은 아들도 너무 좋고 귀해서 버스에서 내려 3분 거리를 한 번도 걸어서 집에 가질 못했었습니다. 늘 뛰어다녔습니다. 쉰다섯에 손녀를 보았습니다. 제가 우리 손녀에 대해서 얼마나 유별난지 여러분들이 증인이십니다. 한 번은 미국에서 민희를 데리고 마켓에 갔는데 어느 한국 분이 제 손녀를 보고 ‘네가 그 유명한 민희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손자를 본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을까를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무 설명도 없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75세 때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또 비교도 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항과 거절을 관두고라도 질문이라도 했어야 했었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시냐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냐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 요구하는 이방신과 똑같이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아 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었습니다. 그런데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죽이면 그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것을 하나님께 따지지도 않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중에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 대신 양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알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믿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것과 같은 자신에게서도 자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통해서도 후사를 이어가 그 후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죽은 것과 같은 것과 죽은 것에 별다른 차이와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하는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당히 대충대충 율법을 지키는 척 하며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 하나를 잘 지켜보려고 안식일 세칙을 600 여가지나 만들 정도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 특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이 만일 그 때 자기들이 다니고 섬기는 회당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면 우리들처럼 높은 뜻 무슨 무슨 회당이라고 지었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과 법을 중히 여기다보니 자연 남보다 더 하나님의 법과 식을 잘 지키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자신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역겨웠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표현대로라고 하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 어떤 바리새인보다 하나님의 식과 뜻과 법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법에 집중하면 집중할 수록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대충대충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알면 알 수록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은 엑스레이와 같습니다. 엑스레이를 찍는다고 뼈가 붙는 것은 아닙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뼈가 붙는 것이 아니라 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어디가 어떻게 부러졌다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혈액검사와 같습니다. 저는 23년 된 당뇨병 환자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몸으로 제가 당뇨병 환자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어떤 자각 증세도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하는 혈당체크로, 두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병원에서의 혈액검사를 통하여 제가 열심히 잘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해 질 수 있는 당뇨병 환자라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저는 열심히 의사를 만나고 처방해 준 약을 열심히 먹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당뇨병 환자인 것을, 죄인인 것을 알려 주는 엑스레이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의인이었는데 율법이 있으니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시 죄인이었는데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율법을 통하여 자기가 의인이 아닌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설픈 그래서 교만해졌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들의 의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착각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자신의 행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율법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서 생긴 교리가 바로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심취해 있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를 예수님 당시의 어설펐던 바리새인과 율법사와 같은 사람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가 성경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감히 이단으로 내 몰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쓴 로마서에 비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천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 중에 하나였던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야고보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공통점은 둘 다 다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 없는 행함’을 비판한 것이고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 없는 행함’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행함 없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바울의 로마서를 잘못 읽고 소위 구원파와 같은 이단으로 빠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충동하는 것으로 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충동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서로 갈등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행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그 행함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없이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 대단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구원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함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다면 행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야고보의 말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믿음 없는 행함’이었다면 요즘 우리들의 문제는 ‘행함 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들음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들음은 행함이기도 합니다. ‘말 잘 듣는다’라고 할 때의 들음은 귀로 듣는 히어링(hearing)이 아닙니다. 들음은 행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일 때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교인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세상과 충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상식을 벗어나 행동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과 세상은 일치하고 하나님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가끔 충돌합니다. 가끔 갈등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세상과 일치하고 상식과 충돌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과 충돌하고 상식과 갈등하고 더더욱 더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과 배치될 때 서슴없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믿습니다. 상식을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 볼 수 없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방향감각이 뒤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감감대로 운전하지 않습니다. 꼭 거꾸로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도 표지판대로 운전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표지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표지판과 나의 경험과 느낌과 상식이 충돌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표지판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교통표지판만도 못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충돌하면, 말씀과 상식이 충돌하면 우리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우리와 상식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을 운전합니다. 그래서 밤낮 돌아다닙니다. 엉뚱한대로 돌아다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짓을 하며 삽니다.

장로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당회입니다. 당회는 교회의 정책을 결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정책과 방향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장로 선거를 할 때 교인들은 대개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대개 좋은 사람이 선출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좋은데 믿음은 썩 좋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일 골치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장로 뿐만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누구보다도 그 교회의 목사 장로가 예수를 잘 믿어야만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결정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상식과 경험이 믿음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그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봉사는 열심히 하지만, 주여, 주여 소리는 잘 지르지만 정말 중요한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식으로, 상식으로, 경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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