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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대하 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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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대하 21:11-20)


오늘 본문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람의 일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람은 유다 가문의 왕들 중 역대기 기자가 완전하게 부정적으로 평가한 첫 번째 왕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있다면, 그런 못된 인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일말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뿐입니다. 

우선 그의 그다지 길지 않았던 삶을 한 번 훑어봅니다. 그는 나이 서른 두 살에 아버지 여호사밧에 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대하21:1, 5). 그는 장남이었고 여러 명의 아우들이 있었습니다(대하21:2). 이 아우들은 그들의 아버지 여호사밧으로부터 은금과 보물과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하게 물려받았습니다(대하21:3). 그런데 여호람은 자기의 왕권을 확립하자마자 끔찍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아우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아내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딸이었는데 아마도 그녀와 함께 따라와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북왕국 출신 왕족들 몇 명도 죽였습니다(대하21:4-5). 외척까지 정리해서 천하의 권력을 완전 독점해버린 것입니다. 권력뿐 아니라 선왕이 남긴 금은보화와 성읍들까지도 다 자기 한 사람 손 안에 회수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사나 아버지 여호사밧은 역대에 칭찬받은 남왕국 유다의 왕들이었는데 자신의 조상들이 간 길을 따르지 않고 북왕국의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간 길을 갔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 아합의 집과 같이 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대하21:6). 

이러한 악을 행하는 것밖에 모르는 왕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셨습니다. 남왕국 유다에 복속해 살며 조공을 바치던 에돔과 립나가 배반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왕을 세우고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호람이 지휘관들과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출정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포위를 당하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대하21:8-10). 유다 동남쪽에 위치한 에돔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일찌감치 수비대를 배치했던 곳이고 그때부터 온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었었습니다(대상18:13). 

립나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져있는 블레셋과의 접경지역으로서 유다에 조공을 바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그런 에돔과 립나가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난 것이 여호람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대하21:10). 여호람은 제 손으로 제 발등을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왕으로부터 견고한 성읍들을 물려받은 여호람의 아우들은 사실상 여호람과 함께 큰 영토를 나누어 지킬 수 있는 군신이었을 것인데 그들을 제 손으로 미리 다 죽여버렸으니 독립하겠다고 변방에서 들고 일어나는 족속들을 진압할 힘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동과 서에서 에돔과 립나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여호람의 악행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은 국가적인 재앙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가정과 그 개인에게도 가해졌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맹활약했던 선지자 엘리야로부터 편지가 날아옵니다. 본문 11절은 엘리야의 편지가 날아오게 된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냈다는 것입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은 여호람이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웠기 때문에 이방족속들의 우상 신에 대한 제사의식이 거행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또 이교 제사의식에 흔히 동반되는 우상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제사장들과 성전창녀들을 집단성행위가 함께 행해지게 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까지도 따라하도록 유혹했고 타락시켰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산당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 앞에서 절하고 제사 하는 영적 간음 행위를 저지르거나 미혹될 기회를 제공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엘리야가 편지로 전하는 하나님의 징벌의 예언입니다. 본문 12-15절 말씀입니다: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그리고 역대기 기자는 본문 16-2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이 모든 일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본문 19절 하반절 이하는 엘리야가 전한 내용을 넘어서서 여호람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여호람에게 분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람의 할아버지 아사가 죽었을 때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하16:13-14를 봅니다: “아사가 왕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 후에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의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그것을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둘째는 여호람을 역대의 왕들처럼 열왕의 묘실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왕들의 묘에 함께 눕지 못한 첫 번째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 그 누구도 분향해 주지 않고 왕의 묘실에 눕지도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악한 왕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징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람이 자기보다 착한 아우들을 다 죽인 죄 값을 그에게 치루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의 손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들을 다 취하게 하신 것입니다(본문 16-17절).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예외적인 사랑조차도 여호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멸문지화를 면하게 하신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유일한 은혜였습니다. 막내아들 여호아하스 하나만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보다 몇 절 앞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대하21:7) 합니다. “항상 등불을 주겠다.” 하신 말씀은 다윗의 가문이 몰락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와 주권과 통치와 인도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놀랍고 다양하며 우리의 이해를 멀리 뛰어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오늘도 이 순간순간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선하고 의로운 이들이 이유를 알 수 없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겪어도 모르시는 듯 사태수습에 개입하지도 않으시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으시며 악인들이 기고만장하며 승승장구하게 내버려두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 잘 하고 남 음해하기를 밥 먹듯 하고 악한 자들끼리 작당해서 치부하며 권력 행사고 거들먹거리는가 하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손해만 보고 오해만 사며 오히려 부정했다고 공격받고 명예를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악한 자들끼리 돈과 권력을 가지고 짜고 하면 이길 길이 없습니다. 진리는 결국은 승리하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은 헛소리 같게만 들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인지, 뭐하고 계시는지, 왜 가만히 계시는지, 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지 않는지, 왜 나의 이 원통함을 알아주시지 않으시는지, 왜 온 천하에 나의 무죄함과 결백함을 증명해주시지 않는지, 왜 하나님은 저런 악한 자들을 당장 벌하시고 없애버리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는가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께 항변도 하고 의심도 품고 하나님을 떠나게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그를 시기질투한 그의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갈 때 천인공노할 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들이 하는 일을 막지도 벌하지도 않으시고 내버려두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대신으로 만드시고 그의 지혜로 이집트 땅에 몰아닥친 기근에 잘 대비하여 이집트뿐 아니라 야곱과 그의 온 가족을 다 살리는 큰일을 이루시는 데 요셉의 형들의 악한 일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더 큰 의와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과 불의에 대해 당장당장 벌하시거나 반응하시지 않고 기다리시며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사의 인도방법과 섭리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일시적인 악과 불의와 부조리를 참고 견디며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무슨 짓을 해도 언제나 아무런 반응을 안 하시거나 항상 늦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빨리, 때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며 당장 벌주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여호람의 경우입니다. 오늘 여호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람이 자기 아우들을 다 죽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다 데려가셨습니다. 

여호람이 그의 에돔과 립나를 그아우들의 소유였던 성읍들과 금은보화들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자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잃게 하셨고 블레셋과 아라비아로 하여금 유다를 침략하여 그의 모든 재물을 탈취하게 하셨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여호람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산당을 세워 우상 신을 섬기게 만들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받아야 할 왕으로서의 모든 존졍심을 다 잃게 하셨습니다. 

그는 왕이 죽어 받아 마땅할 기본적인 예우를 박탈하셨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분향하는 이도 없었으며 그는 와의 묘실에 눕지도 못했습니다. 정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어떤 벌을 안 내리고 계신다고 해서 모르고 계시거나 적당히 넘어가시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다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실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모든 죄는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정확하게 책임을 물으시며 정확하게 벌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도 하고 죄지은 당사자에게도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여호람의 죄는 자기의 창자가 빠져 죽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가족 모두에게 치명적으로 미쳤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본문 끝 절에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놈 참 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소리 들으면 헛 산 것입니다. 

실컷 살아 놓고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회개할 것 다 회개하고 용서 빌 것 다 용서 빌고 깨끗하게 편안히 죽을 준비들 합시다. 오늘 본문의 여호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될 것인지, 어떻게 죽어서는 안 될 것인지, 그 부정적인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후회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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