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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욘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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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욘 3:1-10)


하나님은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내 상황이 불완전 하다든가, 내 현실이 불완전 하다든가, 내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에게 완벽주의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보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주의 능력에 붙잡혀 순종하고 의지하면서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 한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 역사가 내 생애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위로를 찾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위로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위로를 찾아서 여기에 왔고, 그래서 위로를 받고 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네가 위로를 찾았으니 그 위로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성경에 이런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를 찾으십시오.  내 삶이 감화와 감동으로 온 몸이 전율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생포되는 그 진리에 눈을 뜨십시오.  오늘 우리는 자장가를 들으려고 이 뜨거운 태양열을 헤치고 이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 심령을 가르고, 내 골수를 쪼개어서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내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붙잡고 일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사명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던 배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배 밑층에서 잠을 자다가 큰 폭풍을 만나게 되는 아주 곤고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다에 던져지는 수치까지 당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요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불순종하고 제 길로 가면 그 한 사람 때문에 가정에 폭풍이 몰려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교회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직분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 고집으로 나가면 재난을 불러오는 동기 부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오는 축복의 동기 부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장에서의 요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지난 시간에 살펴본 2장에서의 요나는 철저하게 굴종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불순종하면서 도망을 가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폭풍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 바다에 던져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라는 극단적인 징계를 통하여 굴종이라도 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는 음부의 깊은 고통 가운데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살점이 녹아 내리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사의 확신이 없는 그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굴종을 배웠습니다.  순종하면 내가 살고 가정이 살지만, 불순종하면 나도 죽고 가정도 죽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순종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순종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곳까지 요나를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온전히 순종하지를 못하면 자신의 의지를 꺾어서 굴종이라도 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자신의 뜻을 꺾지를 못해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 너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집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순종을 하십시오.  그러나 순종하기가 힘이 들거든 굴종이라도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굴종이라도 하지 않으면 물고기 뱃속이라는 그 고난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굴종이라도 하고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의 입을 열어 세상으로 나오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가 굴종이라도 하고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 사명의 현장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신다면 묵묵히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기가 어렵다면 굴종이라도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일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 뜻과 자기 고집을 내세워서 자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요나,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에 가서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도망가던 요나가 변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 앞에 굴종이라도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가 굴종이라도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제2의 멋진 인생을 허락하셨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솔직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역한 자를 다시 쓰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요나를 대신해서 불러 쓸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 가면 요나가 아니라도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차하게 그를 다시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서 기어코 일을 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뱁새가 황새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너무나도 자주 불순종합니다.  그저 단순히 불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놓고 대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풍성하신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한 번 이상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렸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우상 상인이었던 가정에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은 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하란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민족 구원의 사명을 받은 모세도 자신의 주먹과 혈기로 실수를 범하고 미디안 광야로 물러가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부르심을 받아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역시 그의 각오와 서원은 비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주님으로부터 다시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아직도 하란에 머문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모세처럼 자신의 방법대로 세상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처럼 낙심의 자리에서 비전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다시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나타내신 자비와 긍휼에 힘입어 또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우리가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1장 2절에서 요나에게 주셨던 첫 번째 말씀과 그 내용이 똑같은 말씀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처럼 이랬다, 저랬다 수시로 그 말이 바뀌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처음에 하신 말씀 그대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외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선포하려고 하지를 말라는 겁니다.  백성들이 듣기에 좋은 말로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대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언자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이나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축복의 말씀보다 책망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위로의 말씀보다 징계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듣기 좋은 칭찬의 말보다는 듣기 싫은 책망의 말을 하기가 더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좋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 오늘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뜻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하시는 사도 바울의 말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 /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을 때 요나는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죽을 뻔했던 요나, 그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난보다 더 무서운 고난이 임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시겠지만 그러나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 보면,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우신 축복의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하룻길을 행하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는 이 단순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나가 전한 말은 원문 히브리어에 의하면 다섯 마디밖에 안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호드 아르바힘 욤 베니네베 네파케트."  이렇게 딱 다섯 마디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다니면서 많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섯 마디 말만 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진지해 지더니 집으로 돌아가서 땅바닥에 앉아 회개하고 금식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리자 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어 던지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입는 베옷을 입고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짐승들에게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온 나라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40일만에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애초의 마음을 바꿔서 그 성을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가 어느 정도의 성인가에 대해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여러 가지 자료와 연구한 글들을 보면 대단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성벽 높이가 30미터 정도였습니다.  즉, 10층 아파트보다 높은 성벽이 둘러있는 성입니다.  그 성벽의 두께가 전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남한 산성에 있는 성곽 같은 것은 화장실 뒤에 둘러놓은 돌담과 비슷할 정도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성입니다.  경비병들이 파수를 보도록 성곽에 둘러가면서 세워 놓은 탑이 1500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하루종일 걸으면 한 20마일을 걷는다고 하는데 성경에도 삼일 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삼일 동안 돌아다녀 봐야 겨우 그 성을 한 바퀴 돌든지 했을 만큼 대단한 성입니다.  어린아이들만 12만명이니까 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인구가 거의 줄잡아 10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2800년 전에 이런 규모였다면 얼마나 대단한 성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아주 초라한 요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 하나가 전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얼굴도 빨갛고 머리털도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된 남자, 정말 쳐다보면 웃음부터 먼저 나올 정도의 몰골을 한 어떤 낯선 남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성에 들어가서 이길 저길을 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고 외치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구경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본문 5절과, 6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전한 말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요나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말씀이 너무나 두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무론 남녀대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이러자 그 소문이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왕이 당장 그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땅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어린아이까지 금식해라.  짐승까지도 금식시켜라."

그리고 8절에 보니까 무엇을 하라고 명령했습니까?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잘못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회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나쁜 짓을 전부 다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말만으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입술만의 자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뉘우침이나 죄책감과도 다릅니다.  회개는 죄악된 곳으로부터 돌아서는 완전한 방향 전환이 있어야만 합니다.  회개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자리를 바꾸는 것이요,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가령, 탕자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가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니느웨 성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니 이것만큼 큰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게다가 그 회심이 철저한 회개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은 요나가 전한 다섯 마디의 말에 비하면 너무나 은혜스럽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는 "회개 안 하면 너는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냥 들으면 섬뜩하고 좋은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면 너도 살고 너희 가족도 산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듣기만 해도 마음에 불안이 사라집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그 마음에 소망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갇힌 자와 억눌린 자에게 전해지는 자유의 선포, 병든 자에게 전파되는 치유의 역사, 죄짐을 지고 씨름하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이 선포되는 이 복음을 맡기시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짭니다.  지뢰는 밟아야 터집니다.  안 밟으면 안 터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도 내가 전해야만 생명을 구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도 성경 말씀 속에 담아두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냥 배우고 머리에 담고만 있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전해야 합니다.  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전하기만 하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니느웨 성에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기만 하면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려면 우리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됩니다.  19세기 말, 이 땅이 암울하던 시절에 존 로스, 맥킨타이어와 같은 선교사들이 처음에 만주 땅을 방황하면서 그저 가난하게 살던 한국 사람들을 불러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1879년도 경입니다.

그럴 때 이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백홍준이라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이응찬이라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두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젊은이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도로 들어와서 가난하게 사는 시골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그 당시에 복음을 전할 때 100년 후에는 이 나라 국민의 1/4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이 되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한국에 일어났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입을 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완악한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복음에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능력이 안 일어납니까?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1초의 기회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맡기신 이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이 너무나 소중해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우리를 보고 부러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일을 감격하면서 못하는 것입니까?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교회에서는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 사람을 향한 위대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 사람을 통하여 성취하시고자 원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부르셨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신 사명에 "아멘!"으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니느웨의 부흥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도록 사모하십시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마음으로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니느웨의 부흥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부흥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목사로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오늘 우리의 시대에 니느웨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부흥만이 나와 내 가정과 이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부흥이 없으면 이 나라에 소망이 없습니다.  니느웨처럼 왕이 왕복을 벗고 가슴을 치고 베옷을 입고 땅에 앉아 통곡하고 회개하듯이 우리 나라 대통령을 비롯해서 모든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손에서 다 털어 버리고 회개하는 이 부흥만이 이 나라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이 부흥만이 이 땅이 살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고, 내 가족이 구원받고 돌아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모해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주여, 니느웨 성에 일어났던 그 대부흥을 우리들에게도 주시옵소서."
얼마나 이 나라가 썩었습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악합니까?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짐승 같습니까?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이 부흥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부흥을 위해서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찬양이 있습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해서 지금까지 범하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의인들이 온 땅에 가득하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가득해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함성이 들리는 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날이 오기를 사모하십시다.  그 날이 빨리 임하기를 사모하십시다.  그 날을 위하여 우리는 사명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십시다.  그 날을 위하여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며 기도하십시다.
"주여, 우리들에게도 부흥을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의 믿음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가 사명자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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