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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 (요 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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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 (요 7:37-39)


요즘 무척 더우시죠. 연일 폭염에, 열대야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렇게 무더위가 계속될 때는 시원한 바람도 좋지만, 무엇보다 시원한 물이 최고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도 갈증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덥다, 덥다 해도 우리는 더위도 덜하고 물도 그런 대로 풍부한 환경 가운데 살아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사막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사막 지역을 여러 군데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 두 군데가 있었습니다. 한 군데는 아프리카 차드였는데, 좋은 계절을 선택해서 갔고 선교 차 가서 마음 자세부터 달라서 그랬는지 그런대로 견뎠습니다. 또 한 군데는 두바이였습니다. 일부러 간 것은 아니고, 비행기 갈아타느라 잠시 내려서 자투리 몇 시간 동안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이 턱턱 막힐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덥고 목이 마른지 혼났습니다. 사막에 근사하게 도시 문명을 조성해 놓았지만, 어떻게 여기서 살까 싶었습니다. 그런 사막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우리의 상상 이상일 겁니다. 

오래 전 미국 서부의 사막 지역에 사는 인디언 지도자가 초청을 받아 뉴욕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시 당국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좋은 숙소와 음식도 제공해 주고, 관광 명소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방문을 거의 마칠 무렵 안내원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무엇이었나요?” 그러자 그는 수도를 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마시고 싶을 때 언제라도 물을 마실 수 있는 수도가 있다는 겁니다.” 으리으리한 빌딩이나 자동차도, 사람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의상도 아니고 수돗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겁니다. 사막 지대에 살면서 갈증과 싸우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팔레스틴 지역도 무척 덥고 갈증이 심한 곳입니다. 1년 내내 거의 비가 오지 않습니다. 1년에 겨우 두어 번 아주 조금씩 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표현이 바로 그겁니다. 식수도 농업용수도 부족해서 너무 힘듭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초막절(草幕節 The Feast of Tabernacle)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중 하나입니다. 초막절은 수장절 혹은 장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명칭들 가운데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초막절(장막절)이란 명칭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임을 암시합니다. 초막절이 되면 모든 식구들이 밖에다 텐트를 치고 아영하며 광야 생활을 체험합니다. 수장절이란 명칭은 추수하고 농산물을 저장한 후 감사하는 절기임을 암시합니다. 초막절은 7일간 계속되는 절기로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이 큰 날입니다. 이 절기 중에는 제사장이 매일 백성들을 인솔해서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금항아리에 물을 떠옵니다. 그리고는 제단에 쏟아 붓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조상들에게 반석을 깨뜨려 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난 한 해 비를 주셔서 무사히 농사를 짓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겁니다. 동시에 내년에도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막절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 큰 날에 제사장들이 물을 떠다 붓는 제단 옆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갈증 : 영혼의 갈증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먼저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갈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갈증도 심각하지만, 영적인 갈증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육신의 갈증은 쉽게 느껴지고 채울 수 있는 방법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인 갈증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육신은 겉으로 보이고 감각으로 느끼지만, 영혼은 잘 보이지 않고 느끼기도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육신의 갈증과 혼동하고 엉뚱하게 육신적으로만 접근합니다. 결국 영적인 갈증은 채우지 못하고 계속 헤매는 겁니다. 

영적인 갈증을 모르는 채 자꾸 육적인 것으로만 채우려고 했던 성경 인물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는 다윗왕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왕이 됐습니다. 왕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왕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최고로 소유하고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4관왕입니다. 재물, 권세, 명예, 쾌락 등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습니다. 갖고 싶은 것 다 가져 보고, 해 보고 싶은 것 다 해 본 사람입니다. 그런 인생이 어디 쉽습니까? 그런데도 전도서에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을 멀리 했던 인생의 결론입니다. 한 마디로, 참 만족이 없었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전1:8에 보니까,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침없이 다 해보았지만 허망하다는 겁니다. 

전5:10에서는 모든 소유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 정도로 인생을 소유하고 누리면 만족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그로서는 모든 것을 경험한 후 토해낸 진솔한 고백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알려져 있는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숫자상으로는 빌 게이츠가 더 큰 부자지만, 화폐 가치를 따져 보면 그가 더 부자라고 하죠.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다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회장님! 많은 재산을 갖고 계신데,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록펠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뇨.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어요!”(Just a little!)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육신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영적인 것을 놓치면 여전히 갈증이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세상 모든 소유가 마치 바닷물과 같다.”(탈무드) 소금물도 물인데,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마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가 많아지면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있을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도리어 불만이 커집니다. 세상의 소유는 우리 인간의 육신을 즐겁게 해주고, 편리하게 해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깊은 영혼은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세상 것은 당장은 만족한 것 같은데 금세 불만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가리켜 바닷물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민소득만 올라가면 행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줄 생각하는데 착각이라는 겁니다. 육식은 편리해질지 모르지만, 인간의 깊은 영혼은 여전히 곤고하고, 아니 갈수록 더 공허해진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큰 고통 가운데 멸망하고 맙니다. 

아모스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이렇게 선언합니다.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까진 인간의 영혼은 절대로 만족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물을 마시기 전까지는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다윗도 그런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유다 광야(사막)에서 쓴 시인데, 사울의 핍박을 피해 다니며 얼마나 육적으로 영적을 곤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화가 나고 한심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완전히 영혼이 없는 육체, 고깃덩어리가 된 것 같아요. 돈에 미쳐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인륜이고 도덕이고 의리고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육신의 정욕에 미친 것 같습니다. 차리라 먹을 게 없어 굶는 사람들이 그러면 동정이라도 가는데,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이 그럽니다. 이런 식이라면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불이 된다한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영혼이 황폐화된 겁니다. 심령의 사막화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해봐도 참 만족이 없는 겁니다. 

영국의 한 해변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름철이면 유명한 관광지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면 썰물처럼 사람들이 사라지고 한산합니다. 철 지난 해변을 거니는데, 갈매기 떼가 죽은 채로 널려있습니다. 한 남자가 죽은 갈매기 떼를 치우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런지 물었습니다. 여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서 빵이나 과자 등을 던져 준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받아먹다보니까 입맛이 변해서 자연산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관광객들이 사라지면 굶어죽고 만다는 겁니다. 

어쩌면 점점 더 육신적인 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갖고 있어서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야죠. 그런데 과도하게 육신의 정욕만 채우려 하다 보니까 영혼이 입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목말라면서 오히려 죽어가는 겁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렇게 육신적인 욕망만 계속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영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수박에 없습니다. 

[2]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생수의 강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갈증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37절~38절을 보십시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초막절에 물을 떠다 제단에 붓고 절기를 마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친 말씀입니다. 이렇게 물을 부어도 그때뿐이지? 그러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주는 생수의 강이 있다. 이것을 얻으려면 나에게 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갈증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 오라는 겁니다. 그러면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수의 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는 영혼 즉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수는 예수님이 보내실 ‘성령’을 가리킵니다. 생수의 강은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가 차고 넘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께서 임하셔서 심령 가운데 생수의 강 같은 생명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고 참 기쁨과 평안이 임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비밀스러운 체험입니다. 

이러한 생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천국에서 흘러내리는 겁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하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 생수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있는데, 네 갈래 지류로 흐릅니다.(창2:10~14) 그리고 사방으로 흘러 에덴 전체를 적십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이 풍요로운 ‘기쁨의 동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의 타락 이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잃어버린 생수, 아니 그보다 더 좋은 천국의 생수를 부어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천국의 광경 가운데 생수가 있죠. 계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 ”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가 강을 이루는데,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지복(至福 bliss)이라 부릅니다. 더할 수 없는 ‘지극한 축복’이란 뜻이죠. 

본문 38절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은 천국에 있는 그 생수의 강을 이 땅에도 허락해주시겠다는 약속이요 선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는 자에게 그 심령에서 솟아나는 생수로 강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겁니다. 심령의 사막에 강이 흐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의 생수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이 우리 심령 속에서 흐르는 겁니다.

[3] 성령의 생수를 부어주신 예수님 : 십자가 대속 이후 

그러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랬나요? 십자가를 통해서! 39절을 보세요.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는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곧 우리 심령 가운데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 성령은 영원한 생명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심령 가운데 오시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바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후입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부터 미리 설명해 주신 내용입니다. 요16:7 “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이 오셔서 심령 속에 와서 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내주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요14:20에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신비로운 연합(mystical union)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은 겁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겁니다. 이 영생이 바로 생수의 강입니다. 생수의 강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목마름을 대신 경험하셨습니다. 운명하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19:28 “ ... 내가 목마르다 ... ”

이것은 영원한 사망의 목마름,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 심령의 사막에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해 주신 겁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영화「벤허(Ben-Hur)」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벤허는 류 월리스(Lew Wallace)의 소설인데 영화화 된 겁니다. 월리스는 본래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 출신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던 무신론자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공박하려고 성경을 연구하다 뒤집어졌습니다. 무릎 끓고 예수님을 향해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 후 이 소설을 쓴 겁니다. 그래서 부제가 아예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벤허는 유대인 귀족이었는데, 애매하게 노예로 끌려가고 인생이 꼬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도 감옥에 갇혔다가 나병에 걸렸죠. 그런데 마지막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그 비를 맞으며 어머니와 누이가 나병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벤허는 쌓이고 쌓였던 원한이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그 비가 흐르고 흘러 시내가 되고 큰 강을 이룹니다. 이게 바로 생수의 강입니다.

[4]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 : 내 심령에서 세상 끝까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게 사실입니까? 이미 성령이 오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를 수 있습니다. 혹시 메말라 있습니까? 재발견하세요!

내 심령에서 흐르게 하십시오! 다시 본문 37절을 보세요! 예수님의 간곡한 초청입니다.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래서 사막 같은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흐르면, 솟아나면 환경과 조건과 관계없이 참 만족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바울이 그랬죠! 옥중서신에 뭐라고 썼나요?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는 부자요 학자요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얻을 수 없었던 생수의 강을 경험한 후 고백한 겁니다. 빌4:11~13 보면 심지어 보음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생수의 강을 경험하니까 육신적은 환경 조건이 어떠하든 항상 기쁘고 감사하다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고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고대 신학가 어거스틴의 고백을 잘 아시죠! 그는 학문, 쾌락, 종교 모든 것을 섭렵했습니다. 자유분방한 자요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나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납니다. 그리고 생수의 강을 경험합니다. 그 후 그가 뭐라고 고백했나요? “하나님이여! 당신의 품 안에 안기기 전에는 내게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

여러분,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게도 이 생수의 강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육신의 정욕만을 위해, 세상의 헛되고 헛된 것만을 위해 헤매고 있는지!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새벽에 환자가 급히 실려 왔습니다. 당직 의사가 살펴보았는데, 심장마비로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는데 좀 이상합니다. 오른 손은 펴고 있는데, 왼손은 꽉 쥐고 있습니다. 대개 죽으면 손을 펴잖아요. 그래서 왼손을 펴주는데, 손 안에서 뭔가 툭 떨어집니다.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어! 삼팔 광땡이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밤새 화투를 치는데 계속 잃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 밤을 새고 끝 무렵에 판돈이 수북하게 쌓였는데 화투를 받고 펴 보니까 삼팔광땡인 겁니다. 너무 마음이 벅차올라 그만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어야 되나요? 웃어야 되나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38광땡 잡아보려고 기를 씁니다. 못 잡으면 못 잡는 대로 속상해 하고, 잡으면 잡는 대로 허무하게 떠나는 게 세상의 모습 아닌가요?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 심령에 흐르는 생수의 강으로 인생의 참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 생수의 강이 내 심령에서부터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나라로 세계로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이게 먼저 경험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사막화된 세상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겔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아무쪼록 생수의 강을 날마다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생수의 강이 우리 가정과 온 세상에 흐르고 넘치도록 생수의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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