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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신 하나님 (창 1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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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신 하나님’ . com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7-17)

서울의 어느 교회에 다니시는 최집사님이라는 분이 이런 간증을 했답니다. 모태 신앙인 그에게 갑자기 허리 통증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너무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종합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받았는데도 더 통증이 심하게 오는 겁니다. 이제는 허리만 아픈 게 아니고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삐뚤게 살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에게 고통이 찾아오자 많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봤지만 그 병의 진정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기로 하고 작심을 하고 여름에 기도원에 가게 됩니다. 기도원에 가서 말씀을 듣는 중에 그때 예배에 어느 강사 목사님이 오셔서 주신 말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일주일 내내 외우고 암송하고...그 과정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있는 한 주간이 지나고 귀가를 했는데 언제부턴지 자기 다리가 서서히 움직여지기 시작하더랍니다. 일어서게 되고...모든 통증이 깨끗하게 낫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기도원에서 사로잡혀서 묵상하고 암송했던 구절이...“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모든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히4;1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분이 그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그 말씀이 그분의 골수를 고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격과 육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다 바쁘신 분들인 줄 압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산다하여도 부족한 것이 시간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 중 어떤 구절이라도 사로잡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느냐? 왜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하느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들어내셨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련에 빠지고 절망에 빠집니까? 말씀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땅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이미 10여년전에 주신 약속입니다.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실 때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 지지 않자 아브라함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신다는 말씀은 믿기로 했는데 땅을 주신다는 약속은 자기 형편을 보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전세살이였거든요.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 아브라함의 불신이 보이는 질문입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자기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정말로 저에게 그 땅을 주신다면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성도여러분, 10년 전의 약속 이후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화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별을 보여주시며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사건이 등장합니다.  짐승을 둘로 쪼개어 놓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고고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풍습에는 개인간이나 국가간에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았습니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짐승을 잡고 둘로 쪼개고 쌍방 간에 짐승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놓고 쌍방 간에 지나가야 되는데 어느 한 쪽이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짐승처럼 찢겨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변호사까지 사서 공증까지 다 해놨으니까 너는 와서 인감도장만 찍으면 된다....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아브라함은 짐승을 둘로 쪼개어 놓고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압니다. 사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자라나지 않은 아브라함을 향해서 꾸지람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수준에 맞게 찾아오셔서 눈높이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큰 하나님의 낮추심은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세우셨다는 것을 그 큰 축복을 깨닫지 못하니까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당시 풍습과는 전혀 다르게 아브라함은 깊이 잠들고 맙니다. 수면제를 먹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잠들게 하시고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 아브라함도 그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쪼개진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은 쌍방간이 아니라 일방적인 약속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맺은 약속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기 때문에 약속과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라도 어겨도 우리는 짐승처럼 쪼개져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방적인 약속을, 일방적인 사랑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 안에 바른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하기 때문에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이 잘 되면 내가 금식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실하게 살아서 이런 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은 자기 삶에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 자기를 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영적인 오해입니다.  

물론 우리는 내가 심은 것을 내가 먹을 수 있습니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어떡합니까? 도저히 내 능력의 밖인 것은 어찌 합니까? 구원은 무조건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무조건 일 때가 많습니다.  무조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지 ‘조건적’으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혼자 쪼갠 짐승의 사이로 지나가시며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군가의 관심과 인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계시죠? 아무리 똑똑하고,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병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최고의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계십니다. 내가 울 때 같이 울고, 내가 즐거워할 때 같이 즐거워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 사랑하시는 분, 진정으로 우리를 인정하시는 분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은 인정(認定)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귀(貴)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왜 전도하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힘들어 하고, 때로 좌절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는 두 명의 탕자가 나옵니다. 모든 가사를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는 물론이고 그를 위한 잔치를 못마땅해 하는 큰 아들도 탕자였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수고도 몰라주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큰 아들은 의무감으로? 충성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너무 피곤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정죄’입니다. 동생에 대해서도 정죄를 합니다.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도 불공평한 사람입니다.     

또한 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다 지켜 행해야 나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의 사람입니다. 사람이 율법에 사로잡히면 큰 아들처럼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감격 그 은혜가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 안에 느껴지길 바랍니다. 그 은혜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큰 아들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이 ‘아버지의 소유가 다 아들의 소유’ 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섬김은 아버지의 소유가 다 내 소유라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염소 한 마리라도 더 받기 위한 몸부림입니까? 교회에서 많이 수고했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 안주시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저 방탕한 사람은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함으로 일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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