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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웃사 (삼하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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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스웃사 (삼하 6:1-9) 
 
 
오늘부터 두 주 동안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블레셋의 침략까지 물리친 후,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 불리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려 합니다(2).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삼만”명을 뽑았고(1), 궤를 실을 “새 수레”를 마련하고, 주악을 위해 “여러 가지 악기”들도 준비합니다(3, 5). 마치 황제의 입성퍼레이드를 준비하듯 정성을 다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이지요. 그런데 대규모 축제는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가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셔서 웃사가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6-8).

여호와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셨고, 다윗은 이 일로 ‘분’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다윗의 ‘분’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사무엘하를 시작하면서 다윗의 삶은 만사형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시므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지요. 그러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서 치명적인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정성을 쏟은 만큼 분노도 컸겠지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여호와께서는 언약궤의 이동에 관한 명령을 이미 주셨습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민 4:15a). 이 날의 행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승승장구할 때 조심성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사가 잘 풀리면 점점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게 되지요. 계속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만 행한다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다윗이 아무 수레나 사용하지 않고 “새 수레”를 준비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존중한 방식이었습니다. 무례한 마음가짐은 결코 아니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말씀대로’ 존중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출애굽 때도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레 10:1-2). 거룩한 일일수록 말씀대로 행치 않았을 때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성실함과 진실함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시는 분이시므로(사 25:1), 성도의 삶에서 마땅히 이런 특성들이 나타나야 하겠지요. 문제는 말씀대로가 아니라 나름대로 성실하고 진실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이 나름대로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렸다가 거부되었을 때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었습니다(창 4:5). 이처럼 나름대로의 정성은 그것이 거절 될 때, 종종 분노의 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 제가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데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하는 반항심이 마음에 싹트지요. 말씀보다 내가 드린 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민족의 무속 신앙 중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전래 동화 중에도 그러한 교훈들을 담은 것들이 많지요. 그런 의식에 배어 있다 보니 각종 집회와 종교적인 일들에 정성을 다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무속 신앙 속의 한 잡신처럼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다윗도 신상들을 운반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대로 새 수레를 사용함으로써 부지중에 하나님을 블레셋 잡신들 중 하나처럼 취급했습니다.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은 정성과 열정은 비록 그 동기와 목적이 순수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신앙을 속되게 만드는 것이지요.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일에 대한 여러 변명거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올 때 새 수레로 옮겼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체험’이 말씀을 소홀히 대하도록 했을 수 있겠지요(삼상 6:7).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보다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싸움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느라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몰랐을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는 허용하신 일을, 당신님의 백성에게는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그분의 뜻을 헤아려 알고서 바르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은 우리네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듭니다. ‘귀한 궤를 보호하려 한’ 웃사를 변호해 주고 싶기도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창 2:17)고 명령하셨으면 먹지 않아야 옳은 것이고, “만지지 말지니”(민 4:15)라고 하셨으면 끝까지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고의든 고이가 아니든 명하신 말씀을 범하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할 때는 반드시 죽는다’는 인식을 평소에 엄중하게 하고 있지 못했음을 웃사에게서 보게 되는 것이지요. 나름대로는 존중의 표현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존중 받기 바라셨던 방식은 완전히 무시해버린 태도였으며, 그분의 준엄한 말씀에 대해 가볍게 취급해버린 태도였습니다.

소비자가 왕인 시대에 소비자들은 자기의 입맛대로 선택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외면해버리거나 불만을 표시할 수 있고, 공급자는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상품을 개량해야만 하지요. 이런 시대 풍조 속에서 성도들은 성경조차 소비자의 자세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본문만 선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본문은 외면해버린다는 것이지요. 친밀한 사랑의 하나님은 선호하지만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거북스러우니까요. 소비자의 필요에 민감한 설교자들은 성도들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을 각색해서 제공하려는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조잡한 우상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네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필요한 일은 말씀을 뜯어 고치는 작업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마 16:24). 천하보다 유익한 것이 인간의 목숨이지만(막 8:3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목숨보다 당신님의 거룩함을 더 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며 용납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는 전파하기에 부끄럽기라도 한 듯이 수정한다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자신이 붙들어 주어야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행하고 말았습니다. 소들이 뛰어서 퍼레이드에 문제가 생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중단하기 위함이었는데, 웃사는 이를 막아선 꼴이 되어버렸지요. 무지한 열정이 웃사를 죽게 했습니다. 그래도 ‘죽이시는 것은 너무했다는 마음’이 든다면,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잡신 중의 하나처럼 취급하고서도 별것 아닌 일로 생각한다면 영적으로 무지한 것이지요.

웃사의 ‘열정’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는 점이 문제지요. 사업과 행사를 진행하는 일은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일하면 일한만큼 표가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일은 힘겹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딤후 2:15)는 일도 어렵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처럼 표가 잘 나지 않지요(마 7: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나름대로 행하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적어도 게으르지 않고 열정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나는 옳게 행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열정적인 삶의 결과로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갈 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점점 신뢰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절벽을 향해 열정적으로 뛰어가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바른 지식을 좇지 않은 열정의 위험성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단자들의 열정이 그러하지요. 성도는 종교적 열정에 앞서 말씀으로 점검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일부터 힘을 쏟아야 합니다.

웃사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윗 왕에게 큰 경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날의 사건을 잊지 않고 “베레스웃사”(8) 곧 ‘웃사를 충돌하심’이라는 지명을 만들어 놓고 역사의 경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했습니다(9). 함께 하시는 여호와로 즐거워하기만 했던 다윗은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를 배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을 경외하기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음을 배웠지요.

언제나 내 편이 되셔서 승리와 성취를 주신 하나님에 매료되어 있고, 하나님이 솜사탕같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분으로만 여겨질 때, 그때도 성도에게는 위험한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으면 진노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공동체라면 세속화되고 있는 셈이고요. 여호와께서는 언약궤를 바르게 대하지 못한 블레셋을 치신 것처럼, 언약궤를 바르게 대하지 못한 당신님의 백성들 역시 치셨습니다. 당신님을 가까이 하였던 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로 삼지 않으셨지요. 성경의 가르침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시 2:11)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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