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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고뇌 (창 18:20-26,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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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고뇌 (창 18:20-26, 32-33)


우리의 믿음을 가만 보면, 너무나 도식화 된 딱딱하고 단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예수 믿을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쭉 연결된 통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익숙한 것과는 달리 본래는 장절구분이 없습니다. 그냥, 길게 연결된 ‘하나의 긴 통 이야기 덩어리’입니다. 

약 500년 전 1551년, Stephanus라는 사람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같이 긴 하나의 통 이야기 덩어리를, 장과 절로 나누어 숫자로 표기해놓았습니다. 스테파누스 덕분에,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을 요한복음 1, 14에서 쉽게 찾습니다. 

대단히 편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적으로 성경을 장절로 끊어 읽기 때문에, 자주 쉽게 놓쳐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각각의 장과 절을 마치 개별적인 내용인 것처럼, 뚝뚝 끊어 읽어버리거나, 앞뒤 없는 단편적인 내용으로 이해해버립니다(소설을 읽을 때, 한 문장 한 문장 똑똑 끊어서 읽으면, 소설이 되겠습니까? 소설, 스토리…). 

아브라함의 이야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아브라함은 언제나 믿음이 대단했던 인물인줄로 알지요. 그를 복이라(개역성경, 福의 根源이라)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福이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아픔도, 고뇌도 도무지 없던 사람, 그저 행복해서 복을 주체하지도 못하던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잖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과 약속의 말씀들’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축복의 말씀 맞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 맞습니다(약속은, 성취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축복과 약속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 대단히 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이었다(복의 근원이었다)고, 믿음의 조상이었다고 말하는 것, 대단한 믿음의 지식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이었다고 아는 것,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너무 단순하게 도식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있었던 수많은 아픔, 절망감, 상실감은 어떻게 이해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믿고 살면, 하나님 복 주십니다. 약속하신 말씀,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 약속의 말씀 가만 보면,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어려움들이 마치 씨실과 날실 같이 조밀하게 짜여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 축복의 말씀, 약속의 말씀 붙잡고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겪은 아픔, 고뇌, 가슴 답답함, 그 얼맙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인생을 가만 들여다보면, 감춰진 고뇌, 흔들리던 마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뜻 이루어보려다/ 실패한 흔적, 고스란히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내가 너를 열국의 아버지로 삼았다.” 창 17, 5). 그의 아내 ‘사래’도 ‘사라’로 改名해주십니다(“내가 그를 열국의 어머니로 삼았다” 창 17, 16). 그 후 얼마 안 되어, 하나님께서 또 한 차례 아브라함 가정을 찾아오시지요. 오셔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찾으시면서,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말씀을 누가 듣습니까? 사라가 듣습니다(창 18, 9-10).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린 당연히 믿음 좋은 아브라함, 사라 기뻐서 어찌 할 줄 몰라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아들 약속해주셨는데, 그들 부부 당연히 기뻐해야 하고 행복해야 하잖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 부부가 전혀 행복해하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오히려, 그들 부부 안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속마음을 적나라赤裸裸하게 폭로해버리고 계십니다(창 18, 11-12).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두 부부가 다, 너무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는 얘기죠, 한 술 더 떠 사라의 심중에 감춰진 맘을 전합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失笑,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다) 합니다. 내가 老衰하였고 내 主人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사라의 연약함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출시킵니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이치에도 당치 않는 말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아들 포기한 지 오랩니다.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에게 주신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었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말씀이었고, 확고부동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뿐이지요(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 부드럽게 꾸짖으십니다).

아브라함의 고뇌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시려하자 아브라함이 전송하러 함께 나갑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르십니다. “내가 (시행)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시행하코자 하시는 ‘비밀정보’를 미리 공개해 주십니다.

무슨 정보를 알려 주십니까? 소돔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커서, 내가 직접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사실인지? 보고 알려 하려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시겠다는 말씀이 아니지요. 혹시라도, 그들이 회개하면 심판하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다는 하나님의 애절한 맘(간장을 녹이시는)을 드러내신 겁니다. 

하나님이, 굳이 이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공개하신 이유가 뭘까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그 애타는 맘과 같은 맘을 가지고 있는지? 보려 하신 겁니다. 축복의 통로가 될 사람이 분명하다면, 萬民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使命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 정말로 있는가?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동으로,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하고, 부르짖고, 매달리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가서 살고 있는 소돔 땅의 죄악의 소식, 진작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땅의 죄악이 너무 중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될 수밖에 없게 되자, 列國의 아버지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태도,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신 맘이 무얼까요?

바로 이 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맘, 이 시대의 祝福의 通路가 되라고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맘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주시는 福을 누리는 사람 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이 되는 사람’(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시대의 罪惡을 눈여겨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맘, 우리도 알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맘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자 되기를 원하실까요?(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항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삶이라 고백)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이, 내 맘에도 共鳴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신 하나님의 마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릅니다(특별한 目的을 가지고, 경배하는 맘으로 하나님께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감)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 23)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그러면서, 의인 50명이 그 城中에 있다면, 그 50 의인을 위해서 그 城,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합니다. 아브라함의 관심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있습니까? 의인 50뿐만 아니라, 그 성 전체구원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의인 45명으로, 의인 40명으로, 의인 30명으로, 의인 20명으로, 마지막에는 의인 10명으로 내려갑니다(6번씩이나). 이맘이,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세우신 하나님의 맘이요, 뜻입니다. 

이맘 가득 품은, 아브라함의 심정, 고뇌하는 맘입니다(어쩔꼬). 그 맘은, 소돔 고모라에 대하여 품고 계셨던 하나님의 맘입니다. 불행하게도, 창세기 19장에 가면, 소돔 고모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맘, 아브라함의 그 아픈 중보의 맘, 알지 못했습니다. 회개할 기회 만들지 못했습니다(도리어 하나님의 사자들과 더불어 男色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버리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지 않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예수님 말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城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 20-23).

이 애타는 맘이, 우리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맘이요, 예수님의 맘입니다.

이 시대의 죄악에 대하여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맘이, 내 맘에도 공명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이 되고자 할 때,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믿는 자의 고뇌, 아픔, 연약함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탄식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苦惱가 있었다. 롬 7, 24-). 우리 안에도 이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로 인해 그 탄식을 넘어서는 감사, 기쁨도 있어야 합니다. 

8월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당한 민족의 고난을, 되새기며 반추하는 시간입니다. 일제 식민통치의 고난을 받은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다른 민족에게 고난을 주는 나라, 민족 되어서 안 됩니다. 

꽃다운 스무 살의 나이에 마흔 일곱 살 난 한국인 신랑을 맞아서,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정신질환이 있는 남편에 죽임당해 한 줌의 재가 되어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긴, 우리의 가족 되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 넘 마음 아픕니다. 돈이면 수단 방법 가릴 것 없지 하는 拜金主義, 우리시대 한국의 죄악입니다. 

베트남이 약자라서 이 사건이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는 되겠지만, 만일 先進强大國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건을 당했더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보다 약하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사실은, 단일민족 아닙니다. 미식축구의 영웅인 하인즈 워드가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우리는 그를 열광했습니다. 혈통주의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 성씨의 절반 가까운 49%(1985년 통계, 275/136)가 귀화성입니다. 고려초 우리나라 총 인구가 200만이었는데, 그 중 8.5%인 17만 명이 중국, 여진, 거란족과 같은 정착 外來人이었습니다(정수일, 「한국속의 세계」). 혼혈을 차별하는 우리들이, 성공한 혼혈은 예외입니까? 우리의 이중성,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NGO 지구촌사랑나눔 대표인 김해성 목사님을 통해, 우리나라가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코끼리, 황금원숭이, 이구아나, 카멜레온 등 국내 희귀동물 40여 종 153마리를 무상으로 기증받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우리나라에 온 스리랑카 노동자들을 15년 동안 보살펴 준, NGO 지구촌사랑나눔에 대한 감사의 뜻과 한국정부와의 우호정신을 나누기 위함이랍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등록 120개 국가 중,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불과 4, 50년 전). 그 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독일 광부로, 독일 간호사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가서 일했습니다(박 대통령이 우리 젊은이들 찾아가서, 독일 대통령 보는 앞에서 통곡하셨다잖습니까). 그러나 벌써 1960년대 당시 독일은, 고용계약서에 ‘국적으로 인해서 같은 작업을 하는 독일광부와 비교해, 보수를 적게 받거나 더 나쁜 노동조건에 처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아니한다. 노동시간은 휴식시간 포함해서 일주일 5일, 매일 8시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온 외국인 근로자들 중에는, 여권압류 등의 인권유린 문제가 많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는 나그네들의 울부짖는 눈물이 이 땅에 흐르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지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 21). 

열국의 아버지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그가 복이 되고 天下萬民이 그를 통해서 복을 받아야 하는 엄청난 존재였지만, 그런 그의 삶에도 하나님 맘 품어야 하는 고뇌, 아픔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은 엄청난 축복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경험한 의심, 패배, 불순종, 어둠의 인생 날들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 1) 

이 시대의 죄악을 보면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맘, 그 하나님의 맘을 열국의 아버지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도 가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시행 말씀을 듣고, 그들을 향한 여섯 번씩이나 거듭되는 중보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고뇌하던 아브라함의 맘, 회복하십시다. 이런 사람이, 이 시대의 복이 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과거의 상처, 고난이 참 많은 자들입니다. 그 고난의 굴레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던 과거 역사의 죄악들이 동일하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우리의 죄악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나만의 복을 구하지 않게 하옵소서. 소돔 고모라에 대하여 품으셨던 하나님의 아픔,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고뇌하는 마음, 우리도 품게 하여 주옵소서. 죄로 더렵혀진 이 땅이, 축복의 땅으로 일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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