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회복, 그 네 번째 말씀 (왕상 19:15-21)

  • 잡초 잡초
  • 411
  • 0

첨부 1


회복, 그 네 번째 말씀 (왕상 19:15-21)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정말 덥습니다. 저도 어젯밤에 열대야 때문에 잠 못 들고 뒤척이는데 귀에는 모기 소리가 웽웽거리고 잠을 설쳤습니다. 자칫 더위에 지치고 탈진하기 쉬운 이 때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가운데 새 힘을 얻어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서울 영세교회의 원로목사였던 고(故) 김종수 목사님은 ‘사랑의 천국방언’이라는 것을 늘 가르치고 다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김 목사님이 저희 교회 부흥회에 오셨는데 그분이 가르치시던 ‘사랑의 천국방언’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도대체 이 ‘사랑의 천국방언’은 무엇일까요? 이 말만 하면 우리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들만 열심히 하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가 속한 직장과 사회가 천국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말이기에 이렇게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다고 하는 것일까요? 한 번 따라하십시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믿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요, 나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말들입니다. 여러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내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자녀와 가족에게 이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이 천국으로 변한답니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믿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요, 나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그곳이 천국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가운에 특별히 “괜찮습니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요”라는 말이 하나님이 참 잘 쓰시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회복’(回復)이라는 주제로 열왕기상 19장에 나온 엘리야 선지자의 탈진과 회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이 그 네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 설교 가운데 제가 개인적으로 참 기억에 남는 내용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요 능력의 종이지만 하는 짓이나 말을 보면 정말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와 똑같이 조금만 잘 나가면 방방 뛰면서 좋아하고 으쓱거리는데 그러다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 생기면 금세 저 밑바닥까지 떨어져 지치고 탈진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덜거리고, 심지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까지 외치는 그런 모습이 연약한 우리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이렇게 투덜거리고 원망하고 죽여 달라고 죽겠다고 하는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시더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너는 선지자라는 놈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야단 치셨나요? 아닙니다. “너 그렇게 밖에 못해? 정말 실망이야”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저 가만히 엘리야의 불평과 원망을 들어주시지요. 그러다가 광야로 피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더니 로뎀 나무 아래서 자라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천사를 통해 어루만진 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힘을 얻게 하신 후 호렙 산으로 가게 하십니다. 호렙 산에서도 동굴에 처박혀 넋두리나 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동굴에서 나와서 내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더니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응답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치치고 낙심하고 탈진한 엘리야에게 결코 야단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이나 늘어놓는 철없는 선지자에게 결코 그렇게밖에 못하냐고 실망이라고 그렇게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위로하고, 조용히 쉬게 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려 주셨다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저는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런 사랑의 천국방언을 해주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래서 결국 엘리야는 탈진을 벗어나고, 그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다시 사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지요. 꼭 기억하십시오.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은 이렇게 책망하고 야단치는 분이 아니라, 닦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길이 참으시는 분이구나, 특별히 실망하고 낙심한 사람, 지치고 탈진한 사람에게 급하게 몰아붙이고 채근하는 분이 아니라 참으시면서 기다려 주시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입니다. “말로 요구하거나 야단치기보다, 실망했다고 몰아붙이기보다 그저 만져주시고, 쉬게 하시고, 먹여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분이구나, 그러다가 우리가 엘리야처럼 회복되고 돌아오는 일이 참 많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회복 방법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반대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나는 좀 믿음이 있어서 참을 줄도 알고 견딜 줄도 아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나처럼 좀 성숙해서 잘 견뎌내고 이겨낼 줄 알면 참 좋겠는데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니,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이, 우리 아내가, 우리 자녀들이, 아니면 주변의 성도가, 구역원이, 낙심하고 절망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이 좌절하고 탈진해 때론 원망하고 때론 투덜거리고 공격적으로 나올 때 우리는 어떻게 대합니까? 혹시 많은 경우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밖에 못하냐?”고 탓하고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너도 똑같은 사람인데 뭐...

더욱이 그 사람이 교회를 오래 다닌 분이거나 교회의 중직자거나, 성숙한 신앙인인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더 실망하고 더 몰아붙입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 실망이야. 장로라는 사람이, 집사라는 사람이, 권사라는 사람이, 교회 수십 년 다녔다는 사람이 그것밖에 안 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랬는데요 뭐. 누구에게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성정(性情)이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리고 어떤 목회자에게도 이 엘리야에게 찾아왔던 실망과 탈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든지 엘리야처럼 좌절하고 원망 불평하고 투덜거리며 넋두리하고 나아가 나 죽고 싶다고 죽여 달라고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 별 수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명색이 목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정말 실망”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회자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사모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다가 지쳐 집에 가서 넋두리를 할 때가 있답니다. “목사님도 그러나?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나만 직장에서 바깥에서 힘들면 집에 가서 넋두리 하는 줄 알았는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그러는데요, 뭐. 사람이니까 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목사님도 “여보, 나 너무 힘들어, 지쳤어. 목회가 너무 힘들어.” “나 아무개 장로님 때문에, 아무개 집사님 때문에 너무 힘들어.” 이랬던 모양입니다. 혹시 너무 힘들고 탈진 되어서 목회 그만 하고 싶다고 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 사모님은 늘 반응이 이렇다고 합디다. “여보, 어떻게 주의 종이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소명 받고 주의 일 한다는 분이 그런 말을 해요? 정말 실망이에요.” 그런데 그런 말을 사모님으로부터 들을 때마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 말이 참 맞는 말이요. 너무너무 지당한 말이요. 그런데 위로는 안 되네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맞는 말, 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좋은 말은 아닙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요?” 이런 말 하는 분 많지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지당하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맞는 말, 지당한 말이 나한테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 어쩌라는 말입니까? 위로가 전혀 안 될 뿐 아니라 반대로 마음이 상하고 더 다운되는 것을 어쩌라는 겁니까? 그런데 혹 우리는 이런 맞는 말, 지당한 말, 그러나 위로가 안 되는 말, 오히려 그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다운시키는 말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못난 남편에게 아내에게 말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가족이나 성도나 주변 사람에게 말입니다. 혹 좀 못나서 부족하고 실수도 많은 목회자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 그러시겠지요.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너도 사람인데 뭐, 위대한 나의 종 엘리야도 그랬고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이 다 그랬는데 말이야. 너도 약한 사람이고 너도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는 조용히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쉬게 하시고 기다려 주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엘리야에게 하신 것을 보면 틀림없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본문을 자세히 살피던 중 참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물론 제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고, 성도들에게 이것이 스탠더드(standard)라고 기준을, 모범을 제시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때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성도들을 책망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상대방을 더 힘나게 하게 회복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들어주고, 그냥 그 상한 심정을, 그 상처를 조용히 만져주고, 그리고 쉬게 해주고, 격려해주고, 나아가 기다려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상당히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이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앞으로 이렇게 목회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한 번 이렇게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회복’이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나누었는데 물론 이 설교 가운데는 나 자신의 회복 방법도 들어있지만 이 시간, 한 번 다른 사람의 회복을 생각해 보고, 그 분들의 회복을 돕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또 우리도 아직 회복되어야 할 것이 많지만 부족한 우리가 상처도 입은 우리가 남을 돕고 회복시키는 사람이 된다면, 헨리 나우웬이 말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가 되어 그 사람을 더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갈 수 있다면 엘리야를 회복시켜 더 위대한 능력자로 세워 쓰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이 회복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일을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해야 합니다.

❚사명을 회복하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마지막에 회복시키신 엘리야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쉬게 하고 먹게 하고 말씀하셔서 다 회복시키신 엘리야를 어떻게 하십니까? 두 가지 일을 하게 하십니다. 첫째는 15절에 나온 대로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해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해라.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입니다. 

지금까지는 아합 왕과 이세벨 여왕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고 호렙 산까지 왔지만 반대로 도망 온 길을 거꾸로 돌아가서 아람, 즉 시리아의 왕의 기름 부어 세우고, 또 북 왕국 이스라엘 왕도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을 섬긴 폭군 아합,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핍박한 이세벨 여왕을 폐위하고 예후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던 절대권력, 결코 넘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원수를 하나님이 드디어 쳐주신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명의 회복입니다. 

본디 선지자인 엘리야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왕을 기름 부어 세우는 일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과 다윗 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것처럼 선지자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 중 하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의 왕을 기름 부어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돌아가서 아람의 왕과 이스라엘의 왕을 기름 부어 세우라는 말씀은 이제 본디 네 사명으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목숨 구하려고 네 자리와 사명을 떠나 도망만 쳤는데 이제 회복되었느니 본디 네 사명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없는 좌절과 탈진으로부터 회복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본디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 우리의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겠다고 그 귀한 사명 버리고 도망 온 엘리야, 죽여 달라고 못해먹겠다고 불평만 하는 엘리야에게 처음부터 “빨리 복귀해라, 너는 지금 근무지를 이탈했으니 무조건 돌아가라”고 닦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잘 만져주시고, 쉬게 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려 회복시키신 후 비로소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탈진과 좌절로부터 회복되지도 않고 무조건 사명으로 돌아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더 탈진하고 무기력해집니다. 사고 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오래 참고 공을 들여 그를 회복시키신 후 더 크게, 더 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런 시련과 실패를 겪고 나니 “정금처럼” 거듭나서, 연단되어서 더 귀한 능력의 종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명으로 돌아가게 해서 더 귀하게 쓰시는데 특별히 16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제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너의 선지자 직분을 대신 감당할 후계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절대 너 혼자가 아니고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는데 그들을 이끌고 너를 이어서 사명을 감당할 제자로 엘리사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찾아가 자기 겉옷을 그에게 던져 “지금부터 너는 내 제자요 후계자다” 하고 선포하고 그때부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다니며 선지자 수업을 받는 제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왕기상 19장의 결론이요 탈진한 엘리야의 회복 이야기 결론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회복된 우리가 사명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사람을 세우는 일, 제자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상처 입고 방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도 헤매고 넘어져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더 잘 치유하고 위로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부족하고 못나서 때론 하나님도 원망해보고, 남 탓도 해보고, 죽여 달라, 못 해 먹겠다고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잘 나고 똑똑한 사람은 남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 못합니다. 평생 딴 짓 한 번도 안 해보고 실패도 안 해본 사람은 남에게 잘 위로를 못 줍니다. 왜요? 이해가 안 가거든요. 어떻게 저렇게 바보같이 못나게 굴 수 있는지, 왜 저렇게 밖에 못 하는지 아예 이해를 못 하거든요. 

항상 100점만 맞던 사람에게 “나 빵점 맞았어”하고 하소연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에 단 한 번도 떨어져보거나 실패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나 이번에도 떨어졌어” 하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떨어져 본 사람이 떨어진 사람 마음 알고, 망해 본 사람이 망한 사람 심정 이해하듯 못나고 부족해 좌절하고 낙심하고 탈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정말 그런 사람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일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세워주어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하나님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엘리야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말씀을 통해 듣고 깨달은 바를 기억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탈진과 좌절도 반드시 극복하고 이겨내 회복되기 바라고, 나아가 그 회복의 경험을 통해 지금도 내 주변에 허다한 힘들고 지친 사람들, 탈진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엘리야 같은 종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