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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하는 축복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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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축복 (약 3:1-12)


내 용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을 입으로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같습니다.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수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말씀, 로고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인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갖는 가장 좋은 통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 말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데 말에 감정을 투입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언어가 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말로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말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고 사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고백 종교’라고 합니다. 로마서 10장을 보시면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말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저는 개척교회 시절에,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닌 다섯 개를 하면서 교인들을 어떻게 기도 훈련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의 목회의 큰 비중을 차지했었습니다. 공중 기도, 대표 기도를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데, 기도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벌주시는 법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편안하게,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하라고 하면서 대표기도 하는 법을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몇 명 없는 개척교회이기 때문에 어느 날 심방을 갔다든지 새벽기도회 같은 모임 때는 예고 없이 미리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별안간 기도하시라고 시키는 일을 많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지금까지 한 번도 대표기도를 안 해본 집사님께 “안 집사님! 오늘 기도 한번 해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 반응이 얼마나 좋은지 “목사님! 나에게 진작 대표기도를 시키실 것이지….” 이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씩씩하게 나오니까 순간적으로 ‘이야! 이 분께 기도시키기를 참 잘했다. 저렇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을 여태까지 몰랐구나.’ 그런데 그 다음부터 그 분에게서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눈감고 1분, 2분이 얼마나 진땀났는지 모릅니다. 같이 옆에 계신 권사님은 말이 나와야 되는데 아무 소리도 안하고 가만히 계시니까 “음… 음….” 그런데 그 자리에 장로님도 한 분 계셨습니다. “주여! 주여!” 그런데 한참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할렐루야, 아멘!” 그러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여 집사님 한분은 저한테 개인 상담 요청을 하셔서 만났는데 아주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목사님이 시키는 봉사 다 하겠습니다. 밥 하라면 밥 할 것이고 청소하라면 청소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목사님이 시키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대표기도 시키지 마십시오. 나는 새벽기도 때 목사님을 쳐다보면 심장이 멎을 거 같습니다. 나 기도시키려고 쳐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상담을 무시하고 제가 한번 대표기도를 시켰습니다. “집사님,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니까 다들 눈 감을 것 아닙니까?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탁하셨는데 기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기도 시킨 후 이렇게 쳐다보니까 나를 쳐다보시며 입을 씰룩거리시는데 입모양을 보니 안 좋은 소리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도 만났습니다. 옛날에 서울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뜻 있는 사람들이 돈을 좀 내서 기독교 회관을 만들었었습니다. 그 기독교 회관이 뭐냐 하면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들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자격을 주어서 거기서 하숙비 안 받고 재워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끼, 어떤 때는 두 끼 밥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골의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입니다. 공짜 하숙집이 생겼으니 저마다 다 들어오려고 하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이 “우리 어렸을 때 공부하기 힘들었으니까 이런 혜택을 주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시작한 일입니다. 일종의 자선 기관인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시골 학생들이 와서 혜택을 많이 얻었는데 거기서 생활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수 안 믿던 청년들이 거기서 혜택을 받으려면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겁니다. 

얼마 쯤 예배 참석하고 난 다음에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해야 합니다. 경상도 학생이 한명 있었는데 교회 안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으려면 기도를 해야지 어떡합니까? 기도 차례가 되었는데 역시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을 했는데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끙끙 거리다가 경상도 사투리로 “에이, 더러워서 못하겠다!” 나가버렸습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창피했었는데 지금은 기도 잘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언어는 무엇인가? 어떻게 말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선 오늘 성경말씀의 기록자는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혈육적 친동생입니다. 야고보서가 주는 진리가 있는데 복음에 있어서 구원의 문제가 아닌 성도의 생활면을 강조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진리의 뿌리가 아닌 열매 면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의 하나의 영적 교양 과목과 같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라.”라는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어 담임 목사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30년을 한 목회자입니다. 30년 동안 초대교회 목회 경험을 하면서 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생활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 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말’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잘해야 하고 말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첫마디로 그는 자신에 대한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와 같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는다.” 쉽게 말하면 “목사 되지 말라. 목사들이 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말하고 내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이게 하나님의 심판이다. 너무 괴롭고 너무 무서우니 가능한 목사 되지 마라.” 이런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2절에 더 실감 있게 말하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설교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다른 사람들은 공감을 못하지만 설교자들은 다 똑같이 공감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떤 때는 설교하고 나서 교인들 쳐다보기도 힘듭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고 판단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저와 같은 장로 교단에서, 한 노회에서, 한 지역에서 함께 교제하면서 목회하던 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이 분은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괴짜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말을 얼마나 함부로 하시는지 그 분이 옆에 계시면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 이민 교회는 교인도 많지 않은데 주일날 설교하러 올라가서 보면 누가 교회에 왔는지 누가 빠졌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누가 빠졌다 확인이 되면 기도를 합니다. 뭐라고 기도를 하느냐 하면 빠진 사람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박 아무개, 김 아무개 교회 안 나왔습니다. 놀러간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놀러갔다면 오늘 다리가 똑 부러지게 해주세요.” 제가 그 기도 받은 사람을 만났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자동차가 없다고 해서 우리 교회에서 사드린 적도 있었는데 “목사님이 말을 그렇게 이상하게 하시면 교인들이 상처를 너무나 많이 받지 않으시나요? 어떻습니까?” 물어봤더니 그 목사의 그 교인입니다. 아무도 상처를 안 받는답니다. “아니, 그렇게 이름을 다 부르면서 다리가 똑 부러지라고 기도했는데 어떻게 상처를 안 받습니까?” 목사님 기도가 응답된 적이 없답니다. 권사님을 보고도 그 목사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권사님! 그렇게 하면 교통사고 나서 죽을 겁니다.” 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죽는답니다. 오히려 교인들은 목사님의 그런 매너를 천진난만하다고 합니다. 진짜 다리 부러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렇게 말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같이, 악의가 없게 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본인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이 사도들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를 안 하면 더 큰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너를 말씀 전하라고 사도로 세웠는데 왜 전하지 않고 말을 안 하느냐?” 그래서 옛날에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해서 말을 잘 못합니다.” 얼마나 안하려고 했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잖아요? “무슨 소리냐? 내가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고민이면서도 즐거움입니다. 이제 동기생들이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보다 나이가 4~5년 위의 사람들이 동기생 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설교 안하니까 좋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럴 줄 알았는데 주일날이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다.” 사실 이 깡패는 싸움을 안 하면 주먹이 근질근질 하답니다. 목사는 평생을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야고보 감독이 30년 목회 경험에서 이 말을 남긴 것은 성도들이 제일 많은 죄를 입으로 짓습니다. 

실제로 입이 무거운 사람은 죄를 덜 짓습니다. 말이 빠른 사람은 항상 구설수에 휘말리게 됩니다. 야고보 감독은 이 점을 지금 강조하는 겁니다. 3절에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 같이 하라.” 말들한테 입을 함부로 못 놀리게 재갈을 물리잖아요? “교회의 시험거리 발생은 항상 입이다.” 더군다나 교인들은 항상 미확인 보도를 많이 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데 추리 소설을 써내려 갑니다. 이것이 죄라는 겁니다. 나는 웃기는 말로 농담같이 하지만 상대방은 치명적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크리스찬 언어에 절대적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하는 말 첫째가 “회개합니다.”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진리는 자기의 잘못은 인정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첫 번 설교는 “회개하라.”입니다. “너의 잘못을 인정하라.” 이 말씀이었잖아요? 회개의 언어가 훌륭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이 버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상의 강도는 회개하는 말 한마디로 순간적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서 예수님과 함께 그날 낙원에 갔습니다. 이것이 말의 능력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는 언어 한마디의 표현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생할 사람을 순간적으로 낙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죄가 많은 다윗을 끝까지 붙들고 가셨는가? 다윗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에 보세요.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가 한번, 두 번이 아니라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나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줄 알면서도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했고 이 어머니도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어머니도 죄인이요 아버지도 죄인인데 그들이 죄 가운데 나를 잉태해서 죄와 더불어 나와 탄생했으니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항상 죄밖에 짓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이 점을 높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붙잡았습니다. 사실 밧세바 데리고 살았다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다윗 왕을 비난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한 번도 원망 안합니다. 

“내가 죄 짓고 그도 내가 죄 짓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죄 때문에 본처의 자식들이 왕권 다툼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온갖 난리를 치는데도 굳세게 서서 마침내 밧세바와의 약속 “나 때문에 마음 고생했지? 네 아들에게 왕권을 주겠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도 그래서 다윗의 왕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출생을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라고 연결했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여!” 다윗과 연결했습니다. 말, 인정하는 회개, 그러나 정죄를 일삼는 입은 고난이 많아집니다. 

회개하는 입은 하나님의 긍휼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선한 습관은 자꾸 키워나가야 합니다. 나쁜 말은 줄이십시오. 그리고 덕담과 선한 말을 늘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선진국 사람들에게 하나 배운 것이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의 우수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삼가는 습관입니다. 지금 어떤 사실이 아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 그 나쁜 것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물으면 알고 있으면서도 선진국 사람들은 말 안합니다. 

그들이 그때 늘 하는 제스처가 있습니다. “I don't know.” 그렇게 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말함으로 그가 더 어려워지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면서도 공개방송을 하잖아요? 이것은 크리스찬 매너로는 아주 나쁜 겁니다. 야고보 감독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두 번째 크리스찬 언어는 “사랑합니다.”입니다. 이건 할수록 좋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수련회를 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제일 먼저 그 집에 복을 빌라.” 심방이 뭡니까? 복을 빌러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하나님의 복을 불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괜히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저는 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예배 다 마쳤는데 남모르는 사람이 날 만나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십니까?” 한 번도 못 본 사람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십여 년 위의 분인데 날 보자마자 90도 각도로 절을 하면서 덥석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이제야 찾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6·25때 헤어진 친척이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사촌, 육촌이 다 납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얼굴도 제 육촌 형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흥분해서 “혹시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이민 온지 10년 된 사람입니다. 제가 10년 동안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찾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칭찬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는 형제 만난 것보다 더 흥분하게 됐습니다. 

“와! 이 사람이 과연 나를!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구나!” 그날 하루 종일 흥분했습니다. ‘좋은 교인 하나 만났다!’ 그런데 그 다음주일부터 안 나왔습니다. 그 분은 알고 보니까 교회마다 다니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나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그 사람을 기다립니다. ‘아! 목사들이 이민목회 너무 지쳐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하나 써서 돌아가면서 위로하는 은사가 있는 분이다.’ 주일날 마다 기다립니다. 최고로 훌륭하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진실성이 없어도 좋은 말입니다. 사랑하고 좋은 말은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사랑의 언어는 절대 문제가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을 빌면 그 복이 내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언어는 계속 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감사합니다.”입니다. 감사의 언어가 풍부한 사람은 사랑 받습니다. 감사할 것은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데 볼 수 있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일날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달라집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반도의 문제가 세계에서 제일 긴장 속에 있어 늘 마음 아픈데 북한 주민들은 참 불쌍합니다. 저렇게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정부 자선단체, 개인, 교회 할 것 없이 천문학적 숫자의 북한 돕기를 했다고 항상 신문에 나옵니다. 아주 돈 액수까지 발표 하면서 신문에 내잖아요? 정주영 회장은 소를 천 마리를 사가지고 자동차에 싣고 가서 자동차까지 다 주고 왔다고 신문에 나왔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통치자가 한번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남한 정부 자선단체, 남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의 도움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어느 때 돕겠습니다.” 이렇게 한마디가 나왔다면 남북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사건은 이제 합동 조사반, 한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 전문가들이 다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아시아 지도자들도 또 모여서 발표했습니다. 유엔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외부 공격에 의해서 배가 이렇게 되었다.” 다만 북한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어제 신문에 다 발표했잖아요? 그러면 공격에 의해서 되었다면 누가 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말 안 해도 다 북한 정부를 지목합니다. ‘공산당 정부는 왜 이렇게 감사를 모를까? 말 한마디 전하면 다 국민 전체가 좋아하고 더 교류가 잘될 텐데…. 툭하면 불바다 소리나 하고 무력하겠다고 앙칼진 방송만 저렇게 해야 할까?’ 저는 이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사랑의 쌀 만 가마 처음 보낼 때 그 일을 성사시킨 사람이 이광덕 목사입니다. 그분은 평생 다른 목회 안하고 북한 돕기만 하신 어른입니다. 저도 많이 협조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교회 교인입니다. 목회를 안 하시니까 가족들, 딸, 사위, 며느리 할 것 없이 다 우리 교회 교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일을 하시니까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만 가마 처음 보냈었는데 어느 날 북한에 잡혀서 사형 당할지 모른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그 분 빼내는 작업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미국 국회의원들까지 다 동원하고 저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40년 동안 북한 돕기만 하신 분인데 그곳에서 영웅 대접을 해야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연변 과기대 만든 사람이 김진경 총장입니다. 한국, 미국 다 다니면서 모금 해다가 종합 대학을 훌륭하게 만들어놨는데 다 끝나고 총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평양 과기대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잘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잡혀서 사형수가 되셨었습니다. 그 다음에 용케 풀려나셔서 만났습니다. 

“아니, 목사님! 목사님 같은 분 거기 가면 영웅 대접을 해야지 죄목이 뭡니까? 왜 그랬답니까?” 그랬더니 발표를 했습니다. “교묘하게 간첩 노릇하지 않았느냐?” 이런 죄목이랍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 정당에 대해서 그렇게 얄팍한 비인격적 인신공격을 끊임없이 하는 정치 풍토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나와서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런 생각이 뉴스 볼 때마다 듭니다. 말이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여러분! 크리스찬 매너 가운데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지금 집중적으로 야고보 감독이 30년 목회 생활에서 권고하는 겁니다. 우리 입술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가 하면 독이 되기도 하잖아요? “♬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 우리 같이 한번 불러볼까요? “♬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 할렐루야!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버지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말하는 축복을 일평생 회개와 감사와 사랑으로 해나가는 지혜롭고 성령 충만한 아버지 자녀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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