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애하신 구세주여 (마 20:29-34)

  • 잡초 잡초
  • 820
  • 0

첨부 1


인애하신 구세주여 (마 20:29-3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찬송은 근래 바뀌었습니다.  개역개정이라고 부르는 성경은 예전에 비해 번역이 현대화되었습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도 좀 바뀌었습니다.  예배 시에 조금 혼동이 되어 이전 것으로 외웁니다만 달라진 부분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찬송가는 아주 대폭 수정이 되었습니다.  복음성가도 있고, 모르는 찬송도 많아졌습니다.

찬송가는 대부분 주로 180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주옥같은 노래를 지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여사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았지만, 예수를 만난 뒤부터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고, 8000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찬송가에 23편이 나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감동적인 찬송이 대부분 그녀의 작품입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때에 지었는가를 알면 훨씬 감동적입니다.

찬송은 신앙의 고백이고, 기도의 제목입니다.  또한 찬송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대표적인 작품을 말씀의 제목으로 삼고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너무도 은혜롭게 많이 부르는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입니다.  그녀의 고백처럼 우리도 이렇게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애하신 주님을 노래하는 우리 신앙과 삶에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인애하신 구세주라고 부르는 신앙과 삶에 이어지는 고백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실 때 소경을 만난 사건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사람을 '바디매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길목에 서 있다가  소리를 높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들은 잠잠하라고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님은 탄식의 소리를 듣고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34절에서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긍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6:34)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삶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 지옥에 들어갈 영혼들, 바로 이들을 향한 긍휼하심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주님은 언제나 자비의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주님의 은혜와 기적과 힘과 위로가 나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3:21-22)  호세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11:7-8)  시편의 저자는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78:38-39)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합니다.  그의 진노를 돌이키시고, 분을 다 쏟아내지 않습니다.  그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합니다.  그의 긍휼이 충분하고, 우리 삶에 끊이지 않습니다.  그의 주권적인 힘과 능력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풍성함이 우리를 도우시고, 힘주고, 살리는 것입니다.

크로스비 여사를 향한 주님의 긍휼이 바로 이렇게 임한 것입니다.  삶의 곤고한 상황에서 그녀는 주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노래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의 찬송은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로 이어집니다.  우리말은 이렇게 번역했지만, 원래의 뜻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날 지나치지 마옵소서'입니다.  앞을 못 보는 자기를 혹이라도 주님이 못보고 지나치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디매오의 외침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저 감각으로만 지나가는 것을 압니다.  자기 앞을 가실 때 혹이라도 그냥 가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혹 내가 주님을 지나쳐도 주님은 나를 기억하십니다.  주님의 긍휼이 나를 위로하고, 힘을 주고, 살리십니다.  변함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곤고하고 힘든 세상에서 힘을 얻으며 삽니다.  이런 주님을 바라보시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나를 지나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보아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도 모든 사람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의 긍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용서가 되고, 사명이 생기고,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이제 날마다 나를 지나치지 않으시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고 사십시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의 긍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긍휼히 여기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에 주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달려 나온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평생 앞을 못 보며 살던 사람이니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뜨기를 원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4:23-24)  여기에 예수님의 3대 사역을 알려줍니다.  

가르치는 사역, 전파하시는 사역, 그리고 치료하는 사역입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 중에 치유사역이 중요합니다.  당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힘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낫게도 해주셨습니다.  눈먼 자를 고치고, 혈우병 앓던 여인도 고치고, 열병에 걸린 사람도, 손 마른 사람도 치료해 주시고, 귀신 들린 병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습니다.  때론 부드럽게 만지셨고, 능력의 손으로 만지셨습니다.  때로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으셨고, 영혼의 눈빛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많은 병자가 나왔고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병과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의사만 찾지 않고, 약국만 가지 않습니다.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죽을병에 걸려도 하나님이 데려가지 않으면 죽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괴로울 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와 바디매오처럼 '주여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혹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십니까?  의학으로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을 내려 절망 중에 있으십니까?  이제 바디매오처럼 주님을 불러보십시오.  주님께 나아와 마음의 소원을 아뢰어 보십시오.  주님의 뜻이면 살고, 죽기에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낫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해주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간구하여 꼭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육신만 치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영혼도 치료하셨습니다.  여기 소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육신의 질병에서 치료된 기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영적인 기적이 있습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이 치료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이 더 큰 의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본문에서 중요한 말씀이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따르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길에서' 라는 단어를 추가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소경의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떠지고, 치료된 건강한 모습을 엿봅니다.

당시 소경은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많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손가락질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기피하며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원망스러운 삶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사회에서 격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만 모여 살았습니다.  그나마 형편이 넉넉하면 괜찮았을 것이지만,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하루 동냥하여 하루를 사는 자들입니다.  먹고 사는 것에 매달려있으니 약을 써보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니 그는 살아있으니 사는 것이지, 결코 제대로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서 버림받아 마음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적적으로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그가 눈이 떠진 후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자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프게 했던 사람들보다 더 수고하여 성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길에서'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는 육체와 함께 마음도 치료가 된 것입니다.  눈을 뜬 이후 그는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가장 크게 본 것입니다.  주님을 크게 보니까 다른 것은 너무도 작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상처와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치료가 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치료된 것은 주님이 마음도 만져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눈을 만지셨다고 강조합니다.  그저 말씀만으로도 모든 병을 고치시는 주님께서 그의 눈을 만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눈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만져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온기가 가까운 곳에서 따뜻한 사랑으로 전해지면서 그는 육신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치유된 사람으로 주님을 따릅니다.  지금 주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헌신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도 치료해 주십니다.  상처받은 우리의 속을 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는 육체를 치료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을 치료하는 자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까지 만져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내 마음을 치료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을 당하셨고, 당시 사람들에게서도 큰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 채찍에 맞고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당하며 깊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수없는 종류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해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상처를 받아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기에 상처 받아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위로하고 치료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보다 더 아픈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육체는 멀쩡하지만 마음이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지금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을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오늘도 상처를 안고 나온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을 만져주셔야만 합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주님이 치료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크로스비 여사야 말로 마음이 치유된 사람입니다.  그녀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비록 육체의 눈은 뜨지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이 떠졌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95세를 사는 동안 명랑하고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숙하고 풍요로우며 기쁨이 넘치는 삶을 보내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녀는 상처받은 치유자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마음이 건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치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힘들 때마다 그녀는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마음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만복근원 우리 주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있을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나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하여 주소서, 내 마음을 한번 만져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이제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모든 상처의 치유를 받으시고, 건강한 사람으로서 남은생애 상처받은 치유자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