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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 2 계명(출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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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계명(출 20:4-6) 
  
 
1923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의훙교회 주일학생 김복선의 부모는 귀신항아리를 애지중지하였습니다. 하루는 그의 부친이 귀신을 섬기려고 보니 단지가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부친은 자신의 딸이 예수를 믿고 있으므로 단지를 없앤 것이 딸의 소행인 것으로 확신하고 매를 때리며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김복선은 단지를 자기가 깨버리기는 했어도 “위하는 단지가 걸어 도망갑디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부친은 “이년아! 위에 놓은 단지가 어찌 달아날 수가 있느냐?”하면서 때렸습니다. 그러자 복선은 꿋꿋하게 “걸어가지도 못하는 단지가 어떻게 복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그의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복선을 집에서 내어 쫓았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제 2계명 “우상숭배하지 말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외적인 우상과 내적인 우상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양과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은 외적인 우상숭배입니다. 모양과 형상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와서 숭배 받는 것은 내적인 우상숭배입니다. 겔 14:4에 보면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설교는 외적인 우상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들이 형상을 만드는 용도

1)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단군교를 믿는 이들이 단군상을 만들어 학교에 설치하려고 하는 것은 교육적인 목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숭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어떤 사람이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듭니다. 
예를 들면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세종대왕 동상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숭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들이 하신 훌륭한 일을 후대 사람들이 잊지 않게 하려는 교육목적으로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예술 작품입니다. 
올림픽 공원에 가면 많은 조각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조각품들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교육적인 목적이나 예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활동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 시대에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여러 작품을 만들게 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 숭배의 대상이 될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2계명은 “우상숭배하지 말라”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배하기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기독교 신앙에서 우상숭배로 정하고 거부하는 것

1) 어떤 형상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단기 선교를 가면 대개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견고한 진을 찾아가서 대적기도와 중보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찾아갔던 강력한 견고한 진에는 거의 대부분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조상의 신위를 만들어 제사 드리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나라 유교에서는 차례를 지냅니다. 조상의 은혜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정신에서 유래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차례는 샤머니즘과 결합하여 조상의 혼백을 우상시 하게 되었습니다. 차례 상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여 조상의 혼백을 섬기고 인간의 화복을 비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전 10:19-22에 보면 제사를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사는 우상숭배입니다.

천주교는 십계명 중 2계명을 없애고 차례를 문화의식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할 때 천주교를 쉽게 선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는 제사를 거부했고 그 결과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가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과 타협하게 되면서 제사를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천주교인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사를 거부합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우상숭배입니다. 

3) 궁합을 보거나 점을 치거나 날을 받는 것 그리고 굿을 하거나 돼지머리 놓고 제사를 하는 것도 우상 숭배입니다. 
심지어 스포츠신문에 나오는 자신의 오늘의 운수를을 보는 것도 우상숭배이며 별자리를 따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몇 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매표소 앞에 점을 치는 가판대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고 젊은이들이 쌍쌍으로 점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일입니다. 

대하 33:6에 보면 므낫세 왕 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몇 가지 원인이 나옵니다.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굿을 문화재로 여기고 문화행사로 굿을 많이 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일입니다. 집을 짓거나 사업을 시작하거나 큰 공사를 할 때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를 하는데 이것 역시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일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지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위하여 주셨고, 연약한 양과 같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므로 천대까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금하신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경배를 받을만한 능력이나 신성이 없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에게 생사화복을 가져다줄 능력이 없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 115:4-7에 보면 우상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지적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만든 사람이 더 능력이 있지 만들어진 우상이 더 능력이 있겠습니까?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합니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합니다.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런 무능력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한 선교사님이 어떤 우상 숭배자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아무리 전해도 그 우상 숭배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교사님이 그 우상 숭배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섬기는 신상을 강아지와 함께 강물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네가 섬기며 복을 달라고 비는 그 신상과 강아지를 강에 집어던지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강아지는 헤엄쳐서 올라와도 자네가 섬기는 우상은 올라오지도 못하네. 물에 던져 버리면 거기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복을 준단 말인가?” 그 말에 우상 숭배자가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몇 백 미터가 넘는 우상이라도, 금으로 되었든 돌로 되었든 우상은 넘어뜨리면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강아지보다 못한 것이 우상입니다.

사 44:15-17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무 중 일부는 땔감을 삼고, 그 중에 일부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또 나머지로는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며 말합니다.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자기가 만든 우상에게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웃기는 일 아닙니까?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우상의 힘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태평양 어느 작은 섬에 가면 「볼기 맞는 신」이 있습니다. 사냥을 나갈 때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에 신전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내가 지금 바다에 나가는데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십시오.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십시오. 내가 지금 산에 사냥을 하러 나가는데 사냥감이 많이 걸려들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갑니다. 고기를 많이 잡거나 사냥을 많이 하면 다시 신전에 와서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풍랑을 만나서 고기를 잡지 못하거나 맹수를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겨서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신전에 들어가서 이 신을 엎어놓고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이 못된 신아 내가 바다에 나갔는데 풍랑을 일으켜, 그래 내가 산에 사냥을 하러 갔는데 맹수를 보내! 그것도 못 막아! 한 번 더 이런 일 있다면 네 궁뎅이 찢어지도록 맞을 줄 알아라.” 그러고 볼기를 두들겨 팹니다. 그래서 이 신 이름이 「볼기 맞는 신」입니다. 이게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이 시대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볼기 맞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라는 말은 신을 형상화해서 경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참신이신 하나님은 육적인 형체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눅 24:39에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 4:15-19을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상기시키시면서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4:24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 이후로 남과 북으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 왕국은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북왕국의 10대 왕의 이름이 예후라는 왕입니다. 예후 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은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서 없애버렸습니다. 그가 왕이 되자 “내가 바알을 섬길 테니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한꺼번에 모여서 바알을 섬기자.” 해 놓고 모인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신전은 공중변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후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나라를 남북으로 가른 사람입니다. 그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된 후에 백성들을 통제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성들은 남쪽의 유다나 북쪽의 이스라엘이나 관계없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남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니까 북왕국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생각해 낸 것이 성전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보암이 선택한 장소가 단과 벧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끝이 단이고 남쪽 끝은 벧엘입니다. 여로보암은 이 두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신이다.”라며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예후의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다른 신, 바알을 섬기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것이 죄입니다. 이방신은 제하여 버렸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죄입니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왕들 중에는 그런 실수를 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신을 섬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은 무소부재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디든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장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 하신 분입니다. 한국에 계시면서 동시에 미국에도 계시고 일본에도 계시고 중국에도 계십니다. 교회에 계시면서 동시에 집에도 게시고 회사에도 게시고 학교에도 게시는 분입니다. 
시 139:7-10에 보면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피해 갈 곳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늘에 올라가도 계기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고, 무덤 속에 들어가도 거기도 계실 것이고, 땅 끝에도, 바다 끝에도 하나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와 기독교신앙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우상숭배는 신이 정해진 일정한 곳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앞에서는 두렵고 떨릴 수 있지만 우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남이 볼 때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흑심을 품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경건한 요셉은 번번이 뿌리칩니다. 한번은 보디발의 아내가 종들을 집에서 다 내보내고 요셉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듭니다. 그리고 요셉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이 때 요셉이 우상숭배의 신앙이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상이 보이지 않는 곳이니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 수 없다고 거절하니 보디발의 아내가 집 안에 있는 우상의 머리를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보지 않으니 동침하자”고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우상의 머리를 덮어버렸으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요셉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하는 장소가 정해진 우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3)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인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면 그게 하나님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주제에 하나님을 만든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상상력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해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상상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도 없고 또 기가 막힌 상상을 하고 그 상상력대로 우상을 만들어도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셋째,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우상을 만들어도 하나님의 가치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우상은 금송아지였습니다. 금 매끼만 칠한 것이 아닙니다. 안과 밖 모두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값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우상을 만들어도 하나님의 가치에 1억분의 1도 안 되는 것입니다. 

5)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질투가 무엇입니까? 질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내 남편 곁에 어떤 여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그걸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속이 좁고 옹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와 당신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다른 여자가 남자들하고 데이트를 하든 함께 잠을 자든 질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내 아내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한다면 내 마음을 나도 어떻게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와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배우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6) 우상숭배의 죄는 삼, 사대 까지 저주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겔 14장에 보면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죄악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찾아오는 세 가지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대적하십니다. 둘째, 사람들에게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 거리겠습니까? 저주의 표본이 되어 이야기 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끊어버리신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전 10장에 보면 4가지 악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와(7절) 음행(8절)과 주를 시험함(9절)과 원망함(10절)입니다. 첫 번째 말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풀리지 않는 저주]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제베카 브라운은 저주에 대한 전문가이며 저주를 끊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책에서 후손에게 유전되는 저주를 몇 가지 서술하였습니다. 여기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조상들의 죄입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가 후손들의 생활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행한 일들이 조상들의 죄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범하고 있는 죄가 후손들의 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자녀들이 복 받기를 원하면 내가 잘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사단 숭배입니다. 조상들이 사단을 섬기고 귀신을 섬겼으면 그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자녀들은 대부분 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 결과입니다. 반면에 무당의 자녀들은 대부분 저주 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귀신을 섬긴 결과일 것입니다. 

셋째는 부정한 것들과의 접촉입니다. 특히 우상숭배용으로 만들어진 골동품이나 기념품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는 5년 만에 완전히 망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저자는 그 가정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가정에 궁핍의 저주가 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궁핍의 저주가 낀 물건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골똘히 생각하였으나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알려달라고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현관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실쪽에서도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보니 멕시코 걸인 모습의 조각상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아버지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사 가지고 와서 선물을 한 것입니다. 높이가 90㎝쯤 되고 아주 정교하고 값비싼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걸인 조각상의 부서진 조각들을 쓸어버리며 궁핍의 저주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4년 안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죄를 갚는데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저주가 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숭배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7)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니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다가 어려움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약 30m에 달하는 거대한 금신상을 바벨론의 두라 평지에다가 세웠습니다. 금으로만 만들었으니 그 광채가 얼마나 휘황찬란했겠습니까? 우상을 만든 느부갓네살 왕이 명렁합니다. “온갖 악기로 음악을 연주할 때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 절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아주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버리겠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엄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평소에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왕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진노한 왕은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만들도록 명령합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붙잡고 풀무불 속에 집어 던지려 했던 군인들이 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머리털도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고 옷도 그대로고 불 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불 속에 던져진 자들은 세 명이었는데 왕이 보니 4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 네 번째 사람을 보고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믿음의 정조를 지키다가 몇 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그 뜨거운 불 속에서도 끄떡도 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셨습니다. 둘째, 임마누엘입니다. 주님이 불 속에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셋째, 전도의 복입니다. 그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왕이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보통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의식해서 우상숭배를 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목숨 걸고 믿음을 지키면 핍박은 받을지 모르지만 결국 상대방을 하나님 앞에 무릎끓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넷째, 높아지는 복입니다. 단 3:30에 보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주었다고 말합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한 달에 하나씩 해서 모두 12개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우상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집에 남아서 점포를 돌보고 있었는데 70이나 된 원기 왕성한 노인이 우상을 사러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노인의 나이를 묻고는 “당신보다 더 젊은 신을 섬기다니 얼마나 바보같은 일이요”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여자가 신들에게 드리기 위해 먹을 것을 가지고 가게로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몽둥이로 때려 부시고 한 개 남은 우상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몽둥이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인 데라가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책망하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여 어떤 여자가 신들에게 드린다고 먹을 것을 가져 왔는데 모든 신들이 제가끔 탐내서 그중 제일 강한 신이 자기 혼자 먹으려고 나머지 신들의 머리를 때려 떨어뜨렸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데라가 “야, 말도 안 되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아브라함은 “지금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아직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쳐부수기를 바랍니다. 버릴 것은 버리십시오. 우상, 별자리와 관련된 책, 토종비결, 부족 등은 버리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나와 우리 가정은 하나님만 섬긴다” 따라해 봅시다. “나와 우리 가정은 하나님만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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