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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증거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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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증거 (요 1:35-42)

 
중국 베이징에 가면 자금성이 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의 궁전입니다. ‘자’자는 자주색이라는 뜻이고 ‘금’자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하면 forbidden city-금지된 도시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당시 황제는 일반 사람은 일평생 한 번도 얼굴을 보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관리들도 멀리서 황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접근할 수 없는 사람, 또 접근할 수 없는 자리, 여기에 힘과 권세를 겸하면 신비함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의 군대의 군인으로 싸웠던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전투 중에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언덕에 혼자 서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황제가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이에요. 만일 그 순간에 이 사람이 나폴레옹 곁에 달려가서 그를 보호했더라면 이후에 공로를 인정받아서 표창을 받았을 것인데 머뭇거리다가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사람의 가족이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옛날에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톨스토이가 그런 이야기를 포함시켰을까 이해가 됩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로써 나폴레옹을 위해서 싸우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나폴레옹을 가까이 볼 기회가 일평생 한번 있을까말까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신화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신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땠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이미지를 관리하셨을까. 그 당시 사람들 중에도 그야말로 일평생 단 한번 예수님을 볼까 말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그 여성에게는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도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겉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기절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오픈하셨습니다. 

요즘에 열린사회 ․ 열림 음악회 ․ 열린 예배 이런 식으로 오픈, 드러내는 것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당신의 삶을 오픈하셨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와 보라는 말씀입니다. ‘랍비여 어디 거하시니이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와 보라’, 아주 단순하게 초청하셨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려면, 내가 어디 거하는지 알려면 와 보라는 초청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은 자금성의 황제처럼 또 나폴레옹처럼 멀리 있는 신화적인 인물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가까이에서 같이 살고 같이 삶을 나누고 그리고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에 대한 기록과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멀리서 신화적으로 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지내던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웬만한 인물은 멀리서 보면 영웅처럼 보일지라도 가까이서 오래 두고 보면 하찮은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 속담에도 ‘어떤 사람도 자기 하인에게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허물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사생활을 감추려고 합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감춥니다. 연기를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강단에 섰을 때와 강단에서 내려왔을 때의 모습이 다른 경우가 많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초청하셔서 ‘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24시간, 365일을 함께 지내고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와서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같이 여행도 하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놓은 것이 신약성경이요 신약성경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신약성경의 증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인 것뿐만이 아니고 제자들의 예수님 경험에 대한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따른 게 아니고 예수님을 랍비로, 선생으로, 스승으로 따르다보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결론적인 차원에서 내린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입장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결론부터 배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부터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납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요구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이런 분이 돼야 되고 저런 분이 돼야 되고 이런 속성이 있어야 되고 저런 조건이 있어야 되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님에 대해서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은 성격도 성자 같아야 되고 인자해야 되고 화내면 안되고 당신의 의견이 불분명해야 되고 오늘날로 치면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알 수도 없는 신화적인 불분명한 산신령 같은 분을 마음속에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예수님은 잡수시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산신령처럼 늘 그러니라~ 저러니라~ 이런 분으로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천년 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예수 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 행적 ․ 삶을 가까이서 보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은 정말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런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해 준 사건이 예수 부활사건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납득하기가 쉽습니다. 상상하기가 쉽습니다. ‘아,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제자들을 설득시키셨겠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기가 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산신령처럼 사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음식도 안 드시고 물도 안마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감정을 표출하지도 않고 늘 기도만 한 게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같이 대화하시고 또 때로는 피곤해서 주무시고 또 사람들의 배반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실 때도 있었고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도 있었어요. 예수님은 분을 품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시고 기도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싫어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배반한 사람들이 있었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우리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에 대해서 너무 결벽증적으로 구별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찬송가는 거룩하고 가요는 속되고, 성극은 거룩하고 일반 영화는 속되고,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세속적이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속된 존재라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와 보라고 초청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완벽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전에도 그랬고 오순절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를 받는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것이 사람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게 되고 항상 죄의식을 갖고 살게 되고 그리고 연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서로 연기한다고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우리가 더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늘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건 역설적인 것입니다. 안 그럴 것 같은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십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서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우리가 완벽하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고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살 수 있다면 성령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살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진리이지만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미국의 존 윈버 목사는 빈야드 운동을 시작한 창시자입니다. 또 많은 찬양곡을 작사 ․ 작곡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이분이 아들과 심한 말다툼을 했어요. 그래서 언짢은 마음으로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아주 안 좋았어요. 죄의식이 느껴졌어요.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내가 목사이고 믿음의 사람인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서 찬양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랍니다. 가사까지 덧붙여서. Isn''t He beautiful, beautiful, Isn''t He?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된 곡입니다. 

삽시간에, 한 순간에 한 곡의 아름다운 찬양곡이 완성됐어요. 그 마음속에서. 지금 자기 가족과 싸워서 마음속에 불편함과 아픔과 죄의식을 갖고 가는 도중에 마음속에서 찬양곡이 우러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곡, 그 찬양곡이 어디서 흘러나왔습니까. 존 윈버가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찬양이 우러나옵니까. 아니에요. 완벽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이 괴롭고 고달프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부끄러운 것 천지지만 그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 같은 인물을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감사와 예배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누구보고 와 보라고 말할 때는 와서 나의 완벽한 모습을 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와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잘 돼 있는가를 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한 데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와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이걸 확신하기 전에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 죄인들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 또 죄인을 위하여 찾아오신 예수님, 연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 이것을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또 그런 데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와서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서 헤맬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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