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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름을 부으실 때 (시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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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부으실 때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 

빈 잔과 같던 시인의 영혼이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졌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기름으로 그의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등장하는 소위 삼직에 대한 기름 부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직임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셨습니다.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그들이었습니다. 

먼저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이 죄 사함을 얻게 하고,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왕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섬김과 함께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라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도록 부르신 일꾼이었습니다. 

이 세 직분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만들기 위해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 직분을 소명을 받은 사람들을 임직시키실 때,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이 기름 부음은 단지 의식적인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세 번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긴 것은 첫 번째 기름 부으심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왕으로서 기름을 부었을 때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기름을 부으매 여호와의 성신이 그에게 크게 감동하여 임하였다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구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과 신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마다 주님께서 그의 안에 성령이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가운데, 충만한 성령의 내주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에 신자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경륜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사람 중심이기보다는 일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특별한 일에 봉사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그 성령이 그에게 임함으로써 예전에 없던 탁월한 지혜를 갖게 되거나, 순결한 마음이 되거나, 혹은 담대한 용기와 능력을 부여받아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을 수종드는 데에 적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영을 거두시기도 했고 때로는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심각하게 파기하였다면 징벌로써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범죄 하였을 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시지 말라고 간절히 매달릴 정도로 영적인 위기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한때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선임자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성신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그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예전에도 주님을 잘 믿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묘사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우주에까지 가득 찬 영광과 현존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 다윗이 철학과 신학의 최고의 모델이 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몰두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썩게 하고, 죽음과 같은 욕망과 죄 속에 얽매여 사는 이유는 이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의 참 맛을 모르기 때문이지만, 시인은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자신뿐만 아니라 이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우주와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당신을 가장 닮도록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격차를 가진 피조물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고, 탁월하게 잘 깨달아집니다. 반대로 이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무료하고 싫증날지 모릅니다. 

도대체 우리의 참된 만족이 어디서 옵니까?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은 이 세상의 물질의 부족 때문이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한 나라의 제왕들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만족이 발을 디디고 사는 세상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마어마한 물 위를 떠다니지만,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바닷물을 먹고 해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리는 물을 필요로 합니다. 그처럼 인간들도 진정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세상의 욕망에 자신의 육체를 우겨넣고 어떤 일시적인 행복감을 맛봄으로써 죄를 짓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입니까? 생수를 먹고 진정으로 해갈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구정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원하고 자신의 진정한 만족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금욕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은혜의 생수,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탁월하고도 신령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는 스스로 그렇게 더럽고 구접스러운 세상의 욕망에 자기를 우겨넣을 마음을 접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충만하신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어주시고 싶어 하시고, 이미 성령의 그러한 내주하심 속에 있는 신자들이 융성한 죄를 버리고 이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를 단지 세상의 유형적인 물질과 환경 속에서만 찾는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것은 주님의 물 붓듯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충만한 사랑과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사는 것만큼 참된 행복이 인간에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더러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참 아름다운 사랑을 성령의 임재 속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질그릇같이 연약했던 사람들이 사자와 같이 살았습니다. 연약한 성도였지만 그들은 맹수처럼 용감하게 어두운 세상을 살았고, 진리를 위해 외톨이가 되거나 참된 것을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세상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성령의 탁월한 임재가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서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치는 기쁨 속에 살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속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부어 우리를 주님의 자녀 되게 하셨는데, 세상의 염려와 근심 속에서 악과 가깝고 아름답고 참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의 환경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의 특권을 입었음에도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충만한 성령의 신령한 임재 속에서 탁월한 기쁨 가운데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악한 의지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범죄와 악한 생각과 마음의 분요함으로 근심시켜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분을 근심시켜 드리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리면서 그 분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만족이 자신 안에 성령의 임재로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것은 마치 피 묻은 칼을 들고 원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미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악한 의지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을 미워하십니다. 죄에 대한 사랑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시인도 한때는 범죄하고 주님의 마음의 못을 박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구절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러나 그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솔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그 사람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넘치게 하셨고, 처음 기름 부음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 차고 넘치던 그 거룩하고 신령한 환희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썩어질 세상 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주셔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여러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떼를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다그쳐서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자기를 주님의 진리 앞에 굴복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런 마음으로 하나의 집중된 심령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성령의 은혜 안에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언제 경험되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린 아이와 같은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재 하셨을 때, 주님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사랑할 때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께 목마른 사람들, 이 썩어질 세상에서 구접스러운 모든 욕망으로부터 몸부림치며 벗어나기를 원하고,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처음 회심할 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욕심이 가득 붙은 우리의 허위와 거짓을 벗어버리고 세상에 붙은 욕심들을 털어냅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도록,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이러한 마음을 가득 부어주셔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마다 그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뵙도록 영적인 은혜를 위해 기도합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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