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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가꾸어 갈 하나님 나라 (롬 14: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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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꾸어 갈 하나님 나라
(롬 14:13-23)

기적이란?
흔히 기적은 홍해가 갈라진다던지,  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말끔히 나았던지, 뭐 이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적은 이와 같은 것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요 20:29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복된 기적의 사람들이요, 지금 세계방방곡곡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복된 기적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되었으니 성경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기적의 주인공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도 믿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해외 다른 나라로 그렇게 많이 나가는 우리나라가 되었지만, 아직 몸으로 저 천국을 갔다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국을 확신하며 이 휴가철에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이 진짜로 기적입니다. 
눅 17:21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적의 사람들로써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나라를 믿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늘 한가족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그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 갈 것만 남았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가꾸어 갈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칭의- 의롭다고 여겨 주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구석구석 모든 것에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적합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에는 모든 것이 다 있지만, 죄만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들만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17절에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칭의)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인되는 길을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롬 4:3-8을 보겠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해서 받는 것은 정당한 댓가입니다.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없앨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인이 되라고 요구할 수 없음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신 죄를 십자가에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 믿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롬 5:8-9 상반절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부딪칠 것, 거칠 것
‘의’의 기준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빵을 만들어 먹든 떡을 만들어 먹든, 포크를 사용하든 젓가락을 사용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방식이 아니라고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규정들을 자꾸 만들어 놓습니다. 
13절은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딪칠 것은 ‘장애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아시아로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유럽에 전하라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많은 부분에서 서양 문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포그 사용한다고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두 포크를 사용해야한다고 한다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거칠 것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길에 함정을 파 놓고 걸리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비판과 비난, 정죄가 난무합니다.  그러니 ‘평강’과 ‘희락’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도처에 장애물과 지뢰, 덫이 있는데, 그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강’과 ‘희락’입니다. 
 13절에는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다시는’이라는 말 속에는 예전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인되기 전에는 내 힘으로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평강이 없었습니다. 행하는 것마다 만족할 수 없으니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에는 전부 ‘도끼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 봐라!’ 율법을 행해서 의롭게 되려는 바울도 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잘못 걸려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 진 자
하나님 나라에 사는 기적의 사람들은 옛 방식, 세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용서 받은 사람들은 용서하며 삽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 
마18장을 보면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 진 자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용서받고 나오면서 백 데나리온 빚 진 친구를 만납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6천억 원 빚을 없던 것으로 은혜를 입고 나오는 길인데, 마침 자기에게  만원을 꾼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멱살을 잡고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반드시 갚겠다고 하니, 당장 갚지 않는다고 경찰에 넘겨 감옥에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감옥 간 이가 불쌍해서 임금에게 사실을 알렸습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 빚 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절) 그리고 6천억을 다 갚도록 감옥에 넣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그 후편은 이렇게 되었답니다.  일 만원 빚 진 자는 곧 풀려났습니다. 이명현이 일 만원을 대신 내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이라도 그렇게 했겠지요. 다 은혜를 아는 자로써 평강과 희락을 나누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6천억 원 빚 진 자는 아직도 그대로 감옥에 있습니다.  누구하나 대신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없기에. 용서받고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 도와 주고 싶지도 않지만, 6천억 원은 너무 커서 내가 도와줘도 소용없다고 생각해 단 한 사람도 가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 무릎 앞에는 대신 갚아 준 ‘만원’만 달랑 놓여 있답니다.  

깊은 데로 가서
또한 ‘평강과 희락’을 맛보려면, 자기의 경험과 아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눅 5장에서 베드로는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언제나 빈 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허탕치고, 아침이 되어 빈 배로 돌아와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빈 배를 빌어 육지에서 조금 떼어 달라고는 무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  배를 빌려 준 것을 갚으시려는 듯,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낮에 깊은 곳에 고기가 없다는 말.  그런데 그 사실을 몰라도, 내가 베드로라면 깊은 곳으로 간 것은 참으로 의외입니다. 
내가 고기 잡는 베테랑이라면, 외지 사람, 그것도 목수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밤새워 그물질을 했고 쉬지도 못했는데 또 나가라고 하면, 그것도 깊은 데로 가려면 멀리 가라는 소린데,  화나고 열 받치는 일입니다. 그물 손질도 다 했습니다.  같다 오면 또 손질해야 합니다. 다음 날 나가고 말지! 
하나님 나라는 세상 경험으로, 내 주관으로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기준인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집 때문에 화평이 없습니다.  열받아 자신에게도 평강이 없습니다.   19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먹는 음식,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15절 하반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지식과 경험, 아집과 고집, 내가 원하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오지 못하게 하고, 믿음의 형제 자매도 실족하게 한다면 과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참으로 가꾸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버릴 것도 많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는 것 대로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고전 8:11-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 양반이!”
하나님 나라는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진 나라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때,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서로를 귀하게 여깁니다.  서로 덮어 줍니다. 서로 위해 줍니다. 
저는 가끔 귀에 거슬리는 호칭을 듣습니다. 예수 십자가로 의롭다고 인정 받은 사람들은 모두 ‘성도’입니다. 직분을 받았다면 직분의 호칭을 쓰는 것이 제일 무난합니다. 그러나 직분을 받았더라도 ‘성도’입니다. 장로님도 목사님도 성도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라는 호칭이 제일 좋은 호칭입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는 담임목사님을 비롯하여 교역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교역자들이 여럿 있다 보니, 그 관계가 때로는 경쟁관계도 되고 때로는 오해도 있고 기분 나쁜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교역자가 저에게 “이 양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반’이라는 말, 참 복잡 미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반 상놈 할 때는, 신분 높은 그래서 존귀한 자 같습니다. 그런데 싸울 때, 욕하고 싶으면서 욕은 할 수 없고, 존칭 쓰기는 죽기보다도 싫고. 이럴 때 딱 좋은 말이 바로 ‘양반’입니다. 
저를 ‘양반’이라고 불렀는데, 그 자리에서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영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 생각이 나겠습니까!  가만히 보니, 가끔 담임 목사님에게도 ‘양반’이라는 호칭을 쓰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그 교역자가  복잡 미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고 들으면 기분도 영 묘해지는 ‘양반’이라는 호칭을 섰는지 압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가 믿음의 백성인 ‘성도’가 아닙니다.  동역자와 파트너가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보면 자기하고 맞지 않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일처리 방법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분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전에는 원수였지만, 이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아버지와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천차만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서 더불어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서로 다름을 통해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주워 온전케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 나라에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 되게 하는 성령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서로 존중하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 덕을 세워 화평을 맛보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가운데 평강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의 사람들입니다. 죽었다가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복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진짜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천국을 만들어 봅시다.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돕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우리들을 어시스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멋진 꼴을 넣어 하나님과 천사들의 환호성을 들어 봅시다. 

(서연교회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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