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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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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救主)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범(模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가 당할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고, 믿는 모든 자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엄청난 유혹과 시련을 당하시면서도 결코 범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셨으므로, 우리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범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극도의 자기중심 시대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신 질환자들이 양산되고 있고, 인간의 고통은 점증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매우 공격적인 방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기기 위하여는 무슨 일이라도 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말하는 잣대는 무슨 일을 이루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갔느냐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시대에 본문의 교훈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본래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권면의 문맥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다툼과 허영, 교만과 분쟁으로 시끄러웠고,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본문(6-11절)은 각각 3행의 여섯 절로 이루어진 찬송시입니다. 주석가들은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초대 교회의 찬송가 중 하나였다고 말합니다(J. Jeremias, 요 13:3-18, 마 16:25-26). 이 찬송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재하신(pre-existent)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일 본체이시라는 사실, 그럼에도 자기 비하(卑下)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십자가 수난으로써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는 사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영광중에 다스리고 계신다는 엄청난 진리의 말씀이 모두 진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는 권면은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요긴한 말씀입니다. 종말의 흔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하고, 이 마음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마음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지니신 신성이나 본질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우다(케노오)’ 라는 표현은 ‘버렸다’ 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던 영광스런 지위를 잠시 뒤로 한 채 종의 형체를 입으셨음을 의미합니다. 
7절은 3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주(主) 문장은 ‘자기를 비웠다’ 입니다. 나머지 둘(‘종의 형체를 가졌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은 분사로 되어 있어 ‘자기를 비웠다’ 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에서 ‘종(둘로스)’ 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의미합니다(사 52:13-53:12). 예수님은 종으로서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다 전하셨습니다(요 17:8).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습니다(요 14:11). 
주님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는 종으로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공생애 기간에도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눅 9:58).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는 무덤까지도 빌리셨습니다(마 27:57-6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누구십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십니다. 여기 ‘본체(모르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질과 성격’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神性) 즉 하나님의 본체를 지니고 계십니다. 이 말은 기독교의 중요교리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일체’를 지지해 줍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삼위로 계시나 영광과 능력과 지위에 있어서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자기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대로 취함으로써 인성(人性)을 지닌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성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인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살과 피, 희로애락의 감정 등을 지닌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죄는 없으셨던 것입니다(히 4:15).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신 그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죠지 뮐러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뮐러의 전기 작가인 피어슨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죠지 뮐러의 대답입니다. “피어선 박사님, 뮐러가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내 존재는 완전히 깨어지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다보니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완전히 깨어져 죽어버렸습니다.” 우리 모두의 대답이 되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신 것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라는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여기 ‘모양(스케마)’ 이란 단어는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형태나 구조’를 의미합니다. ‘스케마’는 ‘모르페(본체)’와 연결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인간과 전혀 다름이 없는 진정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눅 2:52, 요 1:14). 
주님은 여자의 몸을 통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고(눅 2:7),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함을 경험하셨습니다(마 4:2, 요 4:6-7, 막 4:28). 슬퍼하며 울기도 하셨고(요 11:35), 육신의 몸이 지니는 최종적인 한계인 죽음도 경험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시되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에서 피조물인 사람의 ‘스케마(모양)’를 취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철저히 비하(卑下)시키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진 상대방의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이 비천한 그런 신분의 형체를 입고 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인간의 ‘모르페(본체)’가 아닌 ‘스케마(모양)’로 나타나셨다고 표현한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 되셨지만 그 본체(모르페)에 있어서는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계셨고, 그 모양(스케마)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신적 ‘모르페’를 유지하고 계신 분으로서 인간이지만 죄가 전혀 없는 인간, 인간처럼 시험을 당하셨지만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면서 우리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나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자 다미엔은 평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나환자들이 사는 몰로카 섬을 지나다가 그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구제나 봉사의 손길을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사치스런 행동으로 여겨서 자신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성심을 다해 그들을 섬기려고 노력하던 다미엔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기에 이르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옵소서.”
그후 어느날 다미엔은 자신도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오히려 크게 기뻐했습니다. 함께 나병환자가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의 정신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분들이고 스스로도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지만, 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육신의 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닮아가야 할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헨리 누엔(Henri Nouwen) 박사는 세계적인 학자이자 교수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명문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박약자 수용소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학원의 직원으로 자청해 갔습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박약자들에게 용변 보는 법을 가르치고 식사와 목욕을 돕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후 책도 20여 권을 집필했으며, 그 책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누구나 그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길을 포기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몸소 행하셨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만 체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그가 유명한 사람이었을 때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니 예수는 안보이더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마음!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안에 품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 번째로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본절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 몸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혈투를 생각해보십시오.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번민과 고통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 14:33-3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러나 주님은 결국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우리에게 바로 이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전생애(whole life)는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 자기 희생으로 특징 지워집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라고 말씀하셨고, 주님 자신이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은 우리를 존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어 로마에서 널리 시행되던 ‘십자가형’의 그 십자가입니다. 당시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사형의 방법이었고, 유대 사회에서는 이처럼 나무에 달려 죽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신 21:22-23, 고전 1:23).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가장 억울하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잔인한 형벌입니다. 죄 없으신 분, 한점 허물도 없으신 분이 가장 극악한 처형을 당하시면서도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린 양처럼’ 묵묵히 죽음의 길로 내려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저주받아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키기 위함이요, 인간이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죽기까지 극도로 낮아지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비천한 자리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구하는 자가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비참한 자리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친히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2:14, 15=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졌습니다. 그가 비참하게 됨으로 우리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성도들은 모두 죽기까지 복종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아들을 번제물로 드린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한 성도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은 죽기를 각오하고 당시 세계 최강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열국에 드러냈습니다.
이방 땅에 노예로 잡혀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의 형벌을 알고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아니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7배나 뜨거운 풀무불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고도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은 적개심에 이성을 잃은 무리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날아오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사도들은 모두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으로 무장했던 신앙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면 아프리카이든 인도이든 어디든지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주님의 사랑과 희생,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전했고, 예외 없이 모두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기독교 역사에 수놓았습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나 갑바도기아의 신앙의 전사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과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히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모두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여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나에게 이렇게 죽기까지 복종할 마음이 있는가?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저 유명한 그리스도의 승귀(= 높아지심, Exaltation)를 나타내는 구절을 함께 봅시다.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이제 영광의 심판주로 속히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땅의 참 일꾼을 찾으실 것입니다. 누가 참 일꾼입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을 자신 안에 품는 자입니다.
자기를 비웁시다. 자기를 낮춥시다.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합시다. 
복음은 일종의 파라독스입니다. 겸손한 자가 존귀하게 여김 받습니다. 섬기는 자가 섬김 받습니다.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됩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됩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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