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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순의 삶 (5) (행 4: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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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의 삶 (5) (행 4:32-35)
                     

오늘의 주제는 단순의 삶입니다. 이 단순의 삶의 형태는 제자의 삶의 덕목입니다. 본문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교회에 크게 부흥이 일어납니다. 수자적인 부흥만 아니고 신앙부흥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때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삶에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그때 성도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돌봄이 있었습니다. 서로 지체로서 형제애가 발동하였습니다. 한 가족 의식이 강하게 발휘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서로 나눔”입니다. 서로 내 것이라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기쁘게 나누고 베풀었습니다. 이 나눔은 형제애가 강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주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매일 모여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매일 만남을 이루었다는 말은 형제애가 두터웠다는 말입니다. 형제애가 없으면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형제애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 더 좋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네 번째는 “매일 모여 교제하고 애찬을 나누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삶의 형태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단순함입니다. 날마다 모여 애찬을 나누고 형제애를 확인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고 예배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단순의 삶”입니다. 거기에 복잡함이나 격식이나 분열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아주 심플하고 간단한 삶의 형태만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이 단순함의 삶이 중요합니다. 특히 이것은 신앙인에게 더욱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이 단순함의 삶에서 깊은 영성이 주어지고 풍성한 사랑이 싹트고 형제애가 우러나옵니다. 원래 신앙인의 삶은 단순할수록 영성이 깊어지고 말씀의 묵상이 깊어지고 신앙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하고 분주하고 바쁩니다. 거기에 갈등과 비교와 욕망까지 보태어집니다. 그러니까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영성이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을 단순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일의 단순화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내일의 소망이 재림하실 주님께 모아져 있습니다. 미래가 아주 희망적이고 재림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소망이 크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그날의 삶에 과욕이 없고 복잡성이 없습니다. 염려나 걱정도 없습니다. 제자의 삶은 미래나 운명이나 생사를 모두 주께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너무 많습니다. 장래에 대한 걱정과 노년의 걱정 그리고 건강의 염려들로 마음이 복잡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드리기 위해 몸은 여기에 와 앉아있지만 마음이나 생각이 아주 복잡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걱정들은 95%가 부질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들이고 겨우 5% 정도만 걱정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 어려운 시대에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좋은 시대를 옛날 임금님도 상상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마음에는 온갖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운명이나 내일이나 미래나 생사나 종말은 내 영역이 아닙니다. 다 주님의 영역입니다. 나는 그분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섭리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분의 싸인에 의해서 나의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거기에 내가 할 역할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걱정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막혀서 웃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2편4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심이여”하고 설교하였습니다. 

물질생활의 단순화 

본문을 보면 물질에 대한 과욕이나 소유욕 그리고 물질을 쌓아놓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물질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은 필요한 만큼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가 있어야 필요한 만큼인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나는 조그만 집 한 칸 있고 그날 조촐하게 먹을 것이 있으면 나는 그것이 필요한 만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는 궁상떨지 말고 사용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가지려고 하면 욕심입니다. 그 상태인데도 안 쓰고 자꾸 모으려고만 하는 것도 궁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쌓아놓으려고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물질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관계가 악화되고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물질에 둘러싸이게 되면 그때부터 잠이 사라지게 됩니다. 고요가 깨지고 영적은혜가 고갈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되어 영적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쌓아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강조하십니다. 세상에 쌓아두면 도둑이 모여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욕망이 커지게 됩니다. 신앙인은 영적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생활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요이고 마음의 가벼움입니다. 그리고 생각의 단순화 입니다. 거기에서 고요와 안식과 평화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때 누우면 곧 잠이 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삶에 단순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치는 바다 위 뱃머리에서도 곤한 잠을 이루셨습니다. 그 영혼이 단순함 때문이고 평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생각이 너무 복잡합니다.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잠을 설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일의 걱정도 내일로 미루어야 합니다. 미래의 문제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헝클어진 문제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아도 안 되면 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후에 평안한 잠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려놓지 않고 마음에 안고 마음에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버스를 타면 짐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잠을 못자는 분들은 버스를 탔는데도 짐을 들고 있는 분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돈을 많이 주셨습니다. 축복입니다. 그때는 쌓아놓으려 애를 쓰면 안 됩니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때는 나누는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더 큰 은혜를 오래 지속하는 방법입니다. 돈 벌어 남 주어야 합니다. 배워서 남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오늘 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나는 집한 채도 없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보다 부자였습니다.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뱃머리에서도 잠을 이루신 분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거의가 다 물질의 덫에 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단순화 

본문을 보면 모두 삶의 중심이 예배중심이었습니다. 모두 매일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고 나누고 떡을 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매일 성만찬을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신앙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결과는 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삶이 최고의 전도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고 제자 중에서도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내용이고 신앙의 초점이고 나의 신앙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나는 내 인생여정에서 그분의 말씀대로 안내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언젠가 주님이 오실 때 나는 두 팔 벌려 맞이할 것이고 내 사후에 오신다면 나는 부활의 몸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관입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아주 단순한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내 신앙은 이 길이 정도이고 이 길이 바른 길이고 이 길이 주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는 길입니다. 

직분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꼭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야 합니까. 꼭 직분을 가지려고 안달하면 신앙이 복잡해집니다. 내가 오늘 정상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매일 기도생활 하면 내 신앙은 아주 정상적인 신앙의 삶이 됩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다급해서 금식기도 하고 울며 철야기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어느 날 주님께서 “이 일 좀 해라” 하면 “예 순종하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왜 해야 하나요”하고 물을 것도 없습니다. “예 순종하겠습니다.” 그 이상 더 좋은 신앙이 없습니다. “하라” 하시는데 왜 말이 많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이제는 살만큼 살았으니 오너라.” 하시면 “왜 빨리 부르십니까, 이럴 줄 몰랐습니다.” 하고 히스기야처럼 애걸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라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발버둥 처 보았자 얼마를 더 살 것이며 그랬다고 더 오래 살아지는 것입니까. 괜히 삶의 모양만 구겨집니다. 엊그제 병원에 심방 가서 생사를 다투는 분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생사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사람이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별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나타날 것은 부르심 받는 일과 기적 둘 중 하나만 남았습니다, 누구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생사를 걸고 기도하십시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상황에서 더 이상 기댈 조건이 무엇입니까. 더 비싼 약을 사다 투약하라 그것이 선한 방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위로부터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이 일을 좀 하라” 그러면 우리의 대답은 “순종하겠습니다.”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생활의 단순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아주 단순하였습니다. 매일 모여 함께 더불어 찬미하며 나누며 애찬을 떼며 예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즐거움이 더해졌고 즐거우니까 나눔이 이루어졌고 나누니까 행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행복하니까 성령이 더욱 거세게 역사를 하였고 성령이 역사하니까 그곳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고 기적이 일어나니까 그곳에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참 복잡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도 복잡하게 하고 머리도 생각도 복잡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일 다투고 갈등하고 이익을 따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삶이 복잡합니까. 삶에는 때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평생 나는 손해한번 보지 않고 살겠다고 매일 따집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렇게 복잡하게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의 인생역정을 보면 참 복잡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습니다. 욕심이 많으면 삶이 고달파집니다. 자꾸 꼬이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야곱이 어려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마침내 형도 속였습니다. 남을 속이면 그냥 평안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어려서부터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외가로 도망갑니다. 거기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거기서도 복잡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외삼촌을 속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신부가 뒤바뀌는 사건에 휘말립니다. 야곱은 졸지에 4명의 아내가 생겼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장인에게 속임 당합니다. 결국 자기도 속임 당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야곱은 거기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은 참 좋은 곳인데 야곱은 고향이 가까울수록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죄지은 것 때문입니다. 

고향에 가면 응당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번화한 도시 세겜으로 올라가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딸이 이방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이 난 야곱이 비로소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져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야곱이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20년 동안을 피눈물을 흘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급에서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냉탕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격입니다. 그러니 삶의 충격이 얼마나 커겠습니까. 그래서 반가워 급한 마음으로 애급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바로를 만나는데 바로가 “네 나이 얼마냐”고 물으니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이 얼마 되지 않으나 험악하게 살았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참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부터 야곱은 욕심 때문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외삼촌을 속이면서 삶이 처음부터 헝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도 속임 당하고 결국 꼬이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합니까. 삶의 단순화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내 인생의 초점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여정, 운명 모두를 주님께 맡겨놓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인생관입니다. 내가 기준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인생관입니다. 그때 주님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인도자가 되어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종말의 단순화 

본문을 보면 오늘 보다 내일 즉 주님의 재림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모든 제자들의 한결같은 삶의 형태일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종의 목적은 주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종말이라는 마지막 시간이 있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종말의 준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재림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언젠가 재림하실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준비는 나의 종말입니다. 언젠가 주님은 나에게도 이제는 오라 하시는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언젠가 부르시면 하던 일 다 놓고 나는 간다.” 이런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가장 건강한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의 삶이 평안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자의 삶은 이렇게 단순화 한 삶입니다. 왜 이렇게 단순화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 함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께 생각과 삶의 초점을 맞추어 놓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모든 관심과 정신과 목적과 삶의 초점이 주께로 향한 사람입니다. 그 삶에서 제자의 삶이 나타나고 발휘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자다운 제자의 삶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대가 너무나 주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을 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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