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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낭비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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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낭비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 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닷새 전에 예루살렘 옆의 베다니란 동네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이 잔치는 예수님의 죽음을 며칠 앞두고 벌어진 잔치, 죽음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실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시 베다니에서 예수님의 잔치를 준비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자매 뿐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 아무도 그 잔치가 죽음을 위한 잔치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몇 주 전에 우리교회 아무도 모르게 우리가 위하여 기도해온 윤 형제님께서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녀들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른다고하여 우리에게 연락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주에 이 목사님이 병원 심방을 다녀오셨고, 저도 두 주 전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우리는 몰랐습니다. 제가 그 때 심방하여 드린 기도가 마지막 기도인 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라는 생각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언제 내 옆의 형제가 세상을 떠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언제 내가 주님 앞에 서게 될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오늘 주님을 위하여 마음껏 헌신하십시오. 
오늘 주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이제 마지막 걸음을 한 것인 줄 결코 몰랐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값진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 자신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도 선생님께서 이제 곧 세상을 떠나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너무나 귀한 향유를 붓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을 것을 왜 그리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렇게 해석해주셨습니다.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사람이 죽으면, 시신에 향유를 발라 부패를 방지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바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낭비라고 치더라도, 이보다 더 위대한 낭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지, 그것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후대하고, 베풀고, 섬기십시오. 이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굳이 낭비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위대한 낭비입니다. 
<명심보감>에 출문여견대빈(出門如見大賓)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밖을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큰 손님 섬기듯이 하라’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산다면, 후회하지 않는 삶, 아니 보람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향유냄새가 가득하더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값비싼 향유를 에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화폐단위입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안식일은 쉬니까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거액입니다. 요즘의 돈으로 대략 환산하면, 약 1500만원 정도될른지 모릅니다. 
순전한 나드 한 근, 이것은 아마 마리아가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보(家寶)일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의 결혼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발에 부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향유냄새가 가득하더라, 
오늘날 여러분의 가정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향유냄새가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에 통일의 향유냄새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향유냄새 가득한 집이 되려면, 내가 내놓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할 때, 오빠 나사로가 잔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지,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는지, 옆집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날에 무슨 선물을 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드릴까, 이 생각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지 말고, 내가 나의 최고의 것, 최선의 것을 내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지 않고 발에 부었습니다. 
3절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발’ 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만큼 발을 강조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발에 부었다고 기록했을까요? 거기에는 요한의 의도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 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세상, 죄악으로 가득찬 냄새나는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발은 신체 중 가장 더럽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냄새가 많이 납니다. 

향유가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가장 낮고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냄새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낮은 사람, 천한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만한 사람, 성공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 뭔가 좀 가진 사람에게 가까이 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앞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보다, 내가 그를 도와주려고 만났습니다. 

낮고 천한 사람, 대부분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그에게 예수님은 가장 귀한 시간을 바치셨고, 그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여, 그대가 나를 구원하였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만남으로 나의 이기심에서, 나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나의 지극히 값비싼 향유를 부음으로 나는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오후예배가 다 끝나면, 교회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있고, 쓰레기통이 넘쳐납니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 쓰레기를 줍는 사람, 바로 향유를 붓는 사람입니다. 
가장 더럽고, 가장 냄새난 곳, 거기에 향유를 부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의 머리털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묶어 다녔습니다. 머리털을 풀어 헤치면 창녀와 같이 취급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발은 초대하는 집의 하인이 닦아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닦으려고 해보세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몸을 최대한 낮추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머슴처럼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향유를 붓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머슴처럼 겸손한 자세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향유냄새 가득한 집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 향유냄새 가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의 향유를 내놓아야 합니다. 
2) 향유는 가장 더러운 곳, 낮고 천한 사람에게 부어야 합니다. 
3) 향유를 내놓을 때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내놓아야 합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300데나리온은 너무 큰 액수 아닙니까? 가룟유다의 말이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발에 부어 낭비하지 말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가룟유다의 의도를 콕 집어내고 있습니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미 가룟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틈탔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유다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돈 때문에 스승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까? 

유다의 말이 합리적이고 일리가 있는 것 같아도 잘못되었습니다. 그 의도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관점이 틀렸습니다. 유다는 돈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을 때, 그것을 돈으로 계산했습니다. 금방 300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매사를 돈으로 계산하고, 돈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면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마리아는 무슨 생각으로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수년동안 마리아와 언니 마르다, 오빠 나사로, 이 세 식구를 예수님은 너무나 사랑해주셨습니다. 외로운 삼남매를 자주 찾아주셔서 위로해주시고 말씀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오빠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관점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이렇게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돈의 관점 즉 경제적 관점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랑의 관점으로 볼 것이냐?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등하교 시켜주고, 학원에 태워주고 태워오고, 맛있는 음식 사주고, 좋아하는 것 해주고... 자녀를 위하여 사용한 시간, 자녀를 위해 사용한 돈, 아깝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은혜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주님을 위하여 내 형제를 사랑으로 섬길 것입니다. 돈으로 계산하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것입니다. 

5. 헛되지 않은 인생

1866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한창일 때, 평양의 대동강변에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조선의 군인들과 제너럴 셔먼호 사이에 긴장이 흐르면서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썰물이 되어 배가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을 때, 조선의 군인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불을 지르고 활을 쏘아댔습니다. 배 안의 승무원들과 승객들은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의 손에 성경이 들려있었습니다. 조선 군인 박춘권에게 성경을 주며 서투른 한국말로 “예수, 예수” 하며 말하는데, 박춘권은 칼로 그를 찔러 대동강에 순교의 피를 흘렀습니다. 이 젊은이의 나이는 27세,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얼떨결에 받은 성경을 박춘권은 조카인 이영태에게 건네줍니다. 
이영태는 그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나중에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놀즈선교사의 전도사가 되어 성경 전체를 번역할 때에 상당부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토마스목사가 죽기 전에 최치량이라는 어린이에게도 성경 세 권을 전달했는데, 당시에 금서인 성경을 받자 이 아이는 겁이 나서 평양 감영 경비인 박영식에게 갖다 줍니다. 성경을 수거하는 책임자이기도 한 박영식은 성경을 가져다가 집에 도배를 했습니다. 성경으로 도배된 벽과 천장을 상상해 보세요. 누워도 말씀, 앉아도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 집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바로 박영식의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교회가 됩니다. 그 후 이름이 장대현교회로 바뀌게 되는데 이 교회에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27세란 꽃다운 나이에 무모하게 성경을 들고 조선땅에 들어온 서양인 토마스, 
조선을 너무나 사랑하여 무모할 정도로 순진하게 목숨 걸고 조선땅에 들어온 토마스, 
그의 죽음을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낭비입니다. 
오늘 이 위대한 낭비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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