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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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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라 (요 11:17-44)  
 
 
1. 3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이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동안 건강했는데, 제대로 치료도 해보지 못했는데, 여동생 둘과 함께 가정을 이룬 가장인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는 너무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신앙생활을 잘 하여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칭찬이 자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 훌륭한 시민을 잃었기에 온 동네가 슬픔에 잠겼을 뿐 아니라,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도 함께 와서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간혹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나사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의 일입니다. 당시 그 나라 풍습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 바로 장례를 치릅니다. 시신이 쉽게 부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깊은 애도의 기간을 갖습니다. 이 기간에 유족은 몸에 기름을 바르지 못하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어떤 형태의 공부나 일도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씻는 것도 금했습니다. 깊은 애도의 기간이 끝난 후, 한 달 정도 가벼운 애도를 합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던 날 나사로의 집에 문상을 갔습니다. 그가 살던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나사로가 살아 생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단지 그 가족만의 슬픔이 아니라, 베다니 온 동네, 나아가 인근 예루살렘 시민들까지 슬퍼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다가 죽으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습니다. 며칠 전, 탤런트 오영실씨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술 전 인터뷰에서 "1년 전 건강검진 때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면서 "이를 계기로 많은 생각을 하며 삶을 뒤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됐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2. 나사로의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33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은 원어의 의미로는 “심히 분노하셨다” 는 뜻입니다. 
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심히 분노하셨을까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심령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진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잠시 잠을 자다가 깰 때, 이 땅이 아닌 천국으로 이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 박사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요 의사입니다. 그가 쓴 책 중 <듣는 귀>라는 제목의 신앙간증집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났는데,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아내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투르니에 박사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때, 투르니에 박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를 떠나 보낸 후에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속에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3. 나사로가 죽었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아까운 사람을, 아직도 젊은 사람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생깁니다. 천안함 폭파로 그 아까운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보이는 우리의 자녀, 건강, 재산, 사업, 직장, 이런 것들이 아무 문제가 없어도, 하루 아침에 갑자기 재앙을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가족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행복이 갑자기 불행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들입니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나사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 이집트의 왕자로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을 살해한 것 때문에 왕궁을 버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졸지에 왕자의 신분에서 남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태양 속에서, 거친 사막의 모랫바람을 맞아가며, 고운 손과 발은 갈구리처럼 거칠어졌습니다. 80세까지 사막에서 장인의 양떼를 치며 단련받았습니다. 

최상의 신분에서 최하의 신분으로 떨어진 모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단련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40년간 다듬으신 것입니다. 
교만했던 모세,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덤비는 모세, 성급한 모세를
신중한 지도자로, 겸손한 모세로,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하여 그가 원치 않았던 사막의 길을 40년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단련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후 얼마를 더 살았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나온 이후, 성경에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 십자가에 달리실 때,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실 때 등... 나사로의 이름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사로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는 다시 살아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기느냐,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명을 완수하느냐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나사로의 사명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으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이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우리의 고난에는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은 곧 사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해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해줄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여러분, 사명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랍니다. 

5.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문상하러 오셨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원망 섞인 뉘앙스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오빠가 죽었으니 이젠 아무 소망이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절망의 자리인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오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의 말씀에 죽은지 나흘되어 송장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말씀에 절망은 소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탄식은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생대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근심 걱정으로 절망가운데 놓여있는 성도님들, 십자가 밑에 나오십시오.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절망에서 나오라. 슬픔의 자리에서 나오라. 한숨의 자리를 떨치고 나오너라. 

6. 이렇게 아무리 말씀하여도 여전히 마음 속으로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십자가 밑에 나간다고 해결되나? 주님께 나와 기도한다고 걱정이 사라지더냐?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유대인의 무덤은 시신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큰 돌문으로 막아두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제서야 돌을 옮겨놓았더니,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의심의 돌을 옮겨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의심의 돌,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의심의 돌, 우리 가정의 화목을 빼앗아가는 의심의 돌, 우리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의심의 돌, 우리 사업의 번창을 저해하는 의심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주님. 그건 안됩니다, 주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의심의 돌을 옮겨놓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의심을 돌을 옮겨놓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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